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전에 있었던 예술, 그리고 예술 이후에 있을 예술


외부로 개방되는 전시공간으로, 그자체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대구 미술관에 전시되는 리차드 롱(Richard Long)의 작품들은 전시장 안과 밖 사이에 설정된 긴장과 모순을 완화시킨다. 리차드 롱의 작품으로 대변되는 대지미술은 전시장이라는 인위적이고 제도적인 틀을 벗어나는 모험을 통하여 현대 미술사에 등재된 양식이기에, 이러한 조화는 역설적이다.

대형 설치 작품 외에 사진과 드로잉이 포함된 이번 전시는 철저히 작가가 경험했던 장소에 대한 독특한 감응을 통하여 생산되어진 산물이다. 지름이 5미터, 6미터가 넘는 거대한 돌의 무리는 그것을 둥글게 배치한 작가의 직관적 선택 외에 어떠한 인위적 가공도 가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개념적 아이디어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과의 교감의 증거이며, 그자체로도 완결된 미학적 가치가 있다. 작품 주제에 따라 둥근 돌, 모난 돌 등이 동원되며, 바닥에 설치된 돌 원 맞은편에 걸린 그림은 작가가 조우한 각 지역의 자연과 문화가 압축되어 표현된다.

둥근 돌들이 배치된 작품 [Han River Circle]에는 힘차게 흘러내리는 물의 흐름이 형상화되어 있으며, 고궁의 건축적 요소가 되었을 법한 돌 더미가 있는 작품 [Kyungbok Circle]에는 미로같이 생긴 문양이 앞에 걸려 있다. 세계 각지에서 만난 돌은 형태나 색상, 크기 면에서 여러 종류가 있지만, 전시공간에 들어올 때는 거의 둥글게 배열되어 있다. 도넛 모양으로 안을 비우기도 하는데, 그 역시 원의 변주라 할 것이다. 자연에서 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거대한 스케일을 통해, 이름 모를 고대의 돌 기념비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선사시대의 유적지나 그 흔적을 떠오르게 하는 리차드 롱의 작품은 예술 이전에 있었던 예술로 소급된다. 이러한 지평은 예술 이후에 존재할 예술로도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눈 덮인 고원지대 기슭에 보일 듯 말듯 둥글게 배열된 돌이 있는 [Deer Circle]처럼 사진으로만 접할 수 있는 작품에서, 기록 외에는 달리 표현될 수 없는 자연의 숭고함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자연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소유된다. 이점은 그의 작품이 동양적인 세계관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현대문명에 대한 문화적 반발이 드세었던 격동기인 1960대에 20대 청년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리차드 롱은 수 십 년 동안 지속된 자연과의 만남과 그 흔적을 제시하는 시적인 방식으로, 영국을 넘어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 십 년 후에 고국은 그에게 터너 상의 영광을 수여한다. 전시 공간 속에 둥글게 배치되곤 하는 돌은 자연의 영구적인 요소이면서도 이동가능하다는 이점 때문에,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인류의 문화와 함께 상징성으로 대지예술의 조형적인 수단이 되기에 적절하다.

인위적 가공이 거의 안 된 돌은 대지의 깊은 곳과 표면을 구성하는 자연의 요소이다. 그것은 마치 레고처럼, 지각하는 물체들 사이의 차이를 구성 원소들의 형태와 배열, 그리고 위치의 차이로 만들어낸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같은 고대의 원자론자들은 전 우주가 일종의 거대한 레고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존재가 하나인 동시에 산재해 있다고 가르쳤다. 여기에서 탄생은 결합이요, 죽음은 해체이다.




둥글게 배열된 형식은 순환, 즉 모든 존재들이 흙과 먼지로 되돌아가고, 또 그 잔해 속에서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장 살렘은 우주, 물질, 텅 빈 공간의 무한성을 말하며, 이 무한한 우주 내에서 온갖 종류의 결합과 배치 덕분에 원자들은 바로 이 세계를 조성한다고 본다. 원자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에 맞게 정렬되는 것은 결정된 계획이나 섭리 때문이 아니다.

