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out. 잘라낸다. 그리고 이로부터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편집한다는 의미가 파생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왜 잘라내는가. 이보람이 자신의 근작에 부친 이 주제는 탈맥락과 재맥락의 과정을 거쳐 실제가 이미지로 가공되고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그 주체는 매스미디어며 예술가다. 매스미디어와 예술가는 여러 면에서 그 속성이 닮았다. 현실로부터 이미지로 쓸 만한 부분을 발라낸다거나(이미지 채집사로서의 예술가), 아예 현실을 이미지로 가공해낸다(현실의 연출가로서의 예술가). 이를 통해서 현실 자체에 주목하도록 유도하거나,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이면을 보도록 유도한다지만, 그들의 유도는 흔히 무력하거나 공허한 메아리가 돼 공중에 흩어지기 쉽다. 최소한, 아니 오히려 현실로부터 생생함을 걷어내 현실을 박제화하고, 아무런 해가 없는 가치중립적이고 무미건조한 무성격의 이미지로 변질시킬 뿐이다.

여기서 유해한 현실과 무해한 이미지가 괴리된다. 현실이 이미지로 가공되는 한, 현실은 유해하면 유해할수록 좋다. 유해한 현실일수록 더 매력적인 이미지, 더 쾌락적인 이미지, 더 소비할 만한 이미지가 된다. 현실은 그대로 영화(스펙터클 소사이어티 곧 구경거리의 사회)가 되고, 유해한 현실은 매력적인 이미지를 위한 선결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그렇다 치고(이미지는 어차피 무해한 만큼이나 무력하니까.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공감이나 감정이입 또한 현실에 비해보면 얼마나 무기력한가) 유해한 현실은?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 현실에 내가 속해져 있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나로 하여금 오히려 쾌감을 더 증폭시키는가? 나는 또 다른 유형의 사디스트인가? 그렇다면 현실 속 그들(작가의 논법으로 치자면 희생자들)은 마조히스트들인가? 죽음마저 마다하지 않는 마조히스트? 내가 사디스트인 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이미지에 관한한 문명인, 특히 시각 예술가는 일정정도 관음증자며 사디스트가 아닐까. 시각예술의 정의는 이미지에 대한 탐구와 탐색과 탐욕으로부터 찾아지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결코 마조히스트들이 아니다. 나는 즐기지만, 그들은 결코 즐기지 않는다. 나의 이미지는 그들의 현실로부터, 그들의 겪음은 나의 즐김으로부터 소외된다. 그 소외, 그 무관함으로 해서 나는 오히려 더 잘 즐길 수가 있게 된다.

여기서 다시 현실로부터 이미지가 들뜬다. 이미지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이미지와 현실은 서로 통할 수도 맞잡을 수도 없는 상호간 금단의 영역이며 다른 세계에 속해져 있다. 여기서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사실은 나는 결코 현실에 속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현실로부터 제외돼 있고 지워져 있다. 현실로 인해 피눈물을 흘릴 때조차 나의 피눈물은 거짓 피눈물일 수밖에 없다. 내가 흘리는 피눈물이 이미지의 세계(허구의 세계)를 넘어 현실이 속해져 있는 리얼한 세계로 건너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마찬가지지만 그들 속에서) 울 때조차 그 울음은 그들에게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여전히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에게 나는 소통불능의 이방인이며 외계인일 뿐. 그 뿐(소통한다는 것은 그저 의미와 정보가 교환되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보람이 그린 그림 속 희생자들이 흘리는 피눈물 위로 이처럼 매스미디어가, 예술가가 흘리는 거짓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는데, 피눈물과 거짓 피눈물의 거리를 건드리고, 현실과 이미지의 소외를 건드린다. 그 이면에는 현실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의식과 함께 예술의 한계에 대한 자의식이 함축돼 있다. Cut-out이란 주제는 무엇보다도 현실로부터 이미지가 될 만한 부분을 도려낸다는 의미며, 이 의미는 현실을 가공하고 각색한다는 의미와 통하며, 이미지를 매개 혹은 도구로 해서는 결코 현실 그대로를 재현할 수 없다는 의미와 통하며, 그래서 이미지와 현실은 다르다는 자명한 문제의식과 통한다.




작가는 이라크 전쟁 등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전쟁과 관련한, 특히 참사 이미지 정보들을 인터넷에서 캡처한다(인터넷의 소스는 리얼한 세계에서 왔지만, 그 리얼한 세계를 원천으로 한 인터넷 자체는 또 다른 가상세계라는 아이러니한 현실인식과 동시대 예술가의 자의식은 상통한 부분이 있다. 그는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가상현실을 살고, 그 세계를 서핑하고 캡처하고 맵핑하는 과정 속에서 예술가적 자의식을 길어낸다).

