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미술계에 극사실주의 회화로 유형화할 수 있는 경향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후반이며, 흔히 당시 작가들을 극사실주의 1세대 작가로 부른다. 당시 회화는 구상미술의 전통을 잇는 소위 아카데미 풍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구상미술 이후를 예고한 것이지만, 모노크롬 회화와 개념미술의 그늘에 가려 그 빛을 보지 못하다가 뒤늦게 재조명된 바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극사실주의 회화가 처음 등장한 것이 우리보다 조금 빠른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서 그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대개는 자생적인 모색의 결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1세대 작가들의 특징으로는 더러 그림을 위해서 사진을 참조했겠지만 말 그대로 참조일 뿐, 2세대 작가들에게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소위 사진의 색감, 사진의 질감, 사진의 생리에 바탕을 둔 회화와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리고 비록 외형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결과나 그 생리가 판이한 것이지만, 적어도 그 이면에서 당시 모노크롬 회화와 개념미술에서 통용되던 개념들을 일부 공유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를테면 물성에 대한 관심이 그렇다(김창영의 모래, 김강용의 벽돌, 서정찬의 객토된 논밭). 그리고 오브제 혹은 레디메이드에 대한 관심도 엿보인다. 이를테면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 위에 그림을 덧그리는 변종곤의 관심사는 극사실적인 묘사 자체보다는, 혹은 그와 함께 그 자체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오브제가 불러일으키는 어떤 향수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석철의 그림 중 극사실주의 회화 경향에 해당하는 경우로는 소파를 소재로 한 <작용 반작용> 시리즈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시간, 기억 그리고 존재>는 이와는 약간 다른 경우로서, 폐기된 의자들을 잔뜩 싣고 있는 폐기된 트랙터를 보여준다. 그 의자들은 왠지 70년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면 쉽게 공감할 만한 학교 의자를 닮았다. 그래서 무슨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나타난 회고적 성격의 사회적 초상처럼 보인다.
그 이면에 사회적 코멘트를 담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실은 벽을 소재로 한 이석주의 그림이나, 기찻길에 우연히 자리한 양 당시 시대정보를 담고 있는 잡지 혹은 광조 전단지를 그려 넣은 주태석의 그림에서도 엿보인다. 특히 이석주가 그린 벽은 물성에 대한 관심 이상의 어떤 분위기를 암시하는데, 아마도 시대상황에 대한 메타포 같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드라이버나, 인력시장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는 소위 일상성 담론을 선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후 작가의 화두는 대개 시간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 출품된 이종구의 경우는 엄밀하게는 사실주의보다는 현실주의에 가깝고, 70년대에 연이은 80년대의 소위 참여미술(당시로는 민중미술)에 가깝다. 주지하다시피 여기서 사실주의와 현실주의는 다르다. 사실주의가 감각적 현실에 대한 닮은꼴을 추구하는 태도로서 기법 내지는 방법론에 기울어져 있다면, 현실주의는 현실에 대한 실천적 참여를 강조하는 경우로서 태도 혹은 입장 혹은 실천논리가 부각되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2세대 극사실주의 작가들에게선 특정 소재를 다루는 경향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를테면 정물, 인물 그리고 풍경 같은. 이 중에서도 특히 정물이 보편적인 편인데, 이를테면 과일(최정혁의 사과, 정창기의 자두, 김대연의 포도, 이성근의 비닐 랩에 싸인 포도, 윤병락의 수박), 꽃(최경문과 박성민의 얼음 꽃), 유리잔(유용상), 담배 재떨이(안성하), 보자기(김은옥), 책(서유라), 그리고 붓(이정웅) 등이다.
그리고 쇼윈도를 통해 보이는 케이크를 소재로 한 이흠의 정물화에서는 흔히 극사실주의 작가들이 기대고 있는 사진의 생리 중 포커스에 대한 이해가 엿보인다. 이를테면 피사체의 특정 부위에 포커스를 맞출 경우, 그 부위가 뚜렷하게 부각되는 것에 반해 나머지 부분이 흐릿하게 보이는 식이다.
