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상품 그리고 사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양혜규 전 | 2010.8.21--10.24, 아트선재센터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발표한 작품을 포함하여, 2000년 이후의 작품이 망라된 양혜규의 ‘셋을 위한 목소리’전은 세계 유수의 전시회와 전시장 등, 미술제도의 정점에서 미술자체를 파열시키는 실험으로 가득 채웠다. 그것은 작품의 질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도 그 외연을 확장시키려는 현대 미술가들의 전략 중의 하나이다. 기성의 언어로는 명확히 이름붙일 수 없는 시도들(=실험)은 규범화와 제도화가 가하는 코드화의 압력을 빠져 나간다. 흩어져 있는 삶의 진실과 그 흔적들을 예술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밀도 있게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은 행운이다.

이 전시에서 양혜규는 잘 정돈된 미술의 어법 대신에,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드러냄과 감춤, 규모와 섬세함의 역학을 작동시킨다. 2층 전시장 공간을 쐐기모양으로 가르는 가벽들은 분리된 영역들 사이의 트임과 상호관계를 중시하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가벽 위에 상영되는 영상과 평면작품들, 그 사이사이의 공간에 놓인 광원(光源) 조각들이 2층 전시장을 채운다면, 3층의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셋을 위한 그림자 없는 목소리](2008)는 관객의 총체적 감각에 호소하는 거대한 연극의 무대이다.

2층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서 처음 보이는 작품 [소금기 도는 노을](2010)은 1키로 들이 소금상자들을 전시장 창 전면에 바둑판무늬로 설치한 것이다. 바다와 바람, 그리고 햇빛의 앙상블로 만들어졌을 이 결정체들의 포장지에는 미술관 창밖의 풍경처럼 풍광 좋았을 장소가 새겨져 있다. 산뜻한 상품의 형식을 통해 유통되는 소금상자들에는 자연에서 소금을 수확하기 위해 흘린 염전 노동자들의 눈물과 땀이 감추어져 있다. 또한 그것은 예술이 삶의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지도 반문하는 듯하다.

상품들은 2층의 전시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작품 [그 밖에서](2006)는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통해 영사되는 부동산 광고 이미지들인데, 과장이 섞인 이 허구적 건축물들은 주변 환경을 압도하는 번쩍거리는 바벨탑 같다. 거칠게 지워진 광고문구와 뒷면의 기사가 비추어지는 지저분한 바탕 면은 기념비적 건물들의 위용을 소격시킨다. 작품 [A4 무엇이든-존재](2007)는 인쇄 및 복사 용지로 흔히 사용하는 A4 사이즈의 종이를 이용하여 각도에 따라 보이기도하고 안보이기도 설치한 목재 부조물인데, 그것은 현대적 삶에 편재하는 코드화(=규격화)된 소통체계를 예시한다.




소금상자, 신문광고, A4 종이 같은 소재는 물질과 이미지, 소통 방식에 내재된 상품의 형식을 드러낸다. 상품은 현대의 대표적인 사물 및 대상의 형식이기 때문에, 팝아트 이래로 일상적 삶에 주목하는 현대 미술가들이 피해갈 수 없는 소재가 되었다. 아마도 상품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는 저 멀리 오지 같은 곳으로 떠나야 할 터인데, 지구상이 과연 그러한 곳이 남아있을 것인가. 작품 [소금기 도는 노을]과 [그 밖에서]에서 나타나듯이, 저편의 하늘 풍경조차도 온통 상품과 연관되어 있다. 가령 일상을 벗어나는 전형적인 방식인 여행이 패키지화되어 있듯이 말이다.

