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은 랜덤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무분별하고 무작위하다는 말이다. 분별이 없고 작위가 없으니 저마다 나름으로 읽고 향유하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별반 의미를 두지 않고 무심결에 툭 던져본 말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말은 그대로 작가의 그림의 정곡을 찌르고 있어서 예사롭게 들리지가 않는다. 작가의 그림은 그저 휘적휘적 붓 가는 대로 그린 것 같고, 정신과 감각과 호흡이 이끄는 대로 그린 것 같다.
의식적으로 그렸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그려진 것 같다. 능동적으로 화면에 개입하고 화면을 장악하기보다는 반쯤은 자신을 방기한 채 수동적으로 내맡겨 화면 자체의 생리가 그리게 한 그림 같다. 외관상 우연성이 지배하는 만큼 그림은 그저 비정형의 붓질의 궤적을 보는 것 같고, 무분별한 얼룩들의 집적을 보는 것 같고, 무작위한 행위의 흔적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연성이 필연성을 불러오고, 무의미한 얼룩들이 유의미한 형상을 암시하고, 가변적인 형상이 결정적인 형상을 끌어들인다. 그저 무분별해 보이는 궤적과 얼룩과 흔적들에서 동양 사람들은 산수를 발견하고, 서양 사람들은 누드를 떠올린다. 혹자는 사의적인 풍경을 보고, 혹자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는다.
저마다의 인문학적 배경을 전망 삼아 천변만화의 형상을 보아내는가 하면, 때로 시지각적 경험의 경계를 넘어 소리마저 듣는 공감각을 체험하는 것. 이로써 랜덤한 그림은 사실 열려진 그림임이 밝혀진다. 법을 넘어선 법이나 작위를 허무는 작위로 나타난 그 자체 모순어법을 실현한 그림이며, 그 모순어법 속에 모든 형상을 싸안고 모든 의미를 보듬어 들이는 그림이다.
주지하다시피 작가의 그림은 추상으로 범주화되고, 주로 선의 운영에 기대어 추상을 풀어냈다. <얼레짓>이 그렇고, <균열>이 그렇고, <익명의 땅>이 그렇다. 때로 면이 두드러질 때가 있지만, 이때의 면조차 사실상 선의 변주로 보인다. 일종의 서체추상의 맥락에서 읽히는 이 선의 운용을 위해서는 호흡이 필수다. 붓질의 끓고 맺음이나 나아감과 머무름, 이 모두가 그대로 호흡의 들숨과 날숨에 일치해야 한다. 이런 연유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마> 시리즈다.
호흡이나 숨결을 의미하는 아니마 시리즈는 자기 내면에 흐르는 호흡을 읽어내고 그 흐름 그대로 붓질에 투사하는 과정이었고, 내면의 호흡과 몸의 호흡, 행위의 호흡과 붓질의 호흡을 일치시키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선의 운용을 위해서 몸의 습성에 주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점차 추상과 형상의 경계마저 허물어진다. 원래 추상적인 선이었지만, 몸을, 몸의 호흡을, 몸의 습성을 경유하면서 몸의 관성으로 아로새겨진 형상을 끌어들이게 된 것이며, 형상을 암시하는 선을 실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그림에서 형상을 보다 뚜렷하게, 그리고 보다 의식적으로 환기시키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겸재 예찬> 시리즈부터일 것이다. 겸재가 인왕산을 즐겨 그렸던 것처럼 작가는 북한산을 즐겨 그린다. 주지하다시피 겸재의 진경산수에서 진경은 중의적 의미를 함축한다. 실제풍경이 그 하나이고, 진정한 풍경이 또 다른 하나이다. 실제풍경을 소재로 하되, 단순히 닮게 그리기보다는 그 풍경의 풍경다움을 그리는 것.
북한산의 감각적 닮은꼴이 아닌 북한산의 정기(그 의미가 아니마와도 통하는)를 그리고 있는 작가의 그림이야말로 이런 진경산수의 의미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고, 진경의 속뜻을 실현한 경우로 보인다. 그리고 이번 전시작품들을 포함해서, 이후 그림들은 그 정기를 추적하고 심화하고 다변화한 경우의 연장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정기는 기운으로서, 기운의 본성은 흐름이다. 흐르는 것은 변하는 것이다. 정기 곧 기의 흐름으로 볼 때 북한산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볼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선을 호흡의 일종으로 읽었듯이 자연을 정기 곧 기의 흐름으로 읽는다.
이런 연유로 그림에는 <바람 부는 날>이나 <겨울에서 봄으로>와 같은 자연을 상기시키는 제목들이 붙여진다. 이 제목들 역시 고정된 실체로서보다는 항상적으로 변하는 자연의 본성을 떠올려준다. 바람 부는 날 대기는, 더욱이 산속에서 맞는 대기는 그 변화가 눈에 감지될 정도다. 그리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산이 갈아입는 옷의 색깔은 가장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렇게 회백색 여백이 산세 사이로 흐르는 운무를 보는 것 같고, 쇳가루를 함유한 안료가 유독 바위가 많은 산세의 철 성분을 보는 것 같고, 금빛 붓질이 햇빛에 발광하는 산세의 표면현상을 보는 것 같고, 짙은 군청색 화면이 밤의 적요에 감싸인 산세(나아가 자연 혹은 우주)의 심연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풍경은 눈앞에서 흩어졌다가 모이고, 뭉개졌다가 뚜렷해지고, 후퇴했다가 부각되고, 성근 듯 충만하다. 어슷비슷하면서도 똑같은 것이 없고, 유유상종한데 패턴이 없고, 정지된 듯 움직이는 것 같다. 그 성질 그대로 기의 성질을 닮았고, 그 현상 그대로 호흡의 현상을 닮았다.
은근하게 스며왔던 전작에 비해보면 근작에서의 색채는 더 분명하고 더 짙고 더 깊게 다가온다. 똑같이 자연(심의적이고 사의적인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짙은 갈색이나 깊은 군청색이 금색과 어우러진 화면이 전작과는 또 다른 자연의 질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질감은 정지된 듯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인해 미묘한 아우라를 얻는데, 빛에 반응하는 성분을 함유한 홍채라는 안료 탓이다.
보는 위치에 따라 색깔이 달라져 보이는 자연의 정기를 그린 것이며, 생각에 따라 색깔도, 형태도, 질감도, 느낌도 다 달라져 보이는 자연의 섭리를 그린 것이다. 자연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고정된 실체나 감각적 닮은꼴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자연을 그리되 정기를 그리고 기를 그리고 흐름을 그림으로써 자연을 그린다. 그래서 그 그림은 자연이면서 자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