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사고
2010년 미술계는 석남 이경성 선생이 타계(2009년 11월 26일)했다는 우울한 소식으로 한해를 열었다. 이로써 한국미술평론가 1세대의 시대가 서서히 종언을 고하고 있다. 그동안 평단에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처음에 비해보면 꽤 많은 비평가들이 현재 활동하고 있고, 특히 인터넷이 몰고 온 달라진 글쓰기 환경이 평단을 활성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현상일 뿐, 정작 비평가가 할 수 있는 일이나 그들의 입지는 오히려 예전만큼 못한 것 같다.
1995년 비엔날레가 한국미술계에 처음 도입된 것을 계기로 큐레이터가 중심적인 역할을 도맡게 된 것이며, 특히 2007년 한국미술시장이 유례가 없는 성황을 맞은 이후 미술시장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 것. 이럴 때 일수록 평단이 중심을 잡아야한다고들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만큼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비평가 개개인에게 무턱대고 소명의식을 강요할 일만은 아니라고 본다. 비평가와 큐레이터, 그리고 미술시장이 각자의 역할을 도맡아 한국미술계에 기여하는 바람직한 역할모델 혹은 관계모델이 찾아져야 할 것이다.
비엔날레를 계기로 대안공간이 활성화되었다면, 미술시장을 계기로 해서는 각종 전시공간의 양적팽창을 가져왔다. 기왕의 갤러리들이 증 개축되기도 하고 신생전시공간들이 새로이 생겨나기도 했다. 여기에 소위 대안예술의 이름으로 종전의 대안공간과는 또 다른 성격을 표방하는 공간들이 생겨나 이름마저 아리송한 공간들이 적지가 않다. 2007년 정점을 찍은 이후 미술시장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침체는 좀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미술시장의 활성화가 가져온 전시공간의 양적팽창이 현재 조정기를 맞고 있는 것. 이 와중에 미술시장 일변도의 판도가 재편되면서 걸러질 것은 걸러져 미술계가 재생되는 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정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중국현대미술에 대한 반응 역시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연말에 국립현대미술관이 한중일 3국 작가들을 초대 전시한 <메이드 인 팝랜드>(11.12-2011.2.20)를 제외하면 중국현대미술 관련전시는 적어도 외형적으론 한 풀 꺾인 것 같다. 일각에선 중국이 경제적으로 패권을 장악하고 나면 사태가 달라질 것이라고도 한다.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미처 알려지지 않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연말에, 고가 미술품 거래에 매겨지는 양도소득세 일시 유예로 가닥을 잡았다는 소식에 이르기까지.
도시회화와 사건풍경
2010년 화단에선 도시의 생리 내지는 생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 그림들이 뚜렷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도시회화로 범주화할 수 있는 경우로서 정직성(아트팩토리, 4.3-28), 함명수(이화익갤러리, 11.10-23), 김성수(갤러리현대 16번지, 5.20-6.9), 최소영(카이스갤러리, 9.9-10.8)이 주목된다. 그동안 도시회화를 주도해온 정직성은 근작에서 기계부속을 연상시키는 화면으로써 도시 자체보다는 도시라는 거대한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그 관심을 심화시키고 있다.
원래 우울한 초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작가 김성수는 미로를 주제로 한 근작에서 현대도시를 뒤덮고 있는 기하학적인 구조물을 통해서 낯설음과 이질감 그리고 소외를 암시하는데, 역시 도시를 구조적으로,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처음에는 라면풍경으로 그리고 근작에선 털실풍경으로 독특한 회화질감을 연출하는 작가 함명수는 주로 번잡한 도시의 정경을 부감법으로 내려다본 시점을 채택해 도시의 전모를 조망하면서도 도시 특유의 역동성을 잃지 않고 있다. 청바지 작가로 알려진 최소영 역시 함명수와 마찬가지로 도시를 시각적인 대상으로서보다는 촉각적으로, 질감으로 감지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도시 자체보다는 도시의 생리에 초점을 맞춘 경우로서 일종의 사건풍경으로 정의할 만한 경향으로는 전채강(갤러리현대 16번지, 6.17-7.7), 유현경(갤러리 LVS, 9.2-25), 서상익(인터알리아, 11.26-12.10), 박진아(성곡미술관, 11.19-12.19), 이제(OCI 미술관, 11.3-23), 박은하(가나컨템포러리, 11.18-12.5), 정세라(이화익갤러리, 12.1-14), 이문주(갤러리 로얄, 2009.12.22-1.31)가 주목된다.
