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술계가 당면한 근본적인 문제를 묻는 이 특집에서, 평론 부문을 맡은 필자로서는 편집부가 매우 구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제기된 문제들이 서로 연결되는 만큼 그에 대한 의견을 하나씩 서술하는 방식으로 답변 하고자 한다.
1. 서문 중심의 텍스트, 비평 없는 비평에 대해
; 이상적인 의미에서 미술의 출발점이 작품 생산과 비평이라고 할 때, 전시 서문은 비평가가 다른 기관이나 매체의 매개 없이 코드가 맞는 작가와 평론가가 직접 협업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각 부문의 자율성이 극대화된 현대사회에서, 재생산 부문이 자기지시적인 이해관계에 함몰되어 생산의 최전선에 서있는 작가와 비평가의 소통이 동맥 경화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는 서문 의뢰인인 작가의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계속 되는 것 같다. 현대미술의 특성 상 전시 직전까지 작품이 완료되는 경우가 드물고, 서문은 최종적인 결과물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리뷰와 달리 작품과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만큼, 평론가는 다른 관객들보다 가장 먼저 의뢰받은 작품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는 입장에서 글쓰기가 이루어지다 보면, 비평보다는 작품 읽기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해와 해석에 치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비평 없는 비평’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작품으로만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그 무엇이 ‘읽기’를 통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그것은 동시에 비평적 요구를 만족시켜 준다. 특히 전시 서문의 필자로서의 평론가는, 경우에 따라서 제한되지 않은 시간과 원고 분량이 가능하다는 매력이 사적 의뢰라는 부담을 떨칠 수 있게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작가나 평론가가 서로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소통의 공공적인 맥락이 활성화 되었으면 한다.
2. 비평의 장이 활성화 되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 작가들이든 이론가들이든 각자 열심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공통의 장에서 서로 부딪힐 일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각종 기관과 매체에 의해 선택된 소수의 작가와 필자 외에 대다수는 어떠한 공적 맥락으로부터도 배제된 채 각개 전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제풀에 지쳐 각개 격파 당하곤 한다. 작품과 비평의 생산이 개인의 경제적 토대와 열정에만 의지한 채 이루어지므로, 상호적 비판에 대해서는 암묵적인 금기가 생기게 된다. 미술계에서 공적인 지원제도가 활성화 된 것도 몇 년 되지 않는다. 그것조차도 여차저차해서 지원금만 받으면 땡이고, 그 이후에 공공지원에 걸 맞는 검증 시스템이 정교하게 가동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공적 지원을 받는 사업들에 대한 검증 시스템이 형식적 절차에 머무르지 않고, 비평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작품과 비평의 공적 담론화가 활성화되지 않을까. 비평이 공공영역에서의 활동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기관 뿐 아니라 매체의 역할도 크다. 작품과 담론의 연결이 띄엄띄엄 이루어지기보다, 집중시키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가령 중요하다 싶은 전시나 사안에 대해 여러 필자로부터 동시에 평문을 받거나, 상호적 대화가 가능하도록 장을 만드는 것이다. 인터넷을 비롯하여 미술계에 매체가 적지 않은 만큼, 비평의 활성화에는 미술계 구성원들이 서로 얽히게 하는 실질적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작고, 원로, 중견 작가들에 대한 역사적 정리와 한국미술사에 대한 정리 문제에 대해
; 역사가 등장하는 대담론의 장은 보다 체계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대학에 미술비평학과라는 것은 없지만 미술사, 미학, 예술학 등 관련 학과들이 있다. 그러나 미술비평은 미술사도 미학도 예술학도 아니다. 비평이야 말로 어떠한 동일성도 담보되지 않은 타자의 장이다. 그것이 비평의 소외와 존재 의미에 대한 동시적 원인이다. 미술사의 경우에도 근대미술사 등으로 분야가 특화되어 있고, 박사급 이상의 전공자들도 많이 배출되고 있다. 역사화 작업은 이들의 몫이며, 그것도 전공자들의 치밀한 협업의 산물이어야 한다. 비평은 현재 진행되는 전시나 활동 작가, 사건 등에 대해 담론을 생산하면서, 역사가 될 자료를 축적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비평가는 중요한 것들이 차후에 서술될 역사에 탈루되지 않도록 현장에서의 활동을 열심히 하면 된다. 진행되는 사건에 깊이 연루된 당사자가 역사 서술까지 담당하려 한다면 무리가 따른다.
4. 우리나라 평론가 협회는 문화예술 위원회와 미술평론가 협회가 있는데, 세대교체도 이루어지지 않고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말해진다. 이에 대한 생각은?
; 필자는 1994년에 일간지의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하면서 자연스럽게 미술 평론가 협회원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등단 코스가 다변화되어 있지 못해, 소위 ‘공식적으로’ 등단하는 평론가들은 한해에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인터넷을 비롯해 매체의 폭발적인 확산이 이루어졌고, 지금은 무슨 등용문 같은 것이 그자체로는 주목 되지 않는다. 재학시절을 제외하고, 현장에서 최소 10년 이상 활동하며 인프라를 구축하고 미술에 대해 나름의 시각을 갖게 되면 누구나 비평가로서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본다. 세미나나 워크샵 등 여러 미술계 행사에 참여하다 보면, 비평가로서의 직함만 가지고 있는 이는 극소수이다.
그것은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닌 현상이지만, 비평적 글쓰기에는 분명 그자체로 투입해야할 에너지와 원천이 따로 있으며, 필자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건 그 대목을 자기화하는 순간이 필수적이다.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이가 바로 미술계가 원하는 비평가일 것이다. 비평가야 말로 미술계에서 소수자의 입장에 놓여 있다. 협회의 문제는 바깥에서 보기에 무슨 거대한 이익 단체처럼 보일 뿐이다. 협회원들은 오늘도 아무런 조건 없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미술계 담론의 일부나마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5. 차세대 평론가들의 양성 문제에 대해
; 특정한 관문을 통과하는 것 보다, 비평 활동의 축적과 그것이 가능할 기회의 마련이 중요하다. 미술비평과 관련된 과를 졸업하거나 등단을 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묻혀 버린다. 물론 기회는 소극적으로 기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비평이란 것이 미술계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차세대 평론가들의 양성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차세대 평론가들은 어디에서 조직적으로 육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토양이 마련되면 자연스럽게 양성된다. 작업과 마찬가지로, 비평에 대한 열정은 냉담한 주변 여건과 무관하게 어느 정도까지는 자체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매력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혼자만의 연구가 오래 지속되기를 기대하긴 힘들다. 젊은 작가에 대한 지원은 활성화되어 있지만, 젊은 이론가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면서 비평만 죽었다고들 한다. 발표 지면이 확보라는 점에서, 전문 미술잡지의 역할은 무슨 무슨 협회의 일원이 되는 것보다도 훨씬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출전 | 퍼블릭 아트 2010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