그리고 일종의 연상 작용에 힘입어 이 사진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는데, 여기서 일종의 탈맥락과 재맥락을 통한 유형화의 과정이 꾀해진다. 이를테면 숭고 이미지, 피에타(연민) 이미지, 수난 이미지 등등. 이 항목들은 한눈에도 그 자체 유형화된 성상 이미지를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종교와 관련해 일종의 전형으로 굳어진 유형화된 개념들을 차용하고, 이를 재차 참사 이미지에 그대로 적용하고 대입시킨 것. 종교적인 개념과 참사 이미지를 하나로 결부시키는데서 오는, 어쩌면 상호간 이질적일 수 있는 두 지점이 충돌하는 것에서 오는 아이러니가 흥미롭다. 그런가하면 무분별한 자료들에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분류와 항목을 부여하는 과정 자체도 관심을 끈다. 무분별한 질료들에 체계를 부여해 새로운 의미세계(종교적인 개념과 참사 이미지가 급격하게 결합된 것에서 오는)를 생성시키는 것, 더욱이 이렇게 생성된 새로운 의미세계를 기왕의 의미세계(종교적인 문법으로 굳어진 의미세계와 전쟁과 테러로부터 파생된 의미세계로 엄격하게 구분된)에 대질시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별도의 작업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이미지와 의미의 관계와 관련한. 이미지는 어떻게 의미가 되고, 의미 또한 어떻게 이미지가 되는지와 관련한. 이미지와 의미가 서로를 위해 어떻게 공모하는지(조작을 분유하는지)와 관련한. 말하자면 이미지의 정치학과 관련한.

작가는 이렇게 채집되고 분류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다른 그림들도 그렇지만 특히 관심을 끄는 경우로는 <작업실의 희생자>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다(그림보다는 의미?). 작업실의 희생자? 참사 현장의 희생자? 참사 이미지를 목격하는데서 오는 작가 자신의 곤혹스러움? 희생자 이미지를 그저 이용할 뿐이라는 자의식에서 오는 죄책감? 작업실 따로 희생자 따로 일 때는 생겨나지 않던 의미가 이처럼 두 단어(상황?)가 결합되면서 파생된다. 희생자란 말 속엔 말하자면 여러 의미가 다중적으로, 다층적으로 포개져 있는 것. 더욱이 그 말속엔 작가의 자의식마저 들어있다!

이처럼 작가는 그림 속에 자신을 집어넣고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이를테면 붓(그림을 그리는 화가?), 손(그림을 그리는 손 혹은 희생자를 위로하는 손?), 인형(희생자의 대리물 혹은 또 다른 희생자로서의 작가 자신의 분신?), 그리고 눈과 같은. 특히 눈이 개입되는 방식이 흥미롭다. 작가는 그림 속에 눈을 그려 넣기 위해 일종의 이중그림 내지는 액자그림의 형식을 도입한다. 그림 속에 액자를 그려 넣고 그 액자 속에 눈을 그린 것. 그 눈은 실내 혹은 무대 위에서(작업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본다. 그 눈은 일종의 이중성 혹은 양면성으로 작용하는데, 이를테면 그 눈은 참사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시선일 수도 있고, 참사 이미지를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을 반영한 관음의 한 표현일 수도 있다. 이로써 시선(관음-주체)과 응시(관음-객체), 시선과 권력과의 관계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참사 이미지를 원천으로 한 것이지만, 정작 이보다는 성상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성상 이미지를 훼손하는데서 오는 불경에 대한 인식이 엿보인다(여기서 종교의 역사는 피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희생제의와 신성모독 즉 신의 뜻에 반하면서 숭배하는 배덕의 역사는 생각 이상으로 가깝다). 그러면서도 쿠션으로 변형된 희생자의 사체(파편화된 살덩어리)며, 참사현장의 살풍경을 담보하지 못할 것 같은 표백된 느낌의 무미건조한 무대장치, 그리고 특히 큐티 감수성에나 어울릴 법한 흰색과 분홍색의 환상적인 조합이 자아내는 핑크빛 무드가 흡사 일체의 의미가 소거된 텅 빈 껍질과도 같은 의외의 지점을 열어놓고 있다.