도보여행을 통해 우연히 만난 자연의 요소들은 작가에 의해 또 다른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친다. 리차드 롱의 작품에서 돌이 고대 원자론자들의 입장과 중첩되는 부분은 놀이적 요소 외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철학으로 자연을 이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평온함과 안정감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공통성에 있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돌은 실내에 놓여 지든 대자연에 놓여 지든 돌을 둘러싸는 네가티브 공간, 즉 거대한 허공을 감지하게 한다.

우주의 원자에 해당되는 돌과 그것이 자유롭게 배치될 수 있는 빈 공간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극적 방식이 두드러지는 점은 그의 작품이 현대미술이면서 고대의 철학과 조응하는 부분이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과 대면한 고대 원자론자들이 느꼈을 쾌와 자유로움의 원천이 내재해 있다. 실체가 불분명한 현대문명의 욕망을 벗어나서, 보다 근본적인 생의 에너지를 만나기 위한 여정은 새로운 형식을 찾는 현대미술가의 고군분투라기보다는 현자의 자족감과 더 가깝다.

떠들썩한 선언문으로 시작하곤 하는 현대미술가에 비해, 자연이든 어디든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며, 은둔자적 면모를 띄는 대지미술이 현실도피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현대와의 간극을 통해 더욱 현대적일 수 있는 일종의 문화 비평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연에 최소한의 개입만을 추구하는 리차드 롱의 작품과 생태학적 감수성과의 관련성은 많이 지적되어 왔다. 인간이 자연 속에 살아가는 한 생태의 문제는 오래되면서도 미래적인 것이다.

작가가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기 위해 탔을 비행기, 화구 대신에 들고 다녔을 사진기 외에 작품 제작에 소요되는 인공적 수단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대지미술이 비록 특정한 미술사조로 자리 매김 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처음에도 그리고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하나의 예술적 양식이기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에 가깝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치경제학적이든, 예술사적이든 확립된 진보에 대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진보가 잘못된 점은 그것이 생태학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보다 많은 에너지와 자본이 집중되어 이루어지는 발전 모델이 주변부는 물론이고 중심조차도 끝없는 분리를 낳았다. 분리의 시작은 무엇보다도 대지로부터 분리이다. 자신의 주변으로부터 시작하는 소박한 자생적 리얼리즘은 사라지고, 예술의 규범화와 억지로 공유된 규범을 바탕으로 한 희귀성의 조작이 야기되었으며, 그것은 끝없는 물신숭배를 낳았다. 예술작품 역시 더 큰 물량공세와 충격요법으로 점철되곤 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풍요와 다양성을 낳기보다 끝없는 결핍과 경쟁만을 유발한다. 현대 미술 일단에서 횡행하는 자극을 위한 자극은 생산을 위한 생산, 소비를 위한 소비에 상응하며, 멀게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김빠진 반복이다. 대지미술은 현대인의 안팎을 둘러싼 인위적 코드의 적대성을 인식하고 자연에 밀착한 삶의 근본성에 대한 성찰을 추구한다. 많은 이들이 직접 밟아보지는 못했을 자연 구석구석을 탐사하는 작가의 여정은 세상의 지배적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그러나 리차드 롱의 작품을 지나간 낭만주의나 자연회귀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천천히 행해진 우회를 거쳐 미래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가 홀로 걸었던 오솔길은, 모든 이들이 하나의 길만 가려하기에 교통체증을 낳는 고속도로와 성격이 다르다. 대지미술의 생태학적 비전은 동질성에의 함몰이 아니라 차이의 감식에 있으며, 이는 세계화에 반대하여 토착 문화를 중시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의 비전과 공유되는 부분이다. [오래된 미래]는 우리가 비록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할지라도, 올바른 미래를 찾는 노력은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포함하는 자연과의 더 큰 조화를 이루는 어떤 근본적인 패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것은 실상 수천 년 동안 존재해왔던 가치, 즉 자연 질서 속에서 우리의 위치, 서로서로의, 그리고 우리와 지구 사이의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알아보게 하는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자연에 기초를 둔 사회가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더 지속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과 주위 환경과의 대화의 결과였다. 그것은 자연을 위해서도 인간을 위해서도 성공적이었다. 저자가 예를 든 라다크 사람들은 그들의 다리로 버티고 서서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할 줄을 알았다.