문화 관광지로 개발된다 함은 어디를 가도 비슷한 것을 소비하게 하도록 하는 생산 활동과 다를 바 없다. 기계적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기분전환을 야기하는 자극들, 신기하고 이국적인 것들이 주는 체험은 식민주의를 통해 세계화가 시작된 근대 이래로 예술, 즉 심미적 체험과 분리불가능하다. 이 심미적 체험은 고된 생산적 노동 보다는 느긋한 소비와 보다 연관되어 있다. 상품이란 예술과 달리 대량생산된 것으로, 그 익명적 생산과 소비의 체계가 특징적이다. 자못 투명하게 드러나는 이 익명성 속에는 예술과 삶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신비와 계시, 때로는 혁명적 사고에 빠져든 초현실주의가 주목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공물이었다. 2층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광원조각(2010) 6점에서 발견되는 것은 일상에 널려있는 진부한 상품들로, 여기에 수집된 사물들은 현대인의 무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이다. 작가가 모아놓은 물건에는 본래의 기능을 초과하는 과장된 표면들이나 너무 특화되어 무엇에 쓰이는지 알 수 없게 된 것들이 종종 발견된다. 여기에서 다소간 명료한 형식을 갖춘 대상이나 상품은 불투명한 사물로 전환된다.

예술이라는 제도 속으로 끼어들어온 일상적 물건들에서 초현실주의적 오브제의 속성이 발견된다. [서울 근성], [황금 휴가], [약장수], [얼굴 없는 미녀], [자투리 정원], [씻고 닦고], [서울 멋쟁이] 등으로 이름 붙여진 설치물들은 180cm 높이의 행거에 색색의 수세미로부터 가짜 식물 덩굴들에 이르기까지 테마별로 연출되어 있다. 광원들과 결합되어 있는 장식, 건강, 자연, 살림 등으로 구별될 수 있는 물건들의 모음들은 진열의 방식을 보여주지만, 배열 방식은 다소간 무원칙적이고 무질서하며 무정부주의적이다. 이 광원조각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헤어스타일이나 있는 대로 끼어 입고 다니는 걸인의 패션을 떠오르게 한다.

작은 전구들이 함께 얽혀 있는 잡다한 물건들은 분류와 범주화를 거부하는 듯하지만, 걸린 물건들이 완전히 임의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싸구려 물건들은 키치적인 것들로 가득 찬 우리의 삶을 단지 풍자하기 위해 동원된 것도 아니다. 고고학자 같은 시선으로 도시를 돌아다녔을 작가의 눈에 띈 이것들은, 전시로 인해 이 물건들을 다시 접하게 된 관객에게 발견의 기쁨을 선사할 정도로 재미난 것들이 적지 않게 포진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일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식의 싱거운 메시지 전달--한 때 유행했던 문화비평 담론에 만연했던 이러한 관점은 당연한 사실을 중언부언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겉으로의 문화 민주주의적 태도와 달리 예술가로서의 자만이 깔려 있다--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광원조각들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든 명확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의류 행거와 빨래 건조대 등에 엉성하게 걸쳐 있는 공통된 방식을 가진다. 그것은 번듯한 상품진열이나 장식의 방식을 벗어난다. 무엇을 빼고 대신 다른 것을 넣어도 표시도 안날만큼 유기적 총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이것들은 단순히 집합되어 있을 뿐이다. 전선줄로 연결된 전구 때문에 더 얽히고설킨 느낌을 주는 오브제 군상들은 거의 등신대이며, 직립의 요소로 인해 인간과 비교된다.

자신의 심미적 취향과 경제적 여력에 따라 구입한 물건들로 대체될 수 있는 현대인의 정체성은 생산과 소비품목들이 더 많아질수록 무한대로 채워지면서, 또한 비워질 것이다. 산업혁명 이래로 이미 도래한 이 현실은 더 이상 비극도 희극도 아니며, 상품들의 빠른 생산과 소비 주기 때문에 심지어는 고색창연한 아우라 마저 풍긴다. 이러한 작품들은 전체와 부분, 안과 밖 사이의 변증법을 거부함으로서, 유기적 총체성에 방점을 찍는 고대나 근대적 미학과의 멀찍한 거리감을 보여준다.

어떤 것이 만들어졌을 당시부터 분명하게 위치했을지 모르는 질서 감각, 그 선험적 도식은 나른하게 늘어지며, 작가는 이 늘어진 녹음테이프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조명하기 위해 작은 전구들을 들이댄다.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할 광원 자체가 흐릿하며 칡덩굴같이 착종된 상태이다. 속해 있음이 아니라, 걸쳐있음이라는 방식은 2000년대 초기 작품인 [평상의 사회적 조건](2000-2001)에서도 두드러진다.