작가는 참사 이미지를 소독해 안전한 이미지(더 이상 곤혹스럽지도, 죄의식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참사 이미지의 현장성을 소거해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혹 참사 이미지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대변하고 증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수잔 손탁은 참사 이미지를 매일같이 접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의 시대에 참사 이미지는 사람들을 오히려 무감각하게 만들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미지의 맹점이며, 이미지에 과다하게 노출될 때의 맹점을 언급한 것. 그리고 그 언급은 아마도 작가의 작업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 맹점을 건드리고 있는 것.




작가는 일련의 캡처한 사진들에서 그림의 소재로 사용한 부분을 하얀 공백으로 지워낸다. 바로 Cut-out이라는 주제를 직접 지시하는 작업이며 대목이다. 예컨대 죽은 어린아이를 껴안고 울고 있는 아버지(혹은 삼촌?)를 찍은 사진에서 희생자에 해당하는 어린아이 부분을 지운 것. 이렇게 특정 부분이, 그것도 결정적인 부분이 공백으로 남겨지면서 그림은, 그림의 상황은, 그림의 의미는 졸지에 오리무중에 빠진다. 그 남자가 왜 우는지, 그 표정이 우는 것이 맞는지, 도대체 지워진 부분이 얼마만큼이나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작가는 맥락의 문제를 건드린다. 의미란 항상 어떤 특정의 맥락으로부터 생성되고 파생된다. 그 맥락이 소거되거나 조작되거나 변형될 때 의미도 덩달아 소거되거나 조작되거나 변형된다. 작가는 매스미디어가 (더러는 매체 고유의 소명의식과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현실이라는 맥락으로부터 의미를 소거하거나 조작하거나 변형한다고 보고, 덩달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본다(똑같은 이라크 사태를 보는 알자지라와 CNN의 눈은 얼마나 다른가. 용산참사를 보는 경찰가족과 철거민 가족의 눈은 또한 얼마나 다른가). 사진에서 지워진 공백은 마치 내가 현실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지가 않거니와, 현실이라는 맥락으로부터 생성되고 파생되는 의미에 대해서도 나 자신 소외될 수밖에 없음을 은유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림들을 벽에 걸어 세우는 대신 전시장 바닥에다 평면으로 뉘어 설치했다. 희생자를 애도하는 무대 혹은 제단을 암시한 것인데, 이는 실제로 희생자를 애도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애도의 이름으로 희생자의 이미지(혹은 현실)를 소비하는 속 편한(?) 관행(관성)을 좀 더 극적으로 보이게끔 연출한 것이다(어떻게 저런 일이! 그리고 나는 저런 일로부터 동떨어져 있음에 안심하는. 더욱이 알량한 분노를 매개로 세계의 정의에 동참하고 있다는 이 자만심! 도덕적으로 숭고해졌다는 이 느낌! 뿌리칠 수 없는 이 유혹!). 이와 함께 작가는 중세 회화에서나 볼 법한 아이콘, 이를테면 긴 리본에 텍스트를 기입해 장식하는 관행을 도입한다. 그리고 그 표면에 자의적인 텍스트를 적어 넣는다. 그 내용은 그림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고, 오히려 그림읽기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하거나 한다.

다시, Cut-out. 잘라낸다는 의미의 이 주제는 실제를 가공해 자기화하는 과정을, 실제를 일종의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최소한 중성적인 정체불명의 것으로, 익명의 것으로 변형시키고 변질시키는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과정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대로 작가의 작업이 얹혀 있는 근간 혹은 핵심을 암시한다.

그림 아래쪽에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는 실탄 같고 탄피 같은, 혹은 탄약고 속에 가지런하게 정렬된 것 같은 잘려진 손가락들. 피처럼 선연한 붉은 물감이 발려져 있는 공격적인 포스의 붓들. 참수된 희생자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는 무표정한 인형 머리들. 마치 하얀 석고상처럼 창백한 중화된, 표백된 느낌의 희생자들. 그리고 희생자들의 사체 위로 흘러내리는, 실제라기보다는 인위적인 느낌의 피. 도대체 작가는 무엇을 왜 중화시키고 표백시키는가. 그리고 이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는가. 작가가 들려주는 말 속엔 실제가 주는 살아있는 지표, 이를테면 두려움과 도발, 충격과 분노와 같은 생생함의 지표를 생경함의 지표로, 중성적인 지표로, 무해하면서도 말랑말랑한 지표로, 소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지표로 바꿔놓는 동시대의 경박함을 증언한다는, 역설적으로 꽤나 심각하고 진지한 논평이 탑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