그것이 현대인도 동의해야할 그들만의 생태학이었다. 제한된 자연을 조심스럽게 쓰고, 작은 것에서 더 많이 얻어내야 하는 것은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재순환시킴으로서 가능하다. 리차드 롱의 작품에서 원이 상징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것은 최소의 것으로 최대의 것을 표현한다. 그가 지구 구석구석을 캔버스 삼아 그린 작품들은 매우 정적(cool)으로 보이지만,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는 자연을 상징한다. 그것은 서구의 ‘과열된(hot)’(레비 스트로스) 동적 문화와 대조된다.

물론 예술은 자연이 아니다. 예술은 일종의 언어로서 고도로 인공적이다. 역사적으로 예술은 발전된 생산력을 통해 자연을 대규모로 착취하기 시작한 근대에 비로소 제도화 되었고, 제도를 통해 자율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자연으로부터 끈 떨어진 자율화가 얼마나 더 큰 자유를 낳았는지는 의심해볼 만하다. 특히 진보에 근거한 근대적 가치들이 의문에 붙여진 시기에 와서는 더욱 그렇다. 근대의 진보를 이끈 주도적 분야는 단일한 코드에 근거한 과학기술이다. 그것은 자연을 문명과 대조하며, 자연을 도구화시킨다.

그것이 원시적 삶에도 논리가 있으며, 현대적 삶에도 야만이 있다. 리차드 롱의 작품에서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순환적 배열은 시작과 끝이 분명한 진보적 비전과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은 근본주의적이지만, 하나의 목적을 강요하는 기원의 신화가 부재하다. 종교라는 말의 어원에 내포되어 있듯, 분리된 것을 연결하는 그의 작품은 종교적이지만, 특정한 종교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원은 동서고금의 문화에 나타나는 보편적 상징으로 공유된다.

원은 다양한 돌을 한데 아우르는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조형적 구조를 관객이 지각하는 질서로 간주한다. 그는 [예술과 엔트로피]에서 주어진 체계라는 조건하에서 획득 가능한 최대의 질서 상태를 지향하는 우주적 원리가 있다고 본다. 질서가 역시 좋은 기능의 충분조건이고, 또한 이 같은 이유에서 유기적 자연과 인간은 질서를 원한다. 리차드 롱의 작품에서 자연을 이루는 근본 원소처럼 보이는 돌은 가장 단순한 형식인 원으로 배열된다. 원은 단순하면서도 무한하다.

리차드 롱의 작품은 지각심리학적 분류에 따르면, 중심 집중적인 체계(centric system)를 이룬다. 여기에는 힘들이 산출되고 수렴되는 중심이 있지만, 이 중심은 변화의 기점으로 작용할 뿐, 기하학적 평형 상태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중심과 주변의 관계는 울퉁불퉁한 자연석이라는 소재와 사진이 아니면 한눈에 다 들어올 수 없는 규모를 통해 불투명한 것으로 다가온다. 관객은 외곽으로부터 떠돌면서 보이지 않는 중심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의 광대한 공간은 결코 한눈에 장악되지 않으며, 시간을 통해서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그가 숱한 자연을 스쳐지나갔을 여정은 관객에게 되풀이하여 요구된다. 현상학은 시간성(temporality)으로서의 주체를 강조하며, 그 자신이 항상 세계 속에 놓여있음을 발견한다. 이때 관념적인 시각이 아닌, 몸 전체의 체험은 결정적이다.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자연을 감각한다는 것은 ‘수동적인 기록행위’도 아니고, ‘능동적인 의미부여’도 아니다. 무엇을 감각한다는 것은 그것과 ‘공존하는 혹은 교류하는 것이며, 다시 말해 그것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메를로 퐁티)이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리차드 롱의 작품 속 자연은 육화된 주체 앞에 펼쳐진 하나의 장이다. 여기에서 나와 세계는 서로 삼투한다. 이러한 상호적 움켜쥠을 통해 세계와 마주해 있는 경이감을 되찾게 된다. 리차드 롱은 자신 앞에 펼쳐진 자연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고독한 산책자처럼 끊임없이 걷는다.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걷기를 통해 생겨난 발상과 형식으로 늘 가득하다. 리차드 롱은 21세기에도 이어질 현대적 유목민의 전형이다. 권력에 의해 둘러쳐지지 않은 광대한 공간을 거닐며 남겨진 작은 흔적들은 지금도 커다란 울림을 낳는다.

출전 | 대구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