이 작품은 가게나 골목 같은데 흔하게 놓여있는 평상들을 사진으로 수집한 것으로, 평상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부기함으로서, 문화비평적인 텍스트로 읽힌다. 평상은 일종의 포터블한 마루라고 할 수 있는데, 마루가 건물 안과 밖을 연결하는 구조이듯, 평상은 중간적인 형태로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걸쳐 앉을 수 있는 구조를 가지며, 지금은 파라솔이나 벤치 등, 다른 형식으로 진화되어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그것들은 조만간 생활사 박물관 같은 곳에서 다시 등장할 고고학적 대상들이다.

그것은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사물 중에서 특정한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들에 대한 탐구이며, 도시를 어슬렁거리는 산책자이자 고고학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이미 사라지고 있는 중이기에 대상에서 사물의 위치로 변모된다. 시간의 흐름은 삶에 명확한 자리가 있었던 어떤 필연적인 기능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장식이나 상징 같은 또 다른 기능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전이는 내부/외부, 사적인 것/공적인 것 같은 공간적 대립에도 적용된다.

작품 [신용 양호자들](2010)은 금융 정보를 담은 우편물 내지를 수집하여 수평으로 찢어 붙인 작품으로,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어른거리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공식적 봉투의 이면에 새겨진 무늬들은 겉면 보다는 다채롭지만 그에 못지않은 획일성을 가진다. 국민, 시민, 소비자 등으로 분류되어 대량 발송된 공적 메시지들은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사적 개인이란 존재가 사실은 대중, 즉 익명적 다수의 일원임을 반증한다. 공적, 사적 소비란 대중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A4 용지에 개인의 비밀번호나 암호가 프린트되어 증서처럼 만들어진 작품 [증서](2010) 역시, 언제든 바깥으로 나돌 수 있는 개인 정보의 상황을 표현한다. 번호나 암호로 환원될 수 있는 개인은 사실 풀어야할 비밀이 남아 있지 않은 존재이며, 자본의 힘에 의해 즉각적인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불투명한 덩어리가 아니라, 종잇장 같은 존재로 환원된 인간에게 차이를 발생시킬 수 있는 유력한 방식은 접기와 펼치기라는 또 다른 위상학으로의 전이이다. 작품 [전환하는 삼인자](2008)는 종이 접기를 통해 만들어진 수많은 이미지들이 시네마 디스플레이를 통해 명멸한다.

[전환하는 삼인자]가 소수에게만 소통되는 비밀의 지식으로서의 기하학이나 수비학 같은 분위기를 주는 것과 달리, 비슷하게 접기와 펼치기라는 방식으로 변모하는 빨래 건조대는 지상으로 내려온 기하학이다. 작품 [접힐 수 있는 것들의 체조](2006)는 15개의 흑백 사진 연작으로, 빨래 건조대가 취할 수 있는 최대의 형태를 펼친다. 연작의 형식을 통해 동감이 부여되는 이 구조들은 제목 그대로 체조하듯이 보인다. 이러한 인간 형태적 비유는 지상에 우뚝 선 수직의 존재로서의 기념비성, 그것으로부터 야기되는 실체성이 아닌, 몇몇 구성요소들 간의 가변적인 관계성이 극대화된 산물이다.

