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아르코 미술관 전문가 성장 프로그램


1. 김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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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공간에 들어선 관객을 온통 스트라이프 무늬로 만들거나, 모든 것을 문서파쇄 기계처럼 절개해 버릴 것 같은 김용관의 작품은 시차에 의해 배제될 수밖에 없는 면을 시야에 포함시킨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선보인 첫 개인전을 ‘PARALLAX VIEWPORT’(시차적 표시영역)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영역에 들어서면 하나의 관점을 선택함으로서 가능해지는 분명함, 요컨대 중심과 주변, 전체와 부분 사이의 유기적 관계가 해체됨으로서 야기되는 어지러움증이 밀려온다. 그의 작품은 분석적이면서도 분열적이다.

이러한 분열 분석은 펠릭스 가타리가 [기계적 무의식]에서 주장하듯이, 구조를 해체하고 그 속의 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에 다양한 선들을 접속시킴으로서 색다른 배치를 구성하는 것이다. 주도적 관점에 의해 배제되었던 시야는 병렬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리고’로 연결된 세계는 무한히 확장된다. 이러한 확장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작품이 언어적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한글의 음소를 벽돌로 삼아 만든 작품 [SYLLABRICK]은 과학적인 표음 문자인 한글에서 가능한 무한대의 조합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작품 [QUBICT]는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으며, 입체로는 구현될 수 없는 가상적인 차원에 속해있다. 김용관의 작품은 흑백이 대조되는 강한 이미지로 비슷한 시각 상을 이루고 있는 듯하지만, 언어적이거나 확률적인 방식이라는,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논리적 장치가 작동된다. 선적 명료함, 그리고 절단과 연결이라는 방식은 기계론(machinisme)적이다. 그것은 구성요소 들 간의 상호작용들의 집합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기계는 단일한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되지 않으며 열려 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배치의 조합은 돌연변이와 변형을 향한다. 추상기계의 양상을 보여주는 김용관의 작품은 기계적 주체성을 전제한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추상기계는 현실의 다양한 수준을 횡단하고 지층들을 조립하거나 해체한다고 지적하며, [카오스모제]에서 기계적 주체화의 배치는 상이한 부분적 언표 행위들을 혼합한다고 말한다. 기계적 주체성은 집합적 성격을 지니며, 그것의 무의식은 모든 영역에서 접속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의 작품은 코스모스와 카오스가 모순됨 없이 결합한다.

2. 박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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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실사이즈의 마리오네트(Marionette)는 자동인형이나 꼭두각시에 내재된 인간 정체성의 문제를 야기한다. 자연적 태생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조립된 마리오네트는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움직여진다. 거기에는 지배와 복종이라는 음험한 통제사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통제는 일방적이지 않다. 그의 작품은 관객이 직접 시연해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지배될지 모르는 관객은 마리오네트와 연결된 끈을 이리저리 움직여 봄으로서 권력은 한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에서 작동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권력은 피지배 계층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생산됨으로서 유지된다. 만약 한쪽 극에서만 권력이 발생한다면 그 권력은 곧 무너지고 만다. 그의 작품을 구동시키는 줄들은 미시권력이 작동되는 미세한 망을 연상시킨다. 전기모터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팔, 다리, 손가락 같은 해부학적 기관들은 꼭두각시에서 좀 더 진보된 자동인형(automata)의 단계를 향한다. 크기는 제각각이어서 그 모든 기관들이 조합된다면 불균형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어긋남은 촘촘하게 구현된 ‘빅 마스터’의 거대 권력을 누수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따뜻한 질감은 피노키오 같은 동화를 떠오르게 한다. 피노키오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지만, 인간과 마리오네트의 구별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아니, 자동인형이라는 구상이 과학자들의 상상력을 지배했던 근대 고전과학 시대부터 인간은 자동인형으로 간주되어왔다. 세계를 정교하게 짜 맞춰진 시계장치로 생각한 뉴턴과 우주 전체를 신이 창조한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본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기계와 동격이었다.

