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영의 작품이 전시된 곳은 언뜻 빈 공간에 들어선 것 같은 휑한 느낌을 준다. 흰 눈 위에 흰 토끼 마냥, 원래 벽면이 하얀 전시실에 하얀 작품들이 보일 듯 말 듯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품들도 대부분 벽의 일부여서 마치 벽 위에서 벽이 생겨나는 듯, 또는 사라지는 듯이 보인다. 폭과 높이가 같은 10개 정도의 부조적 표면이 시리즈처럼 걸려 있는 [fragmented space]는 가정집 벽의 한 면들이 그림처럼 죽 배열되어 있다. 바닥에서 약간 올라가 붙은 위치만이 전시장 벽과 구별된 작품, 요컨대 관객이 주시해야할 대상임을 알려준다. 벽 위에는 전기 스위치, 액자 등이 걸려 있으며, 서랍의 절개 면이 보이기도하고, 기울여진 청소도구들이 제법 사실처럼 연출되어 있다. 하얀색은 일반 벽과 비슷하며, 일상공간과의 연속성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축소모델에서 야기되는 가상성이 아니라, 현실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전시장에 붙은 벽은 천정과 바닥을 아우르는 것이어서 실제의 연속과 같은 환영은 곧 깨어지고 만다.




전시장은 부제 그대로, 파편화 된 공간이 펼쳐진 공간이다. 벽의 파편들은 전체와 부분 간에 설정된 유기적 관계를 잃어버리고, 단순히 집합되어 있다. 전체를 조망하는 시점을 확보하지 못한 채 실 사이즈로 제작된 벽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벽은 전체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나온 일부가 아니라, 그자체로 주목되는 사물이 된다. 거기에는 전체가 없고 부분만이 있다. 단편들은 전체와 부분 사이의 변증법으로부터 탈주한다. 전체의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전체와 부분 간의 관계를 전복하고자 하는 작가는, 부분에서 ‘새로운 생성의 선이 지나가는 공간’을 본다. 이러한 유동성 속에서 고정된 중심은 사라진다. 실사이즈의 건축적 구조지만 전체를 일괄하는 유기적 구성 원칙이 없이 단지 기계적으로 배열됨으로서, 관객에게 맞딱뜨려진 장소는 속해지자마자 벗어나야 할 곳이 된다. 그것은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과정이다. 어디선가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을 법한 대상들은 새로운 기능으로의 확장을 위한 ‘그라운드 제로’같은 잠재성을 가진다.




이전 작품을 분해하여 재활용한 것도 있다. 기존의 것에서 가져왔지만, 하얀색을 통해 새 질서를 씌웠다. 벽의 파편들은 물체가 아니라 빈 공간에 주목하게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것이 다시 놓여 지거나 지나가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빈 공간은 상징으로 채워진다. 토건국가라고도 칭해지는 한국의 현실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공간에 대한 상징이다. 자연과 삶의 터전을 관통하는 자본의 힘은 공간 배치의 방식을 변화시킴으로서 삶의 구조를 계속 재맥락화 한다.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뒤로한 채 빠른 시간 동안 물질적 진보를 이루어낸 한국사회는 다수를 한쪽 방향으로 몰아가는 급격한 변화를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변화가 만연한 곳이다. 홍유영의 작품은 공간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사회적 관점이 내포되어 있지만, 작품의 형식 자체는 존재론적이다. 거기에는 어떤 폭로나 계몽 의식도 없다. 다만 작가는 변화를 위한 변화를 고무하는 현대성의 단면인 일상성에 주목할 뿐이다.

통시성의 단면인 공시성은 변화의 이면을 드러낸다. 변화를 나타내는 기표는 통상적으로 화려하고 번쩍거리기 마련인데, 홍유영의 작품은 탈색되어 있고 무광이다. 지루하고 밋밋한 일상은 급격한 변화가 주는 자극성이나 가혹함의 이면이다. 그렇다고 홍유영의 작품이 과거 지향적이거나 향수적인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기존의 지배적인 틀을 주목함으로서 또 다른 생성의 여지를 찾아보려 한다. 서울에서는 개발의 상징인 아파트에 살았고 유학중인 영국에서는 1880년대에 지어진 집에서 살고 있는 작가에게, 유럽에 비해 주거환경의 변화가 심한 한국의 현실은 강한 인상을 주었다. 자잘한 개보수 정도가 아니라, 싹 갈아 치우는 식의 개발에서 자본의 이해관계만 발견되지만, 이러한 획일적인 변화 와중에도 차이는 감지된다. 차이는 생성을 위한 단초가 된다. 두 번째 전시실에는 철거 된 집의 일부를 그대로 떠내온 듯한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작가는 ‘누군가 긁고 간 부서진 공간에 시선이 간다’고 말한다.

