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시에서 벽은 어디선가 완성된 작품을 담아내는 중성적인 용기(container)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작품이 된다. 환영을 연출하는 가상의 무대인 화이트 큐브는 관객을 보이지 않는 제4의 벽 뒤 객석에 앉혀 놓지만, 벽 그자체가 주인공이 된 이 전시는 관객을 장치 내부로 끌어들인다. 대상의 객관적 관찰을 위한 이상적인 지점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내부로 들어가서 겪는 경험 과정이 중요시된다.
관객은 눈 만 아니라 몸 전체로 벽들을 통과해 나간다. 중심과 주변의 구별이 확실한 원근법적 공간에서 막연한 표면의 운동을 야기하는 연극성(theatricality)으로의 변모에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시간이다. 이 전시의 많은 작품들이 공간을 분리하고 차단하기 보다는 시간의 추이 그 자체를 작품의 내재적 요소로 끌어들인다. 어떠한 순간에 보았는지에 따라서 작품의 양상은 달라진다. 역으로 작품의 변화 그자체가 새로운 시간성을 창출한다. 음악 미학자 빅토르 주어칸들이 [소리와 상징]에서 지적하듯이, 시간은 경험의 질서와 형식이다. 그에 의하면 고전 과학의 시대에서 시간은 전적으로 공간적으로 고찰되어왔다. 데카르트에게는 공간이야말로 물리적 세계에 있어 최고의 실재로 간주되었다.
반면 현대에서 시간은 모든 존재의 근거로서 인식되며, 무생물조차 그 핵심에 있어서는 진동, 즉 시간적 현상의 존재로 간주된다.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예술 또한 공간보다는 시간을 중시한다. 현대적 시간성은 물리적 시간이기 보다는 생물학적 시간에 가깝다. 주어칸들은 한 생리학자의 말을 빌어서 이러한 시간이 유기체가 살아가는 시간, 기억하고 상처가 아무는 시간이라고 풀이한다. 공간을 탐색하는 시간적 추이에 방점이 찍혀지는 이 작품들은 해부학이라기보다는 생리학에 더 가까우며, 변화하는 시간에 열려 있다는 점에서 막(membrane)과 비슷해진다.
전자기술이 적극 도입되는 작품에서는 벽은 망(net)이 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벽은 장(場)이며 미디어인 것이다. 막을 이루고 그 사이를 통과하는 것은 원소이다. 물질이 극소의 차원으로 분해되면 비물질의 양상을 띄는데, 이 전시의 많은 작품들이 이러한 비물질적 요소들--기체(박기원), 소리(김승영과 오윤석), 숨(박기진과 임승천), 그림자(이승애), 인터페이스(지하루와 그라함 웨이크필드)--을 강조한다. 단순한 아이디어의 제시가 아니라, 구체적 물질화에 성공한 이 전시의 작품들은 견고한 형식을 갖출 때조차 생성과 유동, 지속의 느낌을 보유한다. ‘물질적 상상력’은 ‘원소적 상상력으로’(바슐라르)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다.
제 1 전시장에 설치된 박기원의 작품은 각이 진 모양으로 재단된 투명 비닐에 공기를 채워서 마치 각얼음이 가득 쟁여져 있는 듯한 모습이다. 각얼음은 봄기운이 완연한 야외의 풍광을 투사하면서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을 떠오르게 한다. 바깥의 아지랑이들은 각얼음의 수위를 점차 낮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고체에서 액화되거나 기체로 승화될 수 있는 얼음이라는 비유적 오브제는 그 자체가 시간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여기와 저기를 잇고, 그 시간과 이 시간을 연결시킨다. 장소 특정적인 작품을 해왔던 박기원의의 작품은 장소와 완전히 밀착되는 작품이 가지는 완전한 개방성이라는 역설이 있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덩어리라기보다는 표면이었는데, 뭉치면 얼마 안 될 것 같은 재료들은 최대한 자신을 펼치면서 공간을 변모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지느러미, 또는 날개 같은 속성을 가진다.

날렵함과 가벼움은 모든 것을 대지에 정초시키려는 중력을 거부한다. 가볍고 투명한 재료에 담긴 기체라는 작품의 물리적 속성은 3차원 공간을 점유하는 조각적 양괴를 거부한다. 자연을 이루는 물질을 통해 상상하는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공기와 꿈]에서 말하듯이, 맑은 공기로 이루어진 ‘공기적 삶’을 연상시킨다.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에 의하면 공기적 삶은 자유이다. 그것은 무색 무미 무취에 가까우며 절대적인 무(無)로부터 실려온다. 바슐라르는 그러한 미학을 실현했던 이로 니이체를 지목하며, 니이체는 공기 속에서 긴장성만을, 즉 추위와 무(無)만을 꿈꾼다고 말한다. 고지의 맑은 공기는 중력에 얽매인 모든 무거운 것들을 망각의 뒤편에 던져두고 자유로운 순간의 의식으로 비상한다.