여러 시사적인 풍경의 조각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편집되기도 하고(전채강), 섹스와 폭력, 종교와 죽음 등 온갖 이질적인 삶의 편린들이 무분별하게 조합된 화면을 통해서 일종의 신풍속도로 정의할 만한 경우를 예시하기도 하고(유현경), 전시장의 디스플레이 장면(박진아)이나 재개발 현장(이제) 같은 변방의 풍경이 메인플롯으로 다루어지기도 하고, 취재열기로 들뜬 인터뷰에 응하는 침팬지를 통해서 영웅의 상실과 스타열망으로 나타난 현대인의 공허함을 풍자한다(서상익).
그런가하면 유기체처럼 흘러내리는, 유기적인 덩어리로 파편화돼 공중을 부유하는 세계, 사물,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박은하의 그림에서 파편화된 유기적인 덩어리는 불안을, 무의식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싶고, 뚜렷한 형상을 잃고 부드러운 빛 속에 허물어져 내리는 정세라의 그림에서 도시의 밤을 불 밝히는 빛의 성분은 시각적인 빛으로서보다는 촉각적인 빛으로서 다가온다. 그리고 소위 쓰레기 산수를 통해서 문명화된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해온 작가 이문주는 근작에서 아예 쓰레기로 뒤덮인 문명사회를 크루즈를 타고 여행한다는, 엉뚱하면서도 현실적인 상상력으로 극화해놓고 있다.
현대인의 초상과 일상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경우로서 현대인의 초상 혹은 일상을 주제화한 경우로는 안창홍(대구문화예술회관, 11.3-14), 이재헌(갤러리 조선, 11.17-12.8), 박진홍(갤러리 이즈, 8.11-17), 민재영(노암갤러리, 9.10-19), 박순철(인사아트센터, 8.25-30), 정경심(OCI 미술관, 10.6-26), 서용선(리시갤러리, 10.14-11.30), 김진(선컨템포러리, 6.10-7.3), 김동유의 이중초상(성곡미술관, 3.31-4.28), 김영헌의 전자향수(성곡미술관, 2.18-3.21), 그리고 강형구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상(영은미술관, 10.2-12.12)이 주목된다.
이 가운데 안창홍은 전문모델이 아닌 이웃사람들을 소재로 그려 나체화에 대한 상식을 재고하게 하며, 정경심은 보통사람들의 일상이 투사된 일종의 작은 세계 혹은 소우주로서의 밥상을 제안한다. 그리고 김진은 마치 맞지 않은 옷을 걸친 것처럼 타인의 방, 타인의 문명과 대면하는 것에서 오는 낯설음과 이질감, 소외의식과 이방인의식을,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서성이는 현대인의 정체성 혼란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그런가하면 민재영은 TV 모니터의 색선이나 픽셀이 만져질 듯 생생하게 구현된, 일종의 노이지 현상으로 볼 수 있는 전자현상을 화면에 끌어들여 독특한 회화효과를 연출한다.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 대한 반응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며, 이를 동시대를 읽는 특이 코드의 한 경우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인간관계를 서먹해하거나 주저하는 손의 표정을 연출한다든지, 수능시험 같은 사회적 풍경의 면면들을 이슈화하는 등 현대인의 초상으로 부를 만한 여러 의미 있는 지점들을 주제화한다.
