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정립을 위한 동물 타자화의 역사


시각 이미지의 오랜 역사를 총괄하여 동물은 이미지의 주요한 소재이자 주제로 등장해왔다. 동굴 깊숙한 곳 제의적 공간에 그려진 원시시대의 동물 이미지부터 편협한 근대적 주체성에 대한 반대급부로 제안된 ‘동물 되기’(들뢰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온 동물은 미술의 단순한 소재나 주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을 주체인 인간이 재현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 또한 동물이라는 원초적 사실을 은폐한다. 미술사 속에 등장한 동물 이미지는 과학적 대상으로서의 동물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에 놓고 인간이 상상하고 상징했던 동물들이다. 여기에는 전설적인 동물들과 괴물들, 그리고 동물화 된 인간 범주들이 포함된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가축, 야생동물, 괴물, 또는 만들어진 동물 등으로 범주화된 동물들은 동물이라는 지시대상에 대한 인간 의지의 세 가지 측면들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즉 길들임을 통한 정복의지, 짐승 같은 성격이나 야만성에 대한 두려움, 정체성의 혼합과 상실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것이다. 길들일 수 없는 야생동물부터 집 안팎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애완동물과 노동의 보조역할을 하는 동물들은 풍경이나 교훈을 주는 상징이나 알레고리 등으로 등장한다. 초상화에서 곧잘 활용되는 기형학이나 골상학 등은 인간성과 동물성이 중첩되는 영역이다. 과학기술을 통한 자연의 도구화가 극대화된 오늘날은 고기 공장의 대상들로 사물화 되어 대량생산 소비되고 때로는 폐기되고 있다. 동시에 장기이식 기술의 발달 등으로, 다시금 동물과 인간은 가까워진다.

어떤 형태이든 동물은 인간의 타자이며, 친숙함 속에서도 낯선 무엇으로 나타난다. 동물은 인간의 맞은편에 서서 모호한 인간성을 정의하는 반모델로 존재해왔다. 동질성과 차이를 가늠하는 노력들은 중립적인 진리 추구라기보다는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권력에의 의지에 가깝다. [철학자들의 동물원]에 의하면 차이의 확인은 지배 속에서 드러남과 동시에 인간의 우월성을 확인한다. 요컨대 인간은 동물들에 대한 지배를 통해서만이 인간이 된다. 마찬가지로 백인은 유색인들에 대한 지배를 통해서만 자신의 인간적 백색을 보존하고, 남성은 여성에 대해서 그러하다. 인류 내부에서 차별들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면 동물은 언제나 호출되었다.

땅 위의 동물과 하늘의 천사 사이에 낀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의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동물과의 차이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동물에 비해 불완전하게 태어나 오랜 교육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조건 역시 문명의 특성으로 평가된다. 지배적 담론은 인간의 나약함을 우월한 힘으로 전도시킨다.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고 자유로와진 손으로 도구를 발명하고 노동을 하며 언어와 이성을 발전시켜 세계를 지배하고 소유한다. 이미지 제작의 근간을 이루는 시각은 대지를 초월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여 정복하는 능력을 고양시킨다. 세계의 중심에 인간을 우뚝 세운 서구의 휴머니즘적 세계관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기독교의 인간중심적 목적론과 밀접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론]에서 ‘자연은 이 모두를 인간을 위해 생산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였으며, 기독교의 [창세기] 또한 인간에게 복종하고 봉사하는 동물의 위치가 분명하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근대철학의 시조 칸트가 ‘동물들은 그들 자신의 의식이 없고 따라서 궁극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 궁극 목적은 인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이성이 이룬 진보는 자연의 궁극적 목적으로 인간의 위상을 강조하며, 동물들은 ‘인간의 의지에 맡겨진 수단이자 도구들’(칸트)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이러한 역사는 인간화와 동물의 길들임 사이의 상관성을 확인한다. 인간성의 자기정립을 위한 동물의 타자화는 인간문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희생의 논리와 관련된다. 동물은 희생양의 역할을 맡음으로서 배제되고 억압받았지만, 동시에 초월적이고 성스러운 존재로 간주되었다. 동물에 대한 이러한 양가감정은 시각 이미지의 가장 오랜 역사를 기록하는 동굴벽화에 나타나 있다. 원시인들에게 동물 사냥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난 멜링거는 육식의 역사를 통해 인간 욕망의 근원을 탐구한 저서 [고기]에서 원시시대의 동굴 유적지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동물 뼈가 순록임에도 불구하고 벽화에는 순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음에 주목한다.