데카르트는 [인간론]에서 ‘(인간)기계의 근육과 힘줄은 스프링 따위의 운동에 비교될 수 있다’고 말했다. 18세기의 의사 라 메트리는 시계공으로서의 신을 전제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반박하고, 보다 유물론적인 관점을 택하였다. 박종영의 마리오네트는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기계적 타자를 다룬다. 부르스 매즐리시에 의하면, ‘자동auto’이란 말의 어원인 ‘autos’란 그리이스어로 ‘동일’을 뜻하는데, 불어로 ‘나 자신’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라고 한다. 자동화된 인간은 항상 같은 질문--이것들은 인간과 어떻게 다른가, 요컨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야기한다.

3. 주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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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려진 인체의 장기들은 여러 방식으로 조합되고 펼쳐져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그것들은 2010년 3회 개인전 부제 그대로 ‘신체 없는 기관’들이다. 기관들은 꽃이나 산수화 같은 자연풍경을 닮았다. 작가는 의학서적 등을 참조하지만 그것은 변형의 출발점이 될 뿐이다. 정상적인 장기도 그 자체로 펼쳐놓으면 기이하지만, 주영신의 작품에는 눈이 심장으로 들어오고 뇌에 피가 고이며, 판막이 막힌 심장, 꼬이거나 지방이 쌓인 장 등, 비정상적이거나 병에 걸린 장기도 많이 등장한다.

다양한 장기가 관객 눈앞에 펼쳐진 방식으로 있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의사가 아닌 이상 정상/비정상을 구별하기는 어렵다. 활달한 필치에 의해 죽음의 파편들은 기이한 생동감을 가진 채 고동친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소우주에서 혈관계는 끝없는 이접(離接)의 매개가 된다. 혈관계는 장기가 연결되는 리좀적 방식을 매우 자연스럽게 연출하게 한다. 펼쳐진 장기들은 크고 작은 캔버스에 구현되어 벽에 설치됨으로서 신체 내부에 들어온 것 같은 전시공간을 연출하기도 하며, 핑크색 풍선을 이용해서 신장 주변의 혈관계를 설치형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주영신의 ‘신체 없는 기관’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외디푸스]에 나오는 ‘기관 없는 신체’를 떠오르게 한다. ‘기관 없는 신체’ 역시 조직되지 않은 유기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앙티 외디푸스]에 나오는 용법으로서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의 흐름을 억압하는 유기적 총체성에 대한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저자들에 의하면, 기관들 없는 이 충만한 신체는 비생산적인 것, 불모의 것, 태어나지 않은 것, 소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 위의 욕망을 유일의 주체로 간주한다.

이 욕망은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들을 작동시키고, 연결들과 점유들을 따라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들의 어느 하나를 다른 것에 의하여 채취하고 절단하며, 한 신체로부터 다른 한 신체로 옮아간다. 그리고 이때 연결들과 점유들은 소유자 혹은 점유자인 자아의 가짜 통일을 언제나 파괴하는 것이다. 주영신의 작품 속 기관들 역시 어떤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이 연결되는 관계성이 중요하다. 부분적 대상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흐름은 유기적으로 조직된 덩어리에 내재된 정체와 막힘을 경쾌하게 탈주하고자 한다.

4. 김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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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아는 묵직한 양괴로 공간을 물질적으로 점유하는 전통적 스타일의 조각을 벗어나 실과 줄 같은 비조각적 재료를 사용하여 형상을 만든다. 만든다기 보다는 3차원 공간에 그려진 드로잉 같은 성격을 가진다. 2차원적 드로잉이 여백을 포함한다면, 3차원 드로잉은 허공을 포함한다. 허의 공간을 조각 내부에 포함함으로서 빛과 조각의 상호관계는 보다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그림자는 통상적인 덩어리 조각처럼 바닥에 깔리는 것이 아니라, 조명 방식에 따라 벽과 천정으로 변화무쌍하게 확장된다.