거주민의 의지와 달리 ‘왜 한 장소는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일까. 그 대신 뭐가 들어갈까. 왜 저 공간을 저렇게 변화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압축되어 있다. 꽃무늬 벽지가 선명한 이 집은 철거 촌에서 반이 잘려나간 곳에서 여전히 생활하는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공간이 절단 나는 폭력 가운데서도 삶은 계속된다. 보라색 슬리퍼, 가장자리가 떨어져 나간 밥상, 외풍이 심한 곳에서 온기를 주었을 열풍기, 글자가 큼직하게 찍혀진 달력 등 갖가지 생활 소품들 위로 공사장에 쓰이는 차양막이 둘둘 말려 있다. 물건들은 버려진 것들을 수집한 것이지만, 여전히 쓸 만하다. 단번에 모든 것을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폭력적 과정은 폭격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동은 제거를 함축한다. 작품 [re-moved space]는 전에 있던 작업실에서 전시했던 작품을 벽에서 떼어낸 자국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이동하기와 제거하기를 중첩시킨다.

홍유영의 작품은 대개 흰색으로 칠해져 자연색이 탈색되어 있는 것은 대상보다는 관계성에 주목하게 한다. 관계는 공간 속에서 파생된다. 하얀 면은 잘못된 글자를 지우는 수정 액처럼 새로운 글자가 쓰이기 위한 바탕이 된다. 탈색되지 않은 작품들은 현실의 연장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자연스럽게 모여 있는 사물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수집한 것이며 인위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작가는 이전 작품에서 지붕 아래 붉은 벽돌위로 연립주택의 개조된 미니 베란다를 통째로 재현하기도 했다. 빨래를 말리기 위해 알루미늄 섀시가 열려 있는데, 틀 지워진 공간에 이것저것 놓여있는 것이 그자체가 하나의 작품 같다. 무엇인가를 쟁여 놓는 곳이면서도 바깥으로 뚫려 있는 창은, 꼴라주와 회화 간의 형식적인 차이조차도 무화시킨다. 이러한 구조물은 좁은 공간을 조금이라고 넓게 쓰려고 서민들이 고안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똑같이 주어진 공간을 넘어 또 다른 공간을 향해 삶의 영역들을 확장한다. 우연히 발견된 장소에 수집된 사물들로 채워진 이 벽면은 현실의 일부가 떠내어진 것이나 현실을 모델로 한 축소모형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소우주처럼 삶의 단면을 형성한다. 여기에서 파편은 전체를 포함한다. 흰 벽면에 불쑥 튀어나온 회색 구조물은 쐐기 같은 강렬한 단편으로 나타난다. 생활용품들이 배열된 작은 창틀 위에는 천막이 있고, 마치 회색 재를 뒤집어 쓴 것인 양 자연 색상은 사라진 상태이다. 그것은 작가가 서대문의 낡은 아파트에서 발견한 것으로, 이미 그 주변에는 20-30층으로 올라간 주상복합 건물들이 이 낙후된 건물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재개발과 연관된 모든 물리적 정신적 사회적 상황들이 압축된 소우주로서의 단편이다. 있는 것에서 잘라 붙인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파편이다. 그것은 건축과 비교될 수 있는 소우주이다. 경사져서 붙어있는 단편은 보여 지는 것, 사실적인 것, 본질로 간주되는 것들이 구축되는 바닥이 견고한가를 묻는다. 삐뚜름한 불안정 속에서 생성이 야기되며, 생성 또한 구축된다. 기둥 중간에 거꾸로 붙여진 의자와 그 위에 여러 기물들이 나름의 균형을 잡고서 쌓여 있는 작품은 불안정함 역시 새로운 질서를 파생하는 토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화분, 세숫대야, 물병, 그릇 등 다양한 모양의 그릇이 박물관의 수집품처럼 배열된 작품은 소우주로서의 공간들이다. 수집된 물건들은 구체적 맥락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고, 관객 눈높이에 정렬됨으로서 추상화된다. 내부 넓이의 크기에 따라 재배치한 것 것인데, 그것은 본래의 시공간 속에 놓여 있던 것들에 작가가 정한 새로운 질서가 적용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공간 배치는 그것이 질서로 간주되든 파괴로 간주되든, 하나의 힘이 관철되고 있음이 강조된다. 펠릭스 가타리가 [기계적 무의식]에서 말하듯이, 배치는 우연이나 보편적인 공리계에 굴복하지 않는다. 배치가 종속되는 유일한 법칙은 탈영토화 운동이다. 배치는 가능성과 가상성도 포함한다. 예술은 자본과 마찬가지로 공간의 파괴와 생성을 주도한다. 단편들의 출처는 다양하며 작품을 통해서 새로운 공존의 질서를 구축한다. 이러한 삶의 단편들에는 그곳에 살았을 인간의 부재가 확연하다.

