리버풀-서울 도시교환 전
| 11.3--11.19, 공간 해밀톤 |


서울의 ‘리슨투더시티’와 리버풀의 ‘스태틱’ 간에 이루어진 교환 전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장소에 대한 상상이 글, 그림, 모형 등으로 펼쳐지는 장이다. 리버풀의 참가자에게 서울에 대한 인상을, 서울의 참가자에게 리버풀에 대한 인상을 묻는 질문의 결과물이 메인 공간에 전시되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소박한 인상과 상상 외에 어떠한 사전 조사나 의견 교환도 배제되었다. 전시장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기인한 기발한 생산물들로 가득했다. 상상으로 고착된 장소에 시간을 관통시킬 때, 이미지는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리버풀의 폴 셜리반이 참여한 영상작품 [국수집 프로젝트]에는 고기 국물이 끓어오르는 서울 재래시장의 활기와 물화된 구조적 잔해들로 전치된 리버풀의 대조가 이루어지며, 서울의 박은선이 참여한 영상작품 [허구의 기념비들]은 (재)개발 공화국에서 작동되고 있는 재현의 정치학이 표출된다. 그들의 작품에는 뿌리가 없기에 활기찬 기층의 삶과, 소수의 이익을 위한 빨대 구조 사이의 대조가 있다. 거기에는 ‘생계를 위한 투쟁을 자연과의 투쟁으로부터 사람을 둘러싼 투쟁으로 전환시키는’(게오르그 짐멜) 도시적 삶이 잘 드러난다.

그곳에 가보지 않은 나에게 리버풀은 구식 기계와 비틀즈를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산업혁명에 이어 위대한 문화혁명이 발원한 곳이 아닐까하는 나의 상상은 혁명이라는 그럴듯한 단어에서 파생되었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곳은 혁명적 열기와는 거리가 먼 썰렁한 장소였다. 폐허가 된 발상지라는 현실은 중심과 기원에 내재된 신화를 드러낸다. 세계화를 통해 확대 재생산 된 원형의 복제라는 위계적 메카니즘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는 시뮬라크르의 행진에 의해 무화된다.

원본이 지배하거나 원본이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원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뮬라크르가 지배와 저항을 동시에 추동한다. 물론 더 많은 참가자들의 상상이 축적된다면 평균치에 근접한 통계치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상상도 아니고, 통계도 아니다. 기원, 중심, 원형에 대한 흔적은 역사학자나 과학자의 면밀한 감식으로부터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나 과학 역시 사실이기 보다는 서사이며, 상상과 상징의 매개를 거친다. 현실과 진실에의 접근은 무한한 점근선을 따라 상대적으로만 간취될 수 있다. 상상과 현실의 간극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변수에 의해서 가속화된다.

리버풀은 영국의 수도가 아닌 쇠락해가는 도시이고,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기는 하지만 서구인에게는 아직도 변방에 존재한다. 양 도시가 가지는 주변적 위치는 상상이 뻗어나갈 수 있는 여지를 무한대로 확대시켰다. 한국 측 참가자들에게 리버풀은 쇠락한 공업도시라는 현실보다는 유럽의 낭만적인 도시라는 인상이 강했고, 영국 측 참가자들에게 서울은 88올림픽이 열렸고 개를 잡아먹는 도시로 비추어졌다. 목가적인 관광지, 그리고 집단주의와 야만주의의 공존이라는 양 도시의 이미지가 전혀 사실무근은 아니지만, 도시가 가지는 전체적 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객관적 정보가 미미한 상황에서, 한국 사람들은 언어적 유희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는 점이다. ‘liverpool’이라는 지명은 강이 흐르고 풀이 많은 곳이라는 오해를 낳았고, 심지어는 간이 둥둥 떠 있는 풀장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으로 비약한다. 인상과 상상 속에서 실제와 기호와의, 기표와 기의와의 간극은 멀리 벌어져 있다. 전시된 작품들은 허구와 진실 사이에 벌어진 긴장 속에서 빛을 발하며, 예술이란 언제나 억압적인 지배관계로 전화되곤 하는 이 간극 속에서 펼쳐지는 유희였음을 확인시킨다.

출전 | 월간미술 2010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