국내외의 여러 장소들이 등장하는 [비디오 삼부작](2004-6)이나 [쌍과 반쪽–이름 없는 이웃들과의 사건들](2009)같은 비디오 에세이에서는 한 장소를 인지하게 해주는 특성이 탈각된 공간성이 특징적이다. 전자에는 어디에서도 정착할 만한 곳을 찾을 수 없는 세계 유랑자적 시점이 나타나고, 후자에서는 한국 같은 개발공화국에서 고향이나 동네, 이웃이라는 개념이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내부적 유랑자의 시점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밝혀지기도 마주하기도 힘든 공동체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공동체 속의 개인 역시 특정한 시공간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빛에 산란하는 입자 같은 존재일 뿐이다. 어디엘가도 다시 마주치는 것은 자신일 뿐이며, 자신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양혜규가 깊이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집 없는 이방인’의 시점을 공유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뒤라스의 단편소설 제목인 [죽음에 이르는 병]처럼, 이방인의 시점은 진한 멜랑콜리를 자아낸다. 누군가가 진정한 예술가라면,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방인의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삶이 전하는 쓰라린 진실 중의 하나이다. 3층의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셋을 위한 그림자 없는 목소리](2008)는 기지가 넘치는 2층의 개별적 작품들이 하나의 무대로 종합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문화비평, 풍자, 계시 등으로 가지를 뻗는 사물 또는 초현실주의의 미학은 연극성(theatricality)으로 수렴된다.

마이클 프리드나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현대미술의 어법 변화를 추적하는 중요한 논문들에서 개진한 바 있듯이, ‘예술’에 내재된 형식적 투명성은 ‘사물’의 표면을 표류하는 수수께끼로 변모한다. 양혜규의 작품에서는 예술과 사물 사이에 상품의 형식이 끼어들어 복잡성을 배가시킨다. 연극은 딱히 미술로 규정될 수 없는 여러 기원을 가지는 것들이 모여 있는 장이 된다. 이 연극의 무대에서 명확한 대상(상품)이나 형식화된 예술을 대신하는 사물, 명료한 시각을 대신하는 몸, 공간보다 불확실하게 다가오는 시간성, 명석 판명한 현재성보다는 몰입과 현존의 체험이 부각된다.

양혜규의 작품에서 연극의 무대를 이끄는 것은 목소리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들려오던 생명의 리듬과 타자의 목소리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청각성은 한 지점에서 출발하고 선적으로 진행하며 정점으로 귀착되기 마련인 시각성 보다 불확실하지만 보다 원초적인 감성에 호소한다. 근대를 지배했던 주도적인 감각이 시각이었다면, 이제 근대의 황혼과 더불어, 시각은 여러 감각 중의 하나로 상대화된다. 눈으로 집약된 감각의 정점은 온몸으로 흩어진다. 이 작품에서 근대적 감각 분화는 공(共) 감각의 장으로 미끌어지며, 공감각을 이끄는 것은 작가나 관객이 입력한 소리에 반응하는 총체적 환경이다. 제목에 ‘다치기 쉬운’이라는 형용사가 부기되었듯이, 청각성과 더불어 촉각성도 부각된다.

음향장치와 이에 움직이는 8대의 조명기기, 교차된 블라인드와 거울 등이 설치된 작품은 조명 및 적외선 히터가 뿜어내는 열기와 선풍기의 바람, 소리, 그리고 향 등으로 전시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운다.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알루미늄 블라인드는 공간을 구획하며, 같은 방식으로 간간이 끼워있는 거울은 난반사를 통해 구획된 공간을 미로로 확장한다. 그것은 명확한 설계에 의해 구획된 기하학적 공간을 전체의 조망이 불가능한 통로로 변화시킨다. 오감이 작동하는 장 안에서 관객은 불투명해진 통로를 통과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온몸으로 느껴지는 총체적인 감각의 장으로 몰입시키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조명은 지금 여기에 있는 몸의 현존과 그 체험에 내재된 시간성을 극대화한다. 기계들만 작동하는 텅 빈 무대를 연상시키는 이 공간에서 강렬함과 신비함이 오가는 체험이 야기된다. 지금 여기의 충만한 시공간을 야기하는 것은 빈틈없이 계획된 동선이나 안무 감각의 결과로, 미니멀리즘이나 초현실주의의 예에서 종종 드러나듯, 폐허 같은 공간에서 우연하게 주어진 현존의 체험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양혜규의 작품에서 구조와 체계는 완전히 닫혀 있지 않다. 작품 제목에 포함된 ‘셋’이라는 숫자는 나와 너의 대치나 변증법적인 합일을 넘어선, 미지의 공동체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환원되지 않는 질서에 속한 타자들을 기꺼이 환대한다.

출전 | 컨템포러리 아트 저널 2010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