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있다가 최근 통의동으로 이전 개관한 갤러리 시몬이 그 첫 전시로 노상균전을 열었다. 6년만의 국내 개인전이다. 작가는 그동안 줄곧 시퀸이라는 특정 소재에 천착하면서 이를 심화하고 변주해왔는데, 물고기를 그리다가 비늘에 주목하게 됐고, 그 주목이 시퀸으로 옮아왔다고 한다. 실제로도 시퀸은 일종의 인공비늘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인공비늘을 이용해 처음엔 유영하는 물고기나 흐르는 물속 정경 같은 형상작업을, 그리고 꽤나 복잡한 작업을 보여주다가, 이후 점차 미니멀리즘 혹은 후기 미니멀리즘(미니멀리즘의 논리에 정서가 탑재된)을 연상시키는 추상적이고 단순하고 패턴이 강한 작업으로 옮아오고 있다. 그리고 평면의 경계를 넘어 입체설치로까지 그 표현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술을 부리는 별자리>란 주제에서 엿볼 수가 있듯 별자리를 소재로 했다. 마술을 부리는 별자리는 암시적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별자리를 보고 점을 쳤고 기후와 기운을 예감했고 생사운행을 예시 받았다. 가까이서 보면 실제로 갈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지만 멀리서 보면 꿈처럼 아롱거린다. 대우주와 소우주를 동시에 품은 인간처럼 관점을 매개로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아우른다. 그 자체가 인간존재의 유비적 표현이 되고 있는 것.
이런 예사롭지 않은 의미와 유사성에 착안한 작가는 자신의 별자리인 사수자리를 비롯해 지인들의 별자리를 캔버스에 불러들인다. 먼저 캔버스에 별자리 그대로를 옮겨 그린 후 그 별 자리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려나간다. 그렇게 크고 작은 동심원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면서 별자리는 또 다른 환영적인 이미지로 재생된다. 작가의 상징적 좌표가 아로새겨지고 지인들과의 관계가 암시된다. 이쯤 되면 또 다른 유형의 자화상이, 일종의 도상학적 자화상이 제안되고 있고, 관계의 네트워크로 나타난 사회적 초상이 제시되고 있다고 봐도 될 듯싶다.
그리고 시퀸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재인 탓에 그 집적이며 집합이 실제로는 평면이면서 입체로 보이는 일종의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입체와 평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루전적인 환경이 전개되고 있는 것. 작가로 하여금 시종 시퀸이라는 특정 소재에 마약처럼 들러붙게 만든 매력이고 이유다. 더욱이 그 형태는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고, 색마저도 달라 보이고, 심지어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미미해서 오히려 더 큰 파동처럼 보인다.
평면이지만 입체처럼 보이고, 결정적인 형상으로 고정돼 있지만 움직이면서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고, 색마저도 변화무상하다면 이야말로 결정적인 세계 속에 비결정적인 세계 곧 천변만화를 품고 있는 경지가 아닌가. 색즉시공이며 공즉시색의 차원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색은 색이 아니고, 공은 공이 아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인식의 그물망에 붙잡힌 것이 실제가 아니다. 그나마 인식은 사물 뒤편을 추상할 수야 있지만, 감각은 그 마저도 불가능한 일이다.
시퀸의 감각이 불러일으킨 인식이 이처럼 파급되면서 그 파동이 가닿는 지점이 부처상이고 예수상이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다만 네 자신이 이미 부처이며 그 부처가 상으로 투영된 것일 뿐.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으로 주어진 화두일 뿐. 더욱이 작가의 부처는 환영의 옷인 시퀸을 덧입고 있어서 그것이 실제가 아닌 환영임을 알아보게 하는 친절한 길잡이 역할마저 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마네킹의 바디에 시퀸의 옷을 덧입힌 작품에서 <당신이 보는 것>이란 제목이 예사롭지가 않다.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이 제목의 숨은 뜻은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라는 동어반복으로 나타난 프랭크 스텔라의 전언과 충돌하면서 묘한 울림을 파생시킨다. 이야말로 동어반복을 숙주 삼아 동어반복을 넘어서는 논리이며, 동어반복인 척 하면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놀이가 아닌가. 작가는 이렇게 모더니즘에 기생하면서 모더니즘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마네킹을 한갓 사물로 보는 것도, 아니면 그 자체를 욕망의 기호로 보는 것도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이며 의지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름하기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실제로 시퀸의 옷을 덧입은 마네킹은 실제 사람보다도 더 감각적이고 유혹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인은 실제보다 기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더 친숙하다고 느낀다. 기호에 비해 실제는 매력이 없고 빛도 없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욕망의 동물이라고 했다. 욕망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불교는 욕망을 업의 원인이라고 본다. 욕망이 없으면 업도 없다. 욕망이 인간의 본능이면서 동시에 업의 원인이기도 하다. 욕망을 긍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부정해야 하는가. 욕망의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부조리한 인간이 싹튼다. 욕망을 긍정하면 업에 사로잡히고, 욕망을 부정하면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포기된 인간의 경지를 불교용어로 해탈이라 하고, 그 문제의식 그대로 조르주 바타유의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라는 저작에 가 닿는다. 당신은 인간이라는 상황 속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벗어날 것인가. 그 상황을 온몸으로 껴안을 것인가, 아니면 내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