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은 2009년 하반기부터 주요 작가와 큐레이터를 대상으로 하는 전문가 성장프로그램을 진행해오고 있다. 이는 각각 <신진작가비평워크숍>과 <독립큐레이터 기획워크숍> 등 두 워크숍을 축으로 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이번 워크숍은 이 가운데 <신진작가비평워크숍> B팀의 집중 크리틱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신혜정(설치작업), 김지혜(설치판화), 금혜원(사진), 최중원(사진), 이보람(페인팅), 박미선(페인팅), 김미란(설치작업) 등 총 7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형식도 다양하고 내용도 다양해 상호간 접점보다는 이질성과 차별성이 두드러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느낌은 현재 미술현장 내지는 생리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확인된다는 생각이다.


신혜정은 면천을 이용해 만든 각종 봉제인형들을 설치작업 형식으로 꾸몄다. 이를 통해서 일종의 <일그러진 풍경>을 형상화한다. 처음엔 유학시절의 그리움과 같은 개인적인 체험이 계기가 되었고, 이후 점차 이 봉제인형들에 사회적인 풍경과 존재론적인 풍경을 투사하기에 이른다. 이와 함께 프레임 작업들을 보면 변태 내지는 변종에 착안한 박제된 곤충 같은 비정형의 형상들을 내재하고 있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 조형된 일그러진 풍경이나 왜곡된 형상이 행복과 욕망 그리고 유토피아가 실현된 완전한 세상에 대한 꿈꾸기의 반어법적 표현처럼 읽힌다.
그런가하면 이 작업들의 연장선에서 제작된 자기연출퍼포먼스를 영상으로 기록한 일련의 작업들이 흥미롭다. 제목 내지는 주제로서 제안된 <마이너리티 되기>는 아마도 질 들뢰즈의 00되기 철학에 착안한 것일 것이다. 정체성의 논리에 대해 차이의 논리를 대질시키고, 기표의 퍼스펙티브에 대해 기의들의 무한연쇄를 대항시키는 것. 그 세부를 보면 부엌을 배경으로 가면을 쓴 작가가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춤을 추는 영상이 가사일로 대변되는 여성의 성역할론을 건드리고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영상작업에서 작가는 오프닝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인 전시장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각종 가발이나 의상 그리고 가면을 번갈아 착용해가며 자기변신을 꾀하는 퍼포먼스를 행한다. 이를 통해서 군중 속의 고독을 형상화한다. 이 퍼포먼스는 이를테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위한 제스처일 수도 있고, 사람들과 간절히 소통하고 싶은 욕망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욕망의 공공연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진정한 소통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를테면 잰 뭐야? 라거나 웬 시츄에이션? 같은 설렁한 분위기를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이로써 소외와 특히 자기소외와 불통을, 그리고 좀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상대방에게 들키는 순간 오히려 소통의 가능성을 망치고 마는 이율배반을 형상화한 것이다.

더불어 자기관음을 소재로 한 경우도 있다. 보통 관음이라고 하면 타자를 전제하거나 대상으로 하기 마련인데, 작가의 경우에 자기 자신을 관음의 대상으로 가정해본 것이란 점이 흥미롭다. 여기서 작가는 관음의 주체로서의 자신과 관음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으로 분열된다. 이로부터 이중분열과 다중분열에 연유한 도플갱어가 파생되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관음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대상화하고 객체화하고 사물화 한다는 것. 들뢰즈의 용법을 빌리자면 나르시스 되기를 실천한다는 것. 그 이면에 자기소외 곧 스스로를 낯설어하는 징후 내지는 자의식이 발견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타자와, 여성주의의 성적 주체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주류의 주체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렇게 동일시하면서 내세우는 자기 분신이 인형인데, 그 자체가 이미 익명인 인형에다가 또 다른 익명인 가면을 덮씌우는 것에서 이중익명이 엿보인다. 그 논법이 헤겔의 이중부정과 지양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한다. 쉽게 말해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과 통하는 것.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긍정하는 것. 일차로 소외된 자기를 재차 소외를 통해서 되찾는 것. 인형과 가면을 대리주체로서 내세운다는 점에서 제도와 사회에 내어준 자기,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자기, 연극적인 자아, 페르소나에 대한 공감이 읽혀진다. 이로써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의식의 물음이 대개는 타의에 의해서 강요되는 억압적인 현실에서 진정한 자기는 누구이며 무엇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김지혜의 . 우리 모두는 움직이는 땅이고 불안정한 땅이며 불투명한 땅의 지반 위에 서 있다. 이처럼 땅을 움직이게 하고 불안정하게 하고 불투명하게 하는 것은 선택이다. 선택은 삶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고, 매번 선택을 강요받는다. 작가의 작업은 이런 선택으로서의 삶의 본질 내지는 성질을 조형화한 것. 선택의 문제는 결국 간섭의 문제이며 선택의 기로에 끼어드는 노이즈의 문제인 것.