그런가하면 이광호는 원래 인터뷰 형식을 빌린 초상화 그리기가 메인 작업이다. 보통 서너 시간동안 모델과 함께 하면서 대화와 그림 그리기를 병행하는 것. 그럼으로써 외형으로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부분(이를테면 인격이나 성격 같은)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근작에선 선인장을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해 그리는데, 선인장이 선인장 같지가 않고 생경하고 이물스럽다. 친근한 일상적 경험이 졸지에 추상화되는 것인데, 관계의 맥락으로부터 특정 대상을 오려내 그 자체로만 부각할 때, 더욱이 그렇게 부각된 대상을 클로즈업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감각적 현실의 장이, 그리고 리얼리티의 장이 어떻게 낯설어지고 생경해지는지, 그리고 추상화되는지를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가하면 정물을 매개로 전통적인 바니타스 정물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경우도 있다. 짓무른 과일을 소재로 한 황순일, 그리고 한상 가득히 어지러이 늘려있는 패스트푸드(흔히 정크푸드라고도 하는데, 그 말이 바니타스 정물화와 충돌하면서 묘한 울림을 파생시킨다)를 소재로 한 김기라의 그림이 그렇다. 특히 황순일의 그림 한 귀퉁이에는 어두운 화면에서 부각되는 스피커가 그려져 있기 마련인데, 인생무상이나 무분별한 욕망을 경고하는 것 같은 죽음의 레퀴엠이 들려올 것만 같다.
그리고 심점환은 원래 화면을 가득 채운 물고기 내장이나 육 고기의 장기 그림이 메인이다. 대개는 이물스럽고 그로테스크하게 육박해오는 이 그림들은 그대로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대리하는 것. 이번 전시에서는 극사실로 그린 개의 초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개가 보통의 개가 아닌 투견이란 점에서 역시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테마로 한 작가의 주제의식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그 자체 욕망과 희생의 관계로 나타난 사회학적 의미(어쩌면 존재론적인 의미마저도)를 획득한다.
그리고 그 다음 소재로서 인물을 들 수가 있다. 알루미늄 판에 스크래치를 조성하는 방법으로 초상을 그리는 한영욱, 얼굴 다음으로 많은 표정을 담고 있는 손을 그리는 오흥배, 마음의 창에 해당하는 눈을 클로즈업해 그리는 김용석, 욕망의 기호로서의 입술을 그리는 김성진, 그리고 여성스러움의 지표들을 건드리는 박지혜의 경우가 그렇다.
그 밖에도 인물화와 관련해선 강강훈의 초상화가 흥미로운데, 아마도 극사실주의 초상화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는 척 클로스의 경우에 가장 근사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척 클로스의 그림은 이를테면 땀구멍이나 솜털, 그리고 미세한 주름과 이물스럽게 번들거리는 피부와 같은 육안 너머로 보이는 것까지 붙잡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시각 경험이나 현상이 육안을 넘어설 때 감각적 현실은 불현듯 비현실 혹은 초현실로 변질된다. 척 클로스의 그림은 바로 이렇듯 감각적 현실과 현실 너머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강훈의 그림도 그렇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강강훈은 각종 소품들을 끌어들여 일종의 연출된 초상화를 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강형구의 초상화는 사실 치열한 묘사도 그렇지만, 정작 이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시간 개념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생을 달리한 사람들, 이를테면 J.F 케네디나 마릴린 몬로가 자연사할 때까지 오래 살았더라면 과연 그가 나이 들어 늙었을 때의 초상이 어땠을까, 하고 가정해 보는 것. 그렇게 그려진 초상은 당연히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작가는 외관상 영락없이 현존하는 상을 그리고, 실제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허구적인 초상, 없는 초상, 부재하는 초상, 불가능한 초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시간을 왜곡하거나 간섭하는 것, 실제인 척하면서 허구를 밀어 넣는 것이 파생시키는 아이러니가 강형구 그림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김성수는 일종의 내면적인 초상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사실감이 느껴지지가 않는데, 추상화된 배경화면 때문이다. 