온순한 순록은 일상적인 삶의 토대였지만, 벽화의 대상은 인간에게 위협적인 동물들이었다. 원시인들은 정복하기 쉬운 동물은 그리지 않았으며, 위험한 동물의 특징을 흉내내고 공격 기술들을 묘사했다. 동굴벽화는 경고이자 표본이었다는 것이다. 일상공간이 아닌 곳 깊숙한 곳에 그려진 동물들을 눈앞에 달려가듯이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서 부재하는 동물에 대한 주술적인 영향을 투사한 것이다. 동물에 대한 성공적인 사냥에 대한 기원이 포함된 벽화 이미지에는 동물의 죽음을 단순히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고기의 획득이 아니라, 종교적 제의로 고양시킨다. 난 멜링거는 동물의 도살이 신에게 제물로 바친 후 공동체가 그것을 즐기는 특별한 기회와 결부되었다고 강조한다.

고대어에서 제물이라는 단어가 축제라는 의미와 거의 동일하게 쓰이고 있으며, ‘몸과 피’를 뜻하는 성찬식은 가장 알려진 예이다. 동굴 속에서의 제의는 신성함과 공포가 결합된 강렬한 내적 체험을 낳았다. 이 체험은 동물성을 매개로 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이러한 내적 체험에서 종교와 에로티즘, 그리고 예술을 관통하는 절대적 힘(폭력)을 발견한다. 그는 [에로티즘]에서 죽어가는 동물의 모습을 담은 라스코의 동굴 벽화와 동물을 죽인 후 관례적으로 속죄행사를 치루는 어떤 사냥족의 예를 들면서, 거기에서 살해와 속죄를 발견한다. 사냥꾼과 전사가 살해를 통해 신성을 느낀다는 바타이유의 역설적 논리는 종교에서 금기의 특별한 역할과 관련된다.

바타이유의 논지에 의하면, 동물은 금기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인간보다 신성하게 보였다. 따라서 원시인들은 동물을 살해할 때면 신성모독을 느꼈으며, 집단이 행하는 동물 살해는 신성의 의미를 획득했다.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 신성의 위치를 획득한 폭력은 계산된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평범한 세계 너머로 희생물을 신격화시켰다. 신성이란 엄숙한 의식이 집행되는 동안 그 불연속적 존재의 죽음을 참관하던 사람들에게 계시되는 존재의 연속성을 느끼게 한다. 격렬한 죽음은 어떤 불연속적 존재를 파괴시킨다. 원시인들은 동물의 신격을 인정했기 때문에 동물의 그림을 그렸다. 그 세계는 위반정신이 지배하는 신적인 동물성의 세계였다.

그 세계는 자연과 신성이 뒤섞인 세계로, 절대적 존재에 대한 느낌과 절대 유일신의 이미지를 동물의 죽음에서 얻었다. 이 절대 유일신의 이미지는 사냥꾼들이 동굴에 그린 그림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된다. 그 세계는 인간의 폭력이 응축되어 나타나는 동물신의 성전이다. 동물을 희생시켜 지내는 제사는 동굴벽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주체와 타자 간의 존재 연속성을 낳았던 강렬한 원초적 체험은 이후 기독교에서 상징적 희생 제의로 남는다. 기독교에서 신, 인간, 동물의 서열관계는 너무나 분명하며, 동물의 타자화는 중세를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철학자들의 동물원]에 의하면, 동물은 마침내 전형적인 기독교의 괴물, 즉 그 태도가 점점 더 짐승 같아지는 악마가 어디에나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에 이르자 악을 구현하기에 이른다.

사탄은 잡종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혼합에 대한 강박관념과 자아와 타자의 이타성에 대한 두려움인 변형에 대한 강박관념을 나타낸다. 악마 이미지는 동물이 점점 더 가치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때에 진일보한다. 동물 가죽을 쓴 악마의 여러 변신 형태가 종교적 도상을 다채롭게 장식하는데, 여기에서 악마는 영원한 돌연변이체로 나타난다. 온갖 동물 종으로 변신하는 악마는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이며, 통일성이 주는 신성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동물과 괴물, 악마는 상호 호환적인 것이 되고 근대 의학이나 심리학에서 무의식으로 잠재되어 있다. 더 나아가 타자화 된 존재들에는 동물의 형상이 어른거린다.

동물의 처지는 재현의 대상으로서 인간의 지배와 소유의 기호 아래 놓여 있다. 자연을 도구화하는 근대적 사고에서 동물은 야생동물 보호지대, 동물원, 대량 사육시설 등에 갇혀있는 상품적 대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근대의 분업화를 낳은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나 조립라인은 원래 동물을 고기로 가공하기 위한 대량 생산설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진정한 스승을 자연으로 알고, 다채로운 자연에게서 신성함을 느끼던 인간은 오늘날 대량으로 살육되는 동물들과 단절되어 있다. 이러한 의도된 망각과 분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금 동물이 처해져온 역사적 운명과 근접하게 한다. 한편 현대 예술가들은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고양시킨 문제점 많은 그 인간성과 주체성을 갱신하기 위해 금기들을 위반하며 다시금 동물성과의 존재 연속성을 탐구한다.

출전 | 미술세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