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도의 불빛들-동남아시아 현대미술 전,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 2010.12.9--2011.2.13, 서울 2010 12.9--2011.1.16 |
| 권기범 전 2010.12.23--2011.1.7, 그림손 갤러리 |
동남아시아 현대미술 전과 권기범 전에 전시된 작품들은 아시아의 전통과 정체성이 자본주의 문명과의 접점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충돌과 그 흔적들이 담겨 있다. ‘동남아’, 또는 ‘아시아’라는 덩어리로 집단화되곤 하는 이 지역의 문화 예술은 서구의 ‘중심’에 대한 동양의 변방, 서구가 보편화시킨 자본주의의 특수한 예로 간주되곤 하였다. 이완되고 해체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지역에서의 문화예술은 여전히 중심의 관계 속에서 작동된다. 조나단 프리드먼은 [지구화 시대의 문화정체성]에서 주변부의 정치적 문화적 엘리트층은 중심과의 관계를 독점함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해왔다고 말한다.
거시적이고도 미시적인 차원에서 더욱 촘촘하게 연결된 지구적 상황에서 더 이상의 순수한 중심도 주변도 있을 수 없지만, 문화적 자의식이 가득한 이들의 작품들에서는 구별되는 이념형(ideal type)들의 역학관계가 선명하다. 그것은 더 이상 강압적이거나 자발적인 식민지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미 예술을 포함한 모든 문제들이 지구적(global) 상황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외의 물적, 인적 자원의 약탈과 시장을 전제로 한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혁명이 먼저 간취된 서구의 헤게모니에 의해 문화적 공간은 동질화되었다. 근대화 과정과 동일시될 수 있는 이러한 동질화에 대한 ‘주변부’의 반기가 힘을 얻게 된 계기가 근대화 과정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완수한 이후의 일이었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문화적 자의식의 고양은 고립이 아니라, 타자들과의 더 많은 접촉--우호적이기도 하고 적대적이기도 한--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이력 면면에 두드러진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동질적 질서는 점차 탈중심화 되고 있다. 특히 세계 시장과 생산의 탈 중심화는 세계 자본축적의 탈 중심화와 연결된다. 프리드먼은 전체 자본축적 중 점점 더 많은 부분을 다국적 기업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만큼 자본의 생산과 재투자 사이클은 파편화되고 중심부에서의 탈산업화가 진행되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세계에서 복잡한 조합의 자본축적이 이루어진다고 지적한다. 일본이나 한국은 일찌감치 그 체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였고, 중국과 인도, 동남아 지역 또한 후발주자로서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각 지역의 전통은 물론 현대 예술이 주목받기 위해서는 보편화된 시장체제가 존재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중심의 독점이 다중심의 경쟁체제로 변화하는 흐름을 반영한다.

천안과 서울에서 동시에 열린 [군도의 불빛들]은 동남아 지역에서 각개 약진하고 있는 현대미술가 13명을 초대한 전시이다. 그들의 작품 어법은 현대적(보편) 이면서도 지역적(특수) 이다. 그들은 세계 미술무대와 시장에서 통하면서도,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동남아 국가로서의 배경을 가진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체험, 그리고 전통을 포함한 정체성의 물음은 이 과정에 스며있다. 혼성성(hybridity)은 내밀한 영역까지 지배한다. 인도네시아 작가 아구스 수와게는 자신의 몸을 매개로하여 미술사를 패로디 하는데, 그의 작품에서 유명 작가의 작품들을 다형적(polymorphous) 성이나 배설물로 전치된다. 동물 머리뼈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경사진 벽을 따라 올라가 벽을 뚫고 들어가는 작품은, 목표를 상실한 정점을 향해 줄지어 올라가는 동질적 질서와 그것에 내재된 죽음의 충동을 예시한다.
필리핀의 작가 호세 레가스피는 서울 전시장 2층을 A4정도의 크기의 작품들로 벽을 가득 매웠다. 하나의 질서로 묶이기를 거부하는 수백 개의 파편들은 성적 도착, 살인, 폭력, 수간, 타락, 자살, 책형 등이 담겨있다. 금기를 위반하는 불경의 세계는 수평선 위아래로 두 개의 어두운 톤만이 대조되는 그의 바다풍경과 닮았다. 기이함(uncanny)은 예상 밖의 이질성들이 충돌한 결과이다. 제럴딘 하비엘은 공포 영화 속 장면들을 연출하는데,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소녀들은 연약한 피해자인 듯 하면서도 불길한 기운을 자아내는 초자연적 힘이 내재되어 있다. 도나 옹의 작품 속 수백 장의 인형 사진들과 조명이 변화하는 인공적 세팅 속에서 전개되는 흑백영화는 기이함의 절정이다. 이 기이함은 단순히 개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 충돌의 산물이다.