제2 전시장은 소리의 벽을 통과하게 한다. 사운드 아티스트인 오윤석과 조각가 김승영은 공동작업을 통해 붉은 벽돌로 쌓은 낡은 담장 길 사이로 심장박동 소리나 바람소리를 들려준다. 하나의 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공명하는 또 다른 소리는, 마치 세찬 바람과 그것을 뚫고 전진하는 이의 몸 내부로부터의 박동을 교차시키는 듯하다.
몸의 안과 밖은 음을 통해 연속성을 가지게 된다. 통상적으로 벽은 바깥의 소음이나 기온 변화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차단막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의 작품에서는 벽자체가 바깥과의 통로가 된다. 소리는 막힌 벽에 뚫린 일종의 창이 되어 저편의 세계를 다가오게 한다. 바깥에는 나와 닮은 살아있는 존재가 있음을 예시한다. 통로를 통해 소리 속을 통과하는 경험은 시간성을 매개로 한다. 시간이 사라지면 모든 운동 역시 사라질 것이고, 음의 운동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빅토르 주어칸들은 [소리와 상징]에서 어떤 눈도 아직 시간을 본적이 없으며 어떤 손도 아직 시간을 만져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귀는 시간을 들어왔다. 진정한 시간의 이미지는 귀를 위한 이미지, 청각적인 이미지, 음들로 만들어진 이미지이어야만 한다. 사운드 장비와 스피커로 조율된 음의 운동은 사물과 그들의 공간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주어칸들은 우리의 감각 경험 중에서 유일하게도 음은 전적으로 살아있는 생(生)에 속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빛과 색채, 소리, 냄새, 맛, 단단함, 유동성, 거칠고 부드러운 것, 뜨겁고 찬 것, 이들 모두가 무생물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음은 오로지 살아있는 것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그들이 처해있는 물리적 세계에 음을 첨가한다. 이는 삶이 무생물세계에 주는 선물인 것이다.
박기진과 임승천은 숨쉬는 벽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벽 자체가 숨 쉬듯이 움직인다. 이들의 작품 역시 시간성이 강조된다. 특히 박자와 리듬을 통해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거친 기계음을 내는 숨소리는 유기물과 무기물의 공통적 속성인 기계(machine)가 두드러진다. 맞은 편 벽에는 거친 호흡과 대조되는 부드러운 숨을 조명의 변화를 통해 연출했다. 벽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일련의 박자를 만들어내고, 역동적 장에서의 운동은 리듬을 만들어낸다.
빅토르 주어칸들은 리듬이야말로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 중의 하나로서 나타난다고 말다. 그는 박자와 리듬을 구별한다. 박자를 세는 것은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운동에 따라서 시간 간격을 균등하게 표시하는 것이며, 일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균등한 부분들로 나누는 것이다. 리듬은 규칙적인 박자를 거부한다. 그것은 공감적 진동, 즉 박동이며 우리 속에서 만들어진다. 박자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지만, 리듬은 유사한 것이 돌아오는 것이다. 박자란 경계선을 긋고 중지시키며 분리시킨다.

박자는 분류하고 분석하는 이성의 상징이지만, 리듬은 삶의 창조적이며 통일적인 힘의 상징이 된다. 공간을 출렁거리게 하는 박기진과 임승천의 작품은 기계적으로 정해진 분할인 박자 위에 리듬을 배치한다. 숨 쉬는 벽은 곧장 우리의 숨쉬기라는 무의식적 행위를 의식화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기와 꿈]에서 인도에서는 호흡을 정신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여긴다고 지적한다.
우주의 정기 프라나를 취하는 호흡은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진정한 의식이다. 세계에 있어서는 바람이, 인간에 있어서는 호흡이 사물들의 무한한 확대를 드러낸다. 박기진과 임승천의 작품은 우리 온 존재를 침묵시키고 오로지 호흡만을 들어보게 한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가슴 가득 들여 마셔지는 것, 그것은 익명의 공기가 아니라 삶이라는 단어이며, 우주를 향해 천천히 되돌려 내놓는 것, 그것은 영혼이라는 단어이다. 이 맥락에서 박기진과 임승천이 만들어내는 벽의 호흡은 우주적 삶의 한 작용에 대한 비유이다.
