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어진 익숙함


2000년대 초반 한국 미술계에 갑자기 등장한 데비 한은 근 6여 년간의 활발한 국내외 활동을 통해서 미술인은 물론 일반대중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교포 1.5세대 작가이다. 외유내강(外柔內剛) 형의 작가인 데비 한은 편견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는 부드러움, 그리고 나아갈 방향을 감지했을 때 끈질기게 도전하여 쟁취하는 강인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청자, 백자, 나전칠기 등, 한국에서는 거의 맥이 끊기다시피 한 전통적 방식도 용케 배워서 현대미술에 적용한 수많은 작품들에서 작가의 개념과 감각, 그리고 의지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데비 한의 작품은 국제성과 지역성, 보편성과 특수성 등 문화권과 문화권 사이의 간극과 편차를 이용해 작동하는 것들이 많다.

많은 작품에 나타나는 비너스 머리는 미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호출된다. 2004년부터 시작한 청자 작업은 유럽의 대리석 조각을 번안한 시리즈로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로 추앙받는 청자와 보편적인 미의 기준이 된 서양의 도상이 만나서 ‘이상화된 이상함’이 특징적인 <미의 조건> 시리즈로 탄생한 것이다. 대리석 혹은 석고가 청자로 치환되었듯이, 비너스 상은 여러 인종의 조합으로 변형된다. 청자 작업에서 얼굴 형태를 일일이 조각하여 고온으로 굽는 과정에서 수없이 깨져버리는 시행착오를 거쳤다. 작가는 단편적인 아이디어나 추상적 관념보다는 삶의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체험에는 손으로 직접 만드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데비 한은 팝아트나 키치, 개념미술, 포스트모더니즘 등과는 달리, “영혼과 육체를 다시 예술에 담으려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구현된 작품에는 개념이나 도식에서는 불가능한 강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다. 거듭된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진 청자들은 서양적 틀 거리에 동양 도자기의 표면이 결합된 독특한 도상이다. 2009년에는 백자로도 이 시리즈를 완성했다. 데비 한의 작품에서 기법의 참신함과 완전성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통한 소통이라는 목적의 필요조건이다. 그녀의 작품은 구별되는 범주가 부딪힘으로써 발생하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서구화된 미의식을 낯설게 하기에는 한국적 어법이 필요했고 그것이 청자와 백자, 그리고 나전칠기 기법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와 상감기법이 만난 작품은, 동양화의 여백을 생각나게 하는 칠흑 같은 색은 신비로운 공간을 만들어냈고 이는 동양화의 간결한 선으로 구성된 형태와 어우러져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관념으로 고착된 미가 아닌, 우리 시대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과 소통을 원하는 작가의 의지가 묻어난다. 데비 한의 작품은 청자, 백자, 나전칠기, 석고상 등 각자 있었던 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짝짓기를 통해 현실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낯설게 하는데, 현실과 아름다움이 중첩되는 또 하나의 영역은 바로 여성이다. 그녀는 미의 화신인 비너스 상을 바탕으로 하여 여성의 온몸에 새겨진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관념과 이데올로기를 나타낸다.

종종 아그리파 상도 등장하지만, 데비 한의 많은 작품에는 비너스 상을 비롯한 여성 이미지가 압도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경향이 있지만, 여성은 남성에 비해 더 많이 미와 관련된 환상과 증후의 중심에 놓인다. 여성은 실제와 허구 사이에서 찢겨진 또는 봉합된 모습이 아니라, 몇 겹의 가상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여성이 남성의 환상과 욕망이 투사되는 빈 서판으로 간주되어 왔던 현실을 반영한다. 데비 한의 작품은 미의 기준으로 안착된 고대의 마스크 상을 여러 차원에서 변주하면서, 미가 제조되는 관념적 단계부터 임상의학의 시각까지 여러 차원을 두루 살펴본다.

<여신들> 시리즈는 마치 레이저 시술을 하는 성형 외과의사 못지않은 치밀한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녀의 작품에서 역설적인 메시지가 전달되는 효과적인 방식은 형식적인 완결성인데, 엄청난 양의 컴퓨터 작업을 거쳐 등신대보다 더 크게 출력된 실제의 작품은 그 완벽한 제모술을 통해 자연과 인공 간에 설정된 또 다른 경계를 넘나든다. 데비 한의 작품은 다양한 차원에서 생산되는 몸의 이미지를 통해 보편화된 미의 관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의 작업이 보편적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코스모폴리탄적인 입장뿐 아니라, 저 아래에 있다고 간주된 몸과 저 높은 곳에 있다고 간주된 진리를 연결시켜서, 양자 간에 성공적인 소통의 통로를 마련하는 그녀만의 방식과 개념이다.

출전 | 아르코 미술 작가론(한국 문화예술 위원회) 축약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