동아시아 이민을 제한한 미국의 법률로 어색해진 양국 관계를 인형의 교환이라는 문화행사로 무마하려 했으나,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이 우호의 상징들은 폐기처분된 것이다. 다형적 성과 기이함은 죽음에 근접하고 있는데, 그것은 탈 중심화에 의해 억압된 것들이 복귀한 경우이다. ‘제3세계에 속하는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음’을 강하게 의식하는 아리아디티아 프라무헨드라는 내가 누구인가에 관한 질문을 한다. 자신의 작품 속에 항상 자화상이 들어있고, 그 세계에 아직 남아있는 가족애와 종교적 심성이 있다. 그러나 그림 앞에 검게 그을린 채 파괴된 설치물들은 작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애도하는 듯하다. 태국의 나티 유타릿은 자국의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을 해골을 더듬는 원숭이, 뼈와 피의 직접적 만남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의치 등, 알레고리로 가득한 고요한 정물의 세계로 표현했다.
동남아 지역의 역사에 대한 작가들의 언급은 보다 신랄하다. 나디아 바마하즈는 대영제국 치하에 있던 시기의 인도로부터 들여온 이슬람 건축 양식을 차용한 말레이시아 국무총리실을 역사적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은 현재의 적법성을 고고학적 비전을 통해 상대화시킨다. 준 응우엔 하츠시바의 비디오 작품은 신년행사에 쓰이는 거대한 용을 물속에서 움직여 화려한 동양적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그것은 용모양의 베트남 지형과 보트피플 같은 정치적 의미를 동시에 담는다.

레슬리 드 차베즈의 작품 [미래의 불안을 위한 혁명적 과거]는 필리핀 독립투사이자 혁명가를 벽화와 설치형식을 혼용하여 담았으며, 딘 큐 레이는 수많은 희생을 낳았던 베트남 전쟁을 끝없이 바다로 추락하는 헬기로 표현했다. 그의 사진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담은 장면을 지역 특산품인 멍석처럼 짜서 두 시공간대를 교차시킨다. 심각한 역사적 사실은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텍스트처럼 다루어진다. 혼성적 특성이 가벼움과 만나는 부분은 작가들이 대중문화와 일상에 보다 주목할 때이다. 나빈 라완차이쿨은 마네킹이나 영화 간판, 가벼운 에피소드들이 이어진 영상작품을 보여주는데, 많은 작품의 매개 고리가 되는 것은 자기 이름이다.
타이의 인도인 이민 2세이며 일본인 부인과 함께 사는 그에게 정체성의 문제는 작품 중심에 놓인다. 에코 누그로호는 만화와 길거리 벽화의 양식을 적극 차용한다. 여기에 자수나 그림자 인형극 같은 자국의 전통이 포함되면서, 세계시장에 의해 보편화된 대중문화와 지역의 특수한 민속 문화가 일체화 된다. 다섯 아이의 부모인 알프레도 & 이자벨 아퀼리잔이 모아놓은 수많은 슬리퍼들은 경제적 유목이 일상화된 필리핀 지역을 반영한다. 낡은 슬리퍼들이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천사의 날개 같은 것이 될 수 있을까. 또한 그로테스크한 마스크로 변신한 지프차는 제국주의와 세계화의 격랑 속에 놓인 동남아의 또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그 표정은 희극적이면서도 비장하다.
권기범의 ‘모호한 형상의 구축’ 전은 직관과 분석이 공존하며, 전통을 비롯한 정체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활짝 핀 꽃과 식물 줄기 이미지가 다양한 톤으로 구현된 [ambiguity collection] 시리즈와 이국적인 여성 옆얼굴 뒤쪽으로 복잡하게 얽힌 형상들이 있는 [ambiguity_Aoki] 시리즈는 고착되지 않는 현실과 과정 중의 주체를 표현한다. [Aoki] 시리즈의 도상은 유명한 독일계 일본인 모델에서 온 것으로, 작가는 아시아의 정체성으로 다문화와 혼혈을 제시한다.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은 무엇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모호한 실체들로 채워진다.
거의 무작위에 가까운 가변성은 주변으로서의 동양에 대한 서구적 상상인 오리엔탈리즘과도 다르다. 권기범의 작품에서 동양은 정지에 가까운 정체가 아니라, 들끓는 이합집산을 보여준다. 그것은 거의 변화가 없는 ‘차가운’ 사회로서의 원시적 문화가 아니라 ‘뜨거운’ 역사에 속하지만, 더 이상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는 근대의 프로젝트와는 무관하다. 그의 작품에서 한 순간을 점유하는 공간성은 시간성의 범주에 잠식된다. 작품을 이루는 다양한 계열의 흑백 톤은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여 창조된 변화무쌍한 시간들이다.
그것은 개인의 뇌에서 벌어지는 일이자, 방금 전 현실이 부인되는 역동적 사회 속의 자의식이 드러난 것이다. 수년째 전시장에 그려오고 있는 대형 벽화 [jumble painting]은 중력에 이끌리는 물성을 거대하게 확대한 것으로, 지필묵이 가지는 본질적 특징을 기념비적 스타일로 구현한 것이다. 움직임을 정지시키는 회화의 속성, 정지 속에 내재된 에너지를 간취하는 공간적 스케일, 자연의 외형의 재현이 아닌 자연의 힘과 하나가 된 필획은, 다양한 기원을 가진 것들의 병렬적 혼성이 새로운 종의 탄생과 직결될 실험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출전 | 아트 인 컬처 2011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