그것은 공간이라는 비유기적 요소를 통해 인간의 유기적 삶을 추적한다. 잘려져 나온 단면이 다각적으로 조합되는 방식은 기계적이다. 가타리의 용법에서 기계는 일반적인 정식 혹은 형식의 세계에 붙은 본질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기계는 순수 논리 공간에서가 아니라, 우연적인 기계적 표명(발현)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 기계와 그 배치는 항상 기성질서에 대한 외경을 함축하고 있는 보편적 전망과 거리가 있다. 홍유영의 작품은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이 몽타주 되어 있다. 기계는 세계를 물화하고 축소화하는 경향이 있는 구조와 반대된다. 거기에 굳이 구조가 있다면 그 구성요소는 다양한 부품들로 조립되어 작동된다. 우리가 사는 거처 뿐 아니라 무의식이 작동되는 기제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들과 접속한다. 이러한 기계는 하나의 코드로 구획되는 구조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집을 ‘살기 위한 기계’(르 꼬르뷔제)로 규정지었던 근대 건축가들의 모토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뒤튼다. 근대건축의 기본재료인 유리와 철, 콘크리트는 건축을 날카로운 윤곽선을 가진 기계로 만들어 왔다. 재료 및 구축방식 자체가 기계적 수단을 사용하며, 보다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대중의 기계적 삶과 조응하는 것이다. 근대 건축가들의 유토피아적 비전은 양차대전을 통해 세계가 이미 충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실화에 가속도가 붙었으며, 그것은 모든 것이 파괴되는 전쟁을 격고 사회의 총체적인 재건에 힘써야 했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세계를 전면적으로 재건하고자 하는 근대적 합리성은 곧 도구화되었으며, 자본의 순환주기에 의해 파괴와 생성의 주기는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변화의 광풍 속에서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를 묻게 될 때 합리성은 비합리성으로 전도된다. 작가가 관객 앞에 가져다 놓은 단편은 한때 합리적인 것이라고 믿어졌던 것의 불가해한 흔적들이다. 동시에 그것은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는 과정의 한 단면이 고정된 것이다.

그것은 파괴되면서도 지속적 창조 속에 놓여 있음으로 인해, 시간 이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열림은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다른 것들과 결합되는 단편들은 증식하며 분산된다. 이 단편들은 증식이라는 유기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나, 명확한 외곽선을 보존함으로서 스스로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이접 속에서 바깥과 연결된다. 공존하는 이질적 요소들은 전체화가 아닌 차이를 감식하게 한다. 그것은 생성되고 변화하는 다수의 실체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단편은 매우 독특하다. 모리스 블랑쇼는 [끝없는 대화]에서 ‘파편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는 실재의 파편화나, 또 지금의 파편들이 조화로운 전체를 이룰 미래의 순간에 대해서만 말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파편이 행사하는 폭력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관계를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근원적인(그러나 잊혀진) 전체성, 혹은 앞으로 귀결된 전체성에 의존하지 않는 파편들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사유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홍유영의 작품은 현실과 관계가 있으면서도 자족적인 전체, 즉 파편들로 존재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예술--그는 예술/기계라고 한다. 여기서 ‘기계’는 ‘부분적인 대상들의 생산’으로 정의된다--은 더 이상 부분으로 분할되지도 않고, 하나의 전체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그 자체 고유한 궁극적인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부분적인 대상은 전체성이 없는 파편들, 분할된 부분들, 소통되지 않도록 막힌 관들, 칸막이로 격리된 무대이다. 부분들 간의 ‘소통 불가능함’, ‘공통성 없음’은 간격들을 말한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시간’은 이웃한 사물들 사이에 간격을 삽입하고, 반대로 ‘되찾은 시간’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사물들을 이웃하게 한다. 현실 속의 인간도 오래 묵은 행동과 현대적인 행동, 미래적인 행동을 동시에 보여주곤 한다. 그리하여 과학에서건 현실에서건 다시대적이고 주름진 시간, 여러 차례 접혀진 시간이 존재한다. 현대예술은 파편성을 통해 다양한 시간들을 예시해 왔다.

들뢰즈에게 현대의 예술 작품들은 고전적인 조화나 유기적인 전체가 아니라, 어떤 결정체를 만들어 내는 한 조각처럼 작동한다. 이러한 모델은 식물에서 찾아진다. 그는 가타리와 함께 쓴 [앙티 외디푸스]에서 동물적인 전체성(유기성) 모델이 아니라, 식물적인 모델을 주장한다. 뿌리줄기처럼 ‘부분들 옆에 나란히 있는 부분들 자체로 생산된다’ 여기에서는 횡단 선만이 파편 조각들을 주관한다. 이 형식은 파편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는 만큼이나 파편들이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것을 방해한다. 부분들 각각이 전체를 미리 결정하고, 전체가 부분들을 결정하는 유기적인 총체로서의 예술작품이라는 진부한 개념은 거부된다. 현대의 예술가는 이러한 해체를 통해서 무아경과도 같은 그들의 충만한 시간을 이룩한다. 이렇게 이룩된 세계, 즉 파편 속의 새로운 질서가 바로 우리가 예술작품을 향유할 때의 그 독특한 시간이다. 그것은 무차별적인 시간의 파괴가 아니라, 소외된 삶에서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문턱이 된다. 홍유영이 만들어낸 부분 속의 전체는 폐허의 흔적 속에서 강렬한 특이성(singularity)을 건져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