여기서 작가는 간섭과 판단과 결단이 요구되는 문제를 선택의 게임으로 본다. 허다한 그리고 이질적인 선택사항들이 중첩되고 증폭되는 노이즈 다발 속을 사회 자동화 시스템은 매끄럽게(?) 빠져나간다. 작가는 이를 명동이라는 장소특정성을 매개로 조망해본다. 화면에서 내가 선택한 지점들, 내 의식의 눈에 포착된 지점들을 진하게 표현하고, 내 의식이 간과한 부분들을 흐릿하게 표현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진한 부분과 흐릿한 부분, 밀도감이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이 만나지는 경계에는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왜곡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나는 언제나 전체를 볼 수가 없고 온전한 형태 그대로를 붙잡을 수가 없다. 나는 결코 리얼리티에 가닿지 못하고 현상 자체에 정박하지 못한다. 사회는 노이즈로 축조돼 있고, 어쩌면 나 자신이 노이즈일지도 모른다. 나는 선택의 도시(차라리 바다) 위에서 판단하지도 결단하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떠 밀려다니는 노이즈다(현대인의 질병 중 흥미로운 것으로서 판단불능증이 있다. 판단을 해야 할 때 판단하지 못하는 것. 판단은 곧 선택인 것.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 작정하지도 결단을 내리지도 못한다는 것).

작가는 투명 아크릴 판에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일정한 이미지를 프린트한 판 서너 장을 레이어로 중첩시킨다. 이처럼 레이어로 인해 흐릿해진 화면에 대해서는 또렷한 인식에 대한 반어법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을 것. 혹은 흔들리는, 부유하는 정체성의 표상으로 읽을 수 있을 것. 선택은 결국 실존의 문제인 것. 이로써 작가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의심하는 한편, 진정한 인식, 참인식의 문제를 건드린다. 보는 것은 곧 인식의 문제인 것.


금혜원의 . 재개발 내지는 재건축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푸른 비닐 천(일명 방수포 혹은 타폴린)으로 덮여있는, 친근하면서도 낯 설은 풍경을 소재로 한 일련의 사진작업들이다. 일종의 폐허의 랜드스케이프로 명명할 만한 이 작업들의 이면에는 도시 풍경으로 유형화할 만한 관심의 지점들이 읽히고, 그 자체로 사회적인 문제의식에도 맞닿아있다. 지정학적 장소와 잠정적인 장소성이 애매하게 혼재한다는 점에서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초장소) 개념에도 맞물린다. 특히 청색은 죽음을 상징하는 낭만주의의 상징색이며, 이로써 폐허가 된 문명의 죽음에 바치는 레퀴엠 같다.

문명의 쓰레기에 대한 관심은 이후 시리즈로 확대 재생산된다. 난지공원은 원래 쓰레기 산 위에 조성된 인공공원이며 인공자연이다. 작가는 그 공원 일대를 뒤덮고 있는 녹색 잔디를 주제화한 것. 전작에서의 재개발 내지는 재건축 현장을 가리는 타폴린과 근작에서의 쓰레기 산을 가리는 녹색 잔디의 의미기능이 상통한다. 여기서 작가는 도시 혹은 도시풍경에서 파사드가 갖는 의미기능을 추상해낸다. 그것의 의미기능은 말하자면 도시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들, 이를테면 그 몰골을, 실체를, 실패를 덮어서 가리고 포장하는 것이다. 파사드 뒤편이 의심스럽고, 그 외장이 요란할수록 더 의심스럽다.

쓰레기에 대한 관심의 시점은 또 다른 작업에서, 이번에는 도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도심 한 가운데 있는 쓰레기 처리장(하치장?)을 소재로 한 것. 대개는 멀쩡한 빌딩의 지하공간에 은폐된 듯 숨어있는 그 공간은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해당하며, 왠지 도심의 표면으로 나와지면 안 될 것 같은 도시의 그림자에 해당한다. 그 곳에서 뭔가 의심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곳은 말하자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도시의 생리를 위협하는, 도시를 불안하게 하는 암중모색의 유비적 표현 같은 장소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덧붙이자면, 쓰레기 처리장에 모인 폐 가구며 전자제품 등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폐품들을 사람들이 마치 일상공간에서 그렇게 하듯 그럴 듯하게 재배치하고 재배열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짐짓 사무실이나 응접실처럼 꾸며놓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경우에 따라선 일종의 사물초상화 개념을 착상할 수도 있을 듯. 여하튼 쓰레기처리장에마저 인테리어 개념을 적용하는, 무차별적이고 기계적인 삶의 습관과 생활의 관성이 발견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터널 속에서 지하철이 통과하는 모습을 촬영한 . 무서운 속도로 지하철이 통과해 지나가면서 마치 유성의 꼬리와도 같은 빛의 줄기 혹은 다발로 환원되면서 실제 공간을 추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는다. 속도는 경쟁사회의 최상의 미덕이다. 효율성의 법칙과 경제성의 법칙에 편승한 속도의 미덕은 현대인의 왜곡된 욕망을 실어 나르면서, 동시대적인 특수성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일종의 아이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욕망의 아이콘 같은. 문제는 그 욕망이 모든 실제를 지우면서 추상화시킨다는 것.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이 일련의 사진들에서 작가는 도시풍경에 내장된 잠정적인 폭력과 불안 같은 사회적 이슈를 짚어낸다. 겉보기에 멀쩡한 인공풍경에서 도시의 트라우마를 캐낸다.