일종의 환상주의로 범주화할 만한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이승현(갤러리 잔다리, 7.22-8.29), 류승환(포스코미술관, 8.18-8.31), 김혜나(OCI 미술관, 9.3-9.25), 다발 킴(포스코미술관, 10.27-11.9), 정수진(두산갤러리, 9.2-9.29), 이주형(성곡미술관, 3.31-4.25), 문범강(갤러리 스케이프, 6.10-7.10), 임춘희(가회동 60번지, 5.1-5.14)가 그렇다. 이 경향의 그림들에선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구름이나 연기가 그런 것처럼 곧잘 암시적인 화면 속에 형상이 숨겨져 있다. 자동기술법 내지는 자유연상기법에 착안한 비결정적인 형상에 대한 관심과 함께, 무한히 변형되는 형태가 흡사 무의식적인 비전에 형상을 부여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미지, 결코 그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는 이미지가 감지되고, 때론 낯설음이나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이, 더러는 잔혹한 이미지가 감지된다. 그리고 여기에 학창시절의 추억을 되불러온 것 같은, 오랜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아득한 향수를 자아내는 써니킴(갤러리 현대 16번지, 4.22-5.12), 그리고 작가의 유년시절 추억이 간직된 장소를 순회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되새김질하는 윤정선(관훈갤러리, 10.20-11.2)의 무의식적인 혹은 잠재의식적인 풍경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드로잉과 드로잉으로부터 파생된 회화 경향도 여전한 강세를 보여주고 있다. 비근한 일상에서 접한 무심한 장면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설원기(이화익갤러리, 9.1-9.14), 드로잉이 주는 즉흥성과 기발한 이미지를 매개로 사물과 세계의 됨됨이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하게 하는 김태헌(갤러리 스케이프, 11.17-12.31), 1990년대 문자그림에 연이어 꽃잎과 나뭇잎을 확대해 그린 김홍주(국제갤러리, 4.2-4.30), 상호간 이질적인 두 이미지가 하나의 화면에 겹쳐진 풍경을 연필로 흐릿하게 그린, 흐릿한, 희박한, 그래서 오히려 더 감각적이고 밀도감 있게 다가오는 일종의 역설이 발생하는 서혜영(갤러리소소, 5.14-6.13)의 경우가 흥미롭다.
이외에도 드로잉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전시로 <한국 드로잉 30년- 1970-2000>(소마미술관, 9.16-11.21)전을 들 수가 있다. 소마미술관은 이미 지난 2008년 <한국 드로잉 100년, 1870-1970>전을 열었었다. 이번 전시는 이 전시에 대한 후속 전시로서 그 이후의 시기, 즉 1970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현대미술에 나타난 드로잉의 현황과 특성을 개괄하고 있다. 드로잉을 매개로 사실상 한국현대미술 읽기를 수행하고 있는 것.
그동안 소마미술관이 기획한 크고 작은 드로잉 관련전시들이 있었지만, 2008년 전시와 연이은 이번 전시야말로 소마미술관의 성격으로 보나 그 의미 면에서 가장 비중 있는 전시라고 할만하다. 이제 드로잉은 더 이상 단순한 밑그림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의미는 아마도 그림을 위한 밑그림에서 사고를 위한 밑그림이라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으로 확장된 것 같다. 하나의 결정된 의미로 굳어지려는 세계인식의 지형도를 헐렁하게 하고, 해체하고, 가능하다면 재편하기조차 하는 실천적인 도구이며 개념적인 도구로서 재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이광호(국제갤러리, 4.15-5.16), 정명조(가나아트센터, 6.11-7.4), 박주욱(이화익갤러리, 5.6-5.19)의 극사실주의 회화 경향을 비롯해 고낙범의 색띠회화(코리아나미술관, 10.7-11.30), 강익중의 설치그림(갤러리현대, 4.7-5.2), 권여현의 차용회화(더 컬럼스갤러리, 1.19-2.20), 그리고 전통적인 재현의 문제를 재고하게끔 유도하는 송은영(갤러리 선컨템포러리, 2.4-2.27)의 경우가 흥미롭다.