이승애는 하얀 천 뒤로 평소에 틈틈이 수집해 놓은 갖가지 피규어를 움직이게 해서 괴물들이 퍼레이드를 하는 것같은 그림자 연극을 보여 준다. 그녀의 작품은 입구로 들어가는 천을 완전히 가려 바깥의 빛이 차단되어야 효과가 있는데, 그것은 벽면에 동굴 밖 실체의 그림자들이 투영된다는 플라톤의 동굴의 신화를 떠오르게 한다. 이승애의 작품에서 빛과 어둠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존재들을 명멸하게 한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에서 플리니우스를 인용하면서 최초의 회화적 이미지가 인간 몸에 대한 직접적 관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몸의 그림자를 잡아낸 재현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은 재현(그림자 이미지)에 대한 재현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회화는 복사물에 대한 복사물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플라톤적 전통에서 이미지는 이데아라는 동일자의 복제에 불과했지만, 플리니우스의 전통 속에서 이미지(그림자, 그림, 조각상)는 동일한 것의 타자이다.
플라톤적인 미메시스와 플리니우스적인 시뮬라크라(simulacra)는 둘 다 마술에서 기원했다. 첫째의 경우는 거울에 기초한 대체의 마술이었고, 둘째 경우에는 그림자에 기초한 닮음의 마술이다. 거울이 자아를 확인한다면, 그림자는 타자를 확인한다. 그림자는 다른 단계를 재현하는 반면, 거울은 동일한 단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림자의 짧은 역사]에 의하면 시각 영역에서는 이처럼 두 이미지의 근본원리가 광학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구별법에 의하면, 거울의 정면이 아니라, 그림자의 실루엣으로 가늠할 수 있는 이승애의 작품 속 이미지의 양태는 동일자가 아닌 타자이다. 회화를 비롯한 그녀의 모든 작품에 출몰하는 괴물들은 바로 그 타자인 것이다. 관객을 3면으로 에워싼 암막천 뒤로 움직이는 형상들은 그림자와 영화적 이미지 사이의 유사성도 드러낸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모든 환영이 사라지듯이, 이승애의 작품에서 괴물들은 강력하면서도 덧없는 존재이다.
지하루와 그라함 웨이크필드는 부드럽게 휘어진 인터페이스를 실제의 벽 사이에 세운다. 그들의 벽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들이 혼합되는 망이다. 이 공간에 들어선 관객, 즉 3차원 상의 인체는 디지털 형식의 섬세한 조율을 거쳐 사이버 공간 속의 인공 생태계에 참여할 수 있다. 그것은 가상환경을 실체로 느끼게 하는 몰입의 체험을 자아낸다. 가상의 벽과 실제의 벽 사이에서 움직이는 관객은 디지털 정보로 변환된 자신의 물적 실체를 관망하면서 동시에 몰입하는 이중의 시간을 산다.
생체전자적(bioelectronic) 환경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된 이들의 작품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단지 기계를 넘어서 에코시스템이 된다. 이 인공생태계에서 미확인 생물체들이 태어나 자라고 소멸한다. 작은 인터페이스를 주시하게 하는 경우, 가상 세계에 참여하기 위해 눈에만 의존함으로서 르네상스 이래의 재현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힘든 면이 있었지만, 규모의 확대는 몸 전체를 움직이게 한다.
관객 역시 이 끝없는 흐름 속에 유동하는 한 원소가 된다. 건축적 차원으로 확대된 환경으로 인해 가상현실은 새로운 현실이 되며, 그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 상호작용은 더욱 자연스러워 진다. 기술의 진보는 상징적 추상을 요구하는 작업에서 경험에 직접 호소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기술적 진보는 결국 상호작용형 가상현실 극장을 만드는 것으로 향한다. 매순간 다르게 변화하는 인공생태계는 탐험의 세계가 되며 현실 저쪽에 남겨 놓고 온 몸의 반쪽을 생각하게 한다.
미디어 이론가인 마크 포스터는 [뉴 미디어의 철학]에서 정보적 시뮬레이션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의 단계에서 자아는 끊임없는 불안정 속에서 탈중심화 되고 분산되면서 여럿으로 불어난다고 지적한다. 지하루와 그라함 웨이크필드의 작품은 더욱 직관적인 방식으로 진화해가는 전자단계에서 의미가 소통되고 주체가 구성되는 방식의 극적 변화를 알려준다.
출전 | 소마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