최중원의 사진은 전작의 <스치던 풍경>과 근작의 <아파트> 시리즈 작업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스치던 풍경> 시리즈는 작가의 개인사와 관련이 깊은 만큼 서정적이고 정서적인 느낌이 강하게 어필되는 편이다. 마치 옛 흑백필름으로 찍은 영화에 디지털 기술로 새로이 색을 입혀 되살려낸 듯한, 과거의 한 시점을 현재의 시제 위로 되불러낸 듯한 고답적인 느낌으로 아련한 향수를 자아낸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주로 70, 80년대에 지어진, 그 자체가 한국근현대사의 시대적 아이콘으로 작용하는, 전통가옥구조에서처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 사이공간에 일종의 마당에 해당하는 중정 공간이 조성돼 있는, 현재는 대개 재건축을 기다리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들을 사진으로 담아낸다. 천편일률적인 외장을 보여주고 있는 현재의 아파트에 비해보면, 천변만화의 파사드를 보여주고 있는 그 때 그 시절의 아파트들이 재미있다. 아파트의 역사로 치자면 비교적 초기에 해당하는 그 시절 아파트는 실제로 유학파들의 형식실험장이었고, 전통과 신식의 생활방식이 접합된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인, 그리고 사회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작가의 사진은 이처럼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다큐멘터리와 아카이브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개인적으론 특히 사라져가는 것들이란 말에 방점을 찍고 싶다. 그것은 곧 전작에서의 스치던, 스쳐지나간 것들, 그래서 작가의 기억 속에 아련한 향수로 자리하고 있는 것들과 상통한 부분이 있고, 이로써 정서적 환기를 매개로 사진에 어떤 아우라를 덧입히는 계기로서 작동한다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유형학적 사진에 빈티지 사진이 탑재된 느낌 같은.


이보람은 이라크 전쟁 등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전쟁과 관련한, 특히 참사 이미지 정보들을 인터넷에서 캡처한다. 그리고 일종의 연상 작용에 힘입어 이 사진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는데, 여기서 일종의 탈맥락과 재맥락을 통한 유형화의 과정이 시도된다. 이를테면 숭고 이미지, 피에타(연민) 이미지, 수난 이미지 등등. 이 항목들은 한눈에도 그 자체 유형화된 성상 이미지를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종교와 관련해 일종의 전형으로 굳어진 유형화된 개념들을 차용하고, 이를 재차 참사 이미지에 그대로 적용하고 대입시킨 것. 종교적인 개념과 전쟁 이미지를 하나로 결부시키는데서 오는, 어쩌면 상호간 이질적일 수 있는 그 두 지점이 충돌하는 것에서 오는 아이러니가 흥미롭다. 무분별한 자료들에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분류와 항목을 부여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무분별한 질료들에 체계와 의미를 부여해 일종의 의미세계를 생성시키는 것, 더욱이 이렇게 생성된 의미세계를 기왕의 의미세계에 대질시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작업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여하튼 여기까지는 자료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렇게 채집되고 분류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경우로는 다른 그림들도 그렇지만 유독 <작업실의 희생자>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다(그림보다는 의미?). 작업실의 희생자? 참사 현장의 희생자? 참사 이미지를 목격하는데서 오는 작가 자신의 곤혹스러움? 희생자 이미지를 그저 이용할 뿐이라는 자의식에서 오는 죄책감? 이처럼 희생자란 말 속엔 여러 의미가 다중적으로, 다층적으로 포개져 있다. 특히 그 말속엔 작가 자신이 들어있다!