이 가운데 이광호는 원래 주변사람들의 초상을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렸었다. 그 초상이 예사롭지가 않은 것은 그 과정에서 인터뷰를 통해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 이상의 정체성을 표출시켜 초상과 관련한 의미 있는 시도를 보여준 것이다. 근작에서는 예의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린 각종 선인장을 소재로 한 그림들에서 단순한 식물성의 정체를 넘어서는 어떤 의외성과 낯 설음(이를테면 동물성 같은)을 표출시킨다. 그리고 궁중예복을 갖춰 입은 조선시대 여인의 뒷모습을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정명조의 그림은 미의 역설이라는 주제가 말해주듯 화려한 외장에 가려진 여성의 억압된 성적 정체성을 암시한다. 그런가하면 네거티브 이미지를 극사실적으로 그린 박주욱의 그림에선 왠지 현실에 겹쳐진 비현실을 엿보는 듯하고, 의식의 층위로 설핏 고개를 내민 무의식적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추상회화와 그 이후
주로 중진 이상의 원로작가들을 중심으로 추상회화와 그 이후의 경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경우로는 한영섭(겸재정선기념관, 12.16-2011.2.6), 정창섭(국립현대미술관, 8.3-10.17), 윤명로(중국미술관, 10.22-11.10), 김창열(갤러리현대 강남, 10.12-11.7), 허황(가나아트부산, 10.14-31), 이태현(한원미술관, 10.14-30), 유병훈(유아트스페이스, 2009.12.15-1.14. 갤러리 쿤스트독, 10.22-11.4), 박영하(표갤러리, 2009.12.10-1.15), 김재관(갤러리 그림손, 4.1-12), 이동엽(갤러리데이트, 7.16-8.12), 남춘모(갤러리데이트, 8.20-9.19), 장승택(갤러리데이트, 11.5-12.4)을 비롯해, <고 이승조 20주기>(일주& 선화 갤러리, 6.11-7.9. 샘터화랑, 6.16-7.15)와, <고암 이응노>(이응노미술관, 5.4-8.22. 연세대학교박물관 백주년기념관, 9.1-10.10. 세종문화회관, 11.19-2011.1.9) 관련 전시가 주목된다.
작가들 가운데 윤명로는 아마도 <겸제예찬> 연작을 계기로 이후 추상에 자연현상에 대한 인상을 중첩시켜 의미 있는 전기를 열어놓고 있다. 추상이면서도 자연을 암시하는 그의 그림은 중국 현지 전시에서 동양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예시해준 경우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점점이 중첩된 모노톤의 화면이 숲, 바람, 고요와 같은 정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유병훈의 그림 역시 추상과 자연이 상호 내포되는 경지를 다룬다. 그리고 이태현은 마블링 이미지 위에 태극과 팔괘의 상징적 기호와 도상을 포치해 추상회화와 전통적인 도상이 만나지는 접점을 모색한 경우다.
내일의 너를 주제로 한 박영하의 그림이 서정추상에 해당한다면, 기하학적인 화면의 변주를 통해서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김재관의 그림은 기하추상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동엽과 허황이 모노크롬 회화 경향을 예시해준다면, 남춘모와 장승택의 경우는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화면으로써 후기미니멀리즘으로 정의할 만한 경지를 열어놓고 있다. 흔히 파이프 작가로 알려진 이승조를 회고하는 최근 전시들에서 작가는 단순한 추상을 넘어서 전자빔으로 상징되는 전자적이고 인공적인 동시대적 이미지의 존재방식을 선취한 것으로 재평가되기도 했다. 그리고 동백림사건으로 수감시절 밥풀을 짓이겨 만든 문자그림이나 몽돌에 조각하고 채색한 고암 이응로의 오브제회화에서는 오롯한 예술혼이 숙연함을 자아낸다.