앞서 얘기했듯 관계의 맥락으로부터 특정 모티브를 오려내 그 자체만으로 부각할 때, 그리고 그렇게 부각된 모티브를 평면에 중첩시킬 때, 사실 혹은 감각적 실제는 추상화된다. 그런데 그 평면이 예사롭지가 않다. 어두운 화면이 흡사 그 깊이를 헤아릴 길 없는 심연을 보는 것 같고, 내면을 보는 것 같고, 무의식 자체와 대면한 것 같다. 아마도 초상의 내면적인 표정의 눈이 맞닿아있는 곳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도시에서 흔히 볼 법한 얼기설기 중첩돼 있는 철골 구조물들을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해 그림으로써 차갑고 기계적인, 무표정하고 삭막한 느낌의 도시의 생리를 암시한다. 자기반성적인 초상에서 사회적인 초상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고깃덩어리를 짓이겨놓은 것 같은, 혹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얼굴의 껍질을 벗겨내(요새 유행하는 성형용어로는 페이스오프) 그 속살이 드러나 보이게 한 것 같은 한효석의 초상은 그로테스크하고 섬뜩하다. 그림도 그렇지만,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라는 제목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우리가 아무 탈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감출 것은 감추고 드러낼 것은 드러내기 때문이다. 전부다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 감추는가. 살해욕망, 폭력욕망, 사물욕망(상대방을 인격체로서보다는 사물화 시키려는 욕망), 희생자 생산욕망, 관음욕망, 도덕의 탈을 벗고 성악설을 증명해 보이는 것에서 오는 당혹스러움, 나는 한갓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오는 자기 파괴적 본성, 그리고 내 속에 짐승이, 악마가 살고 있다는 사실의 인정 같은 것일 것이다. 나는 사회가 아니라면, 제도가 아니라면 불현듯 내 속의 마성을 드러낼 것이고, 광기를 휘두를 것이다. 그리고 그 드러냄과 휘두름의 칼날은 누구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향할 것이다. 반인간주의가 진지하다 못해 숙연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풍경들이 주목된다. 이를테면 정영한의 바다와 최석우의 숲, 그리고 네거티브 풍경을 통해서 마치 실제의 이면을 투시한 것 같은 의외의 비전을 열어 보이는 박주욱의 그림 등등.
풍경과 관련해선 특히 김상우의 도시풍경이 흥미롭다. 그의 그림은 이번 전시 출품작들 중에서 사진의 색감, 사진의 질감, 사진의 생리에 가장 근사한 경우로 보인다. 말하자면 사진은 의외로 사실적이지가 않다. 대개 사물의 표면은 빛이 감싸고 있기 마련인데, 이때 빛은 여러 경우로 사물의 형태와 색감을 변형시키고 왜곡시킨다. 부드러운 밸벳처럼 사물을 감싸 그 질감을 강조하기도 하고, 디테일을 지워 편평하게 만들기도 하고, 급격한 대비로써 사물의 어떤 부분을 실제보다 더 부각하고 다른 부분을 어둠 속에 숨긴다.
사물에 미치는 빛의 현상을 감각적으로 캐치하는 것, 그리고 렌즈를 통해 볼 때 그런 것처럼 피사체가 고유의 색감을 유지하면서도 왠지 모노톤으로 한 꺼풀 덮씌워진 것 같은 느낌(통일성을 부여해주는 느낌?), 빛의 두께와 공기의 질감을 붙잡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말하자면 사진에 흡사한 그림은 정작 극사실적인 묘사보다는 다분히 분위기의 문제이며, 김상우의 그림은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정보영의 그림은 사실 극사실주의도 그렇지만, 오히려 이보다는 문학적 서사와 알레고리에 관련이 깊다. 이야기가 있는 그림, 이야기를 위한 구실이 되고 있는 그림, 이야기에 부수되는 그림이라고나 할까. 이번 전시에서는 일종의 연출된 풍경, 만들어진 풍경, 가짜풍경을 보여준다. 얼핏 빛이 숲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정적인 풍경이며 예사로운 풍경 같지만, 사실은 인위적으로 조합되고 만들어진 풍경이다. 브로콜리를 소재로 숲을 연출한 것.
그리고 그 숲의 가장자리에 누워있는 이름 모를 주검(작품의 제목이 어떤 죽음이다) 역시 알고 보면 조각상에 지나지가 않는다. 자세히 보면 발판이 보인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세상 끝에서 맞닥트린 주검이며, 작가의 연출에 의해서 재구성되고 짜 맞춰진 유사주검이라는 상황이 죽음이라는 (실제) 사건, 고독이라는 (실제) 사건을 환기시키면서 미묘한(기묘한?) 울림을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