이처럼 작가는 그림 속에 자신을 집어넣고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이를테면 붓(그림을 그리는 화가), 손(그림을 그리는 손 혹은 희생자를 위로하는 손?), 인형(희생자의 대리물 혹은 또 다른 희생자로서의 작가 자신의 분신?), 그리고 눈과 같은. 특히 눈이 개입되는 방식이 흥미롭다. 작가는 그림 속에 눈을 그려 넣기 위해 일종의 이중그림 내지는 액자그림의 형식을 도입한다. 그림 속에 액자를 그려 넣고 그 액자 속에 눈을 그린 것. 그 눈은 실내 혹은 무대 위에서(작업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본다. 그 눈은 일종의 이중성 혹은 양면성으로 작용하는데, 이를테면 그 눈은 참사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시선일 수도 있고, 참사 이미지를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을 반영한 관음의 한 표현일 수도 있다. 이로써 시선(관음-주체)과 응시(관음-객체), 시선과 권력과의 관계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참사 이미지를 캡처한 것이지만, 정작 이보다는 성상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성상 이미지를 훼손하는데서 오는 불경에 대한 인식이 엿보인다(여기서 종교의 역사는 피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희생제의와 신성모독은 상식 이상으로 가깝다). 그러면서도 쿠션으로 변형된 희생자의 사체며, 참사현장의 살풍경을 담보하지 못하는 무대장치, 그리고 특히 큐티 감수성에나 어울릴 법한 흰색과 분홍색의 지배적인 색채감정이 흡사 일체의 의미가 소거된 텅 빈 껍질과도 같은 의외의 지점을 열어놓고 있다.

작가는 참사 이미지를 소독해 안전한 이미지(더 이상 죄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참사 이미지의 현장성을 소거해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혹 참사 이미지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대변하고 증언하고 싶었던 것일까. 수잔 손탁은 참사 이미지를 매일같이 접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의 시대에 참사 이미지는 사람들을 오히려 무감각하게 만들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미지의 맹점이며, 이미지에 과다하게 노출될 때의 맹점을 언급한 것. 그리고 그 언급은 아마도 작가의 작업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그 맹점을 건드리고 있다.
박미선은 일상적인 풍경의 일부를 지워 여백으로 처리한다. 이로써 현실적인 풍경을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무의식의 심층으로부터 길어낸 것 같은 의외의 풍경인 양 연출한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가 시도되고 있는 것. 이를테면 혜화동, 여의도, 봉천동 길 등 하나같이 실제의 장소를 모티브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비현실적인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데, 일상적인 풍경이 불현듯 다르게 보이는 순간을, 그 순간의 경험을 그린 것이다. 특정 장소에서 어떤 형상들이 지워지고 있는 것에서 일종의 생략과 여백의 느낌이 강조되고, 이를 통해서 향수와 기억의 문제를 건드리고, 호흡과 명상의 계기를 열어놓는다.


김미란의 작업은 유학시절 경험한 단절감과 고독이 그 계기가 되었다. 유학시절 작가는 어느 날 갑자기 혹은 마침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느낌(존재의 상실감)에, 내면적인 울렁증에 시달린다. 이 지극한 상실감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일까. 그리고 존재가 사라진다면 어디로 어떻게 사라지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존재를 사라지지 않게 붙잡을 수가 있는가. 도대체 존재 자체는? 그것이 표상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흐르는 물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나르시스 이후 물, 엄밀하게 수면은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 무의식적이고 존재론적인 거울로 알려져 왔다). 수면에 파문이 일면서 처음에 또렷했던 작가의 모습(반영상)이 자잘한 편린들로 조각난다. 그 모습 그대로 흡사 또렷했다가 분절됐다가 마침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존재(존재감)를 보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리고 절박해진다. 저것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편린들을 붙잡을 수 있다면 곧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의 조각들이나마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내고 찾아낸 것이 마블링이다. 수면에 일렁이는 파문을 떠낸 것이며, 그 파문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의 조각들을 떠낸 것이다. 수면은 흐르고 변화한다. 존재도 흐르고 변화한다. 수면은 결코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존재 역시 수면처럼 천변만화의 얼굴로서 다가온다. 같은 얼굴에서 파생된 수천수만의 얼굴들. 시간의 지층들. 그것은 결국 결이다. 수면의 결이며 존재의 결이다. 수면에 이는 파문을 떠낸다는 것은 결국 결을 떠낸다는 것이며, 결을 쌓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수면의 결을 떠내고 존재의 결을 떠낸다. 그리고 똑같은 결이 물결, 살결, 숨결을 파생한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렇게 떠낸 결의 편린들을 이용해 암모나이트 형상으로 재구성한다. 주지하다시피 암모나이트는 조개류의 원형이다. 조개는 골뱅이처럼 속을 파고든다(꼭 그렇게 생겼다). 원심적이기보다는 구심적인 운동의 생리를 표상하는 것. 그 운동의 생리가 내면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작가의 작업의 생리와도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