한국화의 형식실험
최근 수년 내에 형식실험과 형식파괴를 선도해온, 그래서 그 표현영역을 확장시켜온 경우로서 한국화의 움직임에는 어떤 예사롭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 경우로는 특히 박병춘(사비나미술관, 11.3-12.3), 조환(동산방, 11.3-12), 이종목(한벽원갤러리, 12.6-14), 김건일(크링, 8.3-31), 안경수(갤러리비원, 12.9-2011.1.6), 안영나(인사아트센터, 6.30-7.5), 이현열(통인화랑, 6.16-7.4), 홍지연(표갤러리, 3.9-4.23), 유근택(갤러리 아트사이드 베이징, 4.17-5.23), 김보민(카이스갤러리, 3.11-4.2), 서은애(갤러리현대 16번지, 12.9-2011.1.2)가 주목을 끈다.
그 면면을 보면, 설치산수의 경계를 넘어 라면산수와 봉지산수로 확장되는 박병춘의 작업에서 산수는 산수컬렉션이란 주제에서 암시되듯 단순한 재현의 논리를 넘어 차용의 논리로, 즉 일상으로부터 오브제를 차용해오는 단계로, 그리고 그렇게 차용한 것을 재구성하는 차원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만유사생을 주제로 한 유근택의 그림에서 형식과 소재의 벽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만유사생이란 주제가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만유가 생각 속에 합류되고 그림 속에 합체된다.
천지가 생각 속에서 재편되고 그림 속에서 개벽된다. 생각의 논리에 따라, 그림의 생리에 맞춰 세계질서가 다시 짜여 지는 것. 그런가하면 조환은 전통적인 수묵을 입체로 재현했다. 이를테면 묵죽그림 그대로 철판에 커팅하고 용접해 평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종목 역시 획 그대로를 오려내 벽에다 설치해 한국화의 표현영역을 공간설치로까지 확장시킨다.
또한 일종의 시점놀이 개념에 착안한 김건일은 시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그림을 통해서 사물을, 사태를 보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시점과 관점의 문제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섬을 주제로 한 안경수의 그림에서 섬은 지리적이고 지정학적인 장소의 개념으로서보다는 인간실존의 유비적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안영나는 꽃이 아닌 꽃을 그린다. 각각 한자 花(꽃)와 畵(그림)자가 프린트 된 화면 위에 꽃을 그렸는데, 의미로서의 꽃과 그림으로서의 꽃이 상충되고 맞물리는 지점을 겨냥한 개념적인 그림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현열은 풍경 속에 삶의 편린들을 조합해낸 이야기가 있는 풍경을, 홍지연은 소위 퓨전 동양화를 각각 예시해준다. 더불어 라인테이프로 재현한 현대도시와 전통적인 화법으로 재현된 산수가 어우러진 김보민의 그림에서는 이질적인 조합이 만들어낸 어떤 의외성이 주목을 끌고, 전통적인 그림 속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어 옛 그림 속을 소요하는 서은애의 그림은 차용과 관련한 특이한 경우를 엿보게 한다. 유쾌한 은둔이란 주제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림 속으로, 상상력이 만든 가상현실 속으로 은둔하는 것.
판화의 경우
이와 함께 강행복(라이트갤러리, 10.13-19), 김준권(인사아트센터, 10.6-11. 나무화랑, 10.6-19), 김억(포스코미술관, 2.25-3.18. 나무화랑, 2.25-3.9), 이영애(인사아트센터, 6.9-14), 정명국(인사아트센터, 6.16-22) 등 판화와 관련한 전시들이 의미 있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의 전통적인 목판화 기법인 수인목판화 기법을 구사해온 김준권은 근작에서 새로이 수묵목판화 기법을 고안해 제작한 목판화를 선보였다. 선명하면서도 맑고 투명한 느낌을 주는 색감이 지리산 고유의 첩첩이 중첩된 산세를 더 아득해 보이게 한다. 국토를 주제로 한 김억의 판화는 지도를 연상시킬 만큼 세밀하게 묘사된 세밀 목판화가 특징이며, 항공 지도를 연상시키는 세로로 긴 산세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세세한 묘사가 진경 목판화의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주로 낙엽과 마른 꽃잎을 소재로 무상한 시간과 덧없는 삶을 전해준 이영애는 근작에서 외관상 평생 붙박이처럼 보이는 돌과 바위에게서 오히려 부유하는 삶, 떠도는 삶을 읽어내는 혜안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On Mask-car를 주제로 한 정명국의 판화는 실제 차체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문질러 차체 그대로를 인출해낸 프로타주 기법으로써 판화의 새로운 표현방법을 예시한다. 이렇게 인출된 각종 자동차 이미지를 통해서 시대의 초상을, 시대의 단면을 반영하는 것. 작가에게 자동차는 말하자면 시대의 초상이며 얼굴이며 마스크인 것. 한국근현대사를 대변해주는 시대적 아이콘인 것. 이를 통해서 작가는 한 시대의 아카이브를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올해 판화전문미술관이 새로이 문을 열었다.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이 개관한 것이며, 개관기념전으로 <2010 한국현대판화의 지천명- 성찰>(9.16-10.14. 10.16-11.15)전을 마련했다 . 각각 서정의 성찰, 서사의 성찰, 조형의 성찰, 그리고 매체의 성찰 등 4개의 소주제로 나눠 대표 판화작가를 선정 전시한 것이다. 국내 최초로 판화전문 미술관으로 개관한 이 미술관은 미술관의 성격을 특정 분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미술관 특성화 사업과 관련해 의미 있는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해외작가 국내전시
올해도 어김없이 주목할 만한 해외작가 전시들이 봇물을 이뤘다. 해외작가 국내전시와 관련해선 앤디 워홀(서울시립미술관, 2009.12.12-2010.4.4)과 키스 해링(소마미술관, 6.17-9.5), 오토 딕스(서울대미술관, 4.1-5.30. 대전시립미술관, 7.1-9.26), 그리고 연말을 장식한 샤갈(서울시립미술관, 12.3-2011.3.27)과 장 자크 상페(고양아람미술관, 12.21-2011.3.20) 전시가 주목된다.
앤디 워홀이 팝아트의 제왕이라면, 키스 해링은 팝아트의 슈퍼스타다. 장 미셀 바스키아와 함께 언더그라운드와 서브컬처가 낳은 어둠의 자식이며 비운의 주인공이다. 에이즈합병증으로 요절한 천재화가 키스 해링 사후 20주기를 맞아 작가의 대표작이 대거 출품된 이번 전시에는 낙서회화, 팝아트, 클럽문화, 인종차별, 핵문제, 에이즈를 아우르는 흥미진진한 담론의 스펙트럼이 망라돼 있다. 독일표현주의의 한 갈래인 신즉물주의의 대표작가 오토 딕스의 그래픽과 판화에는 전쟁의 참상과 일그러진 현대인의 초상을 시니컬하게 풍자한 작가의 음울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가차 없는 시선이 느껴지고, 꼬마 니콜라의 아버지인 장 자크 상페의 시선에는 인간에 대한 무궁한 애정이 묻어난다.
<영국근대회화전- 터너에서 인상주의까지>(예술의전당한가람미술관, 6.25-9.26)에서는 영국 낭만주의 화가들과 그 영향을 받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상호영향관계를 살필 수가 있고, 1957년 제정된 존 무어 현대회화상의 역대 수상 작가들을 초대전시한 <영국현대회화>(성남아트센터미술관, 8.6-10.14)를 통해선 전후 영국회화의 주류미술과 최근 영국현대회화의 경향을 비교해볼 수가 있다.
각각 아시아 지역의 근현대미술을 다룬 전시 <아시아 리얼리즘>(덕수궁미술관, 7.27-10.10)과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와 아라리오서울에서 열린 <군도의 불빛들>(12.9-2011.2.13) 역시 의미 있는 전시로 기억될 것 같다. 싱가포르 국립미술관과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아시아 리얼리즘전>이 리얼리즘을 매개로 아시아 근대미술을 조망하고 있다면, <군도의 불빛들>은 동남아시아 현대미술을 가늠하게 해준다. 국내에서 열리는 해외관련 전시들의 성격이나 범주가 점차 다변화되고 있고, 더욱이 의미 있는 것은 주체적 시각을 견지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