그림자는 본래의 형상을 약화시키지 않은 채 상호적으로 작용한다. 줄과 선으로 엮인 작품들은 엄청난 육체노동이 투여되는 전형적인 아나로그 형 작업이지만, 전자식 네트워크에 내재된 탈물질성 역시 두드러진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긴요한 소통을 위해 새로이 길을 내는 미지의 몸짓들이다. 그것은 단번에 그려진 동양화적인 유려한 선이기 보다는 거듭해서 그어지면서 형상을 찾아가는 그러한 선이다. 거기에서 이미 확정되어 있는 선은 없다. 매 순간 상황 속에서 무형의 공간을 더듬어가야 하는 지난한 반복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조각 예술의 근본적인 질서를 이루는 인간이라는 동일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 속의 차이에서 형성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조각의 출발점이 아니라, 목적지에 놓인다. 전래의 확신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 찾아내야 하는 미지의 것이 바로 인간이다. 네가티브 스페이스인 허(虛)의 공간을 포함할 뿐 아니라, 스스로 온전히 서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타자적이다. 그것은 단지 외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아로 새겨진 이질성을 전면화한다.

현대조각사에서 선적인 조각은 용접의 방식을 통해 진화해왔지만, 김윤아의 선 조각은 그러한 견고함조차 가지지 못한다. 장소 특정적이지 않은 작품의 경우, 줄을 지탱하기 위한 지지대만이 공간에 서있을 뿐이다. 애써 만들어놓고 퍼포먼스를 통해 뭉개버리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은 대상보다는 관계성, 결과보다는 과정에 방점이 찍힌다. 전통적 조각의 기준을 벗어나지 않은 채 한 장소에 죽 늘어놓는 것이 설치미술로 통용되는 현실에서, 김윤아의 작품은 현실 자체를 지지대로 하여 그 내부로 관객을 들어올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설치미술이 나타나야 했던 본래적 이유를 분명히 한다.

5. 강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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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4년 4개월 여 간을 식물인간으로 살다 가신 아버지의 죽음은 강숙진의 작품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말라 죽어가는 식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그녀의 작품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에 대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이 직시해야만 하는 상황은 잔혹하다. 작가는 삶 자체가 잔혹하다고 생각한다. 작품 [broken maria]는 나약한 인간을 품어주는 마리아가 깨지고 상처나 있다. 그것은 어디에도 기댈 바 없는 심리적 공황상태를 보여준다. 훼손된 마네킹의 형태 역시 시들어가는 식물이나 조각난 성상과 같은 맥락에 있다.

서서히 타들어가는 모습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식물이나 마네킹에는 불이 붙여진다. 삶의 과정 자체가 연소, 즉 태우는 과정이다. 유기체는 에너지를 태워 생명을 연명하는 기계이다. 작가는 여기에 불을 붙여 태우는 과정에 가속도를 붙였다. 삶에만 강조점이 놓여있는 현대는 삶과 죽음을 분리한다. 죽음은 병원이나 장례식장 속에서 형식화되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급작스런 사건에 의해 죽음이 삶에 엄습하기 까지 현대인은 죽음을 괄호치고 산다. 그것이 심리적인 면에서도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숙명론을 거부한 낙관주의자들, 가령 고대의 유물론자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현존하지 않으며, 죽음이 현존하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산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장 살렘)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지상의 기쁨에 대한 가장 큰 낭비’(모파상)로 간주된다. 그러나 진실에 있어서 삶과 죽음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다. 작가에게 닥친 불행한 현실은 삶의 진실을 보다 적나라하게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삶 속에 내재된 이질성, 곧 죽음이라는 모호한 진실은 작가로 하여금 ‘표면으로는 알 수 없는 이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공포, 알 수 없는 진실들에 대한 갈망과 공허’를 느끼게 했다. 무의미와 부조리에 대한 의식은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모든 것을 비활성 상태의 동질성으로 환원시키는 잿더미로의 해체는 에로스의 반대편에 놓인 타나토스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생물이 자신이 출발했던 무생물(비유기적)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죽음의 욕동이 꿈틀거린다. 죽음의 이미지는 삶 속에서 야기된 견딜 수 없는 긴장감의 파국적인 해소를 통해, 때로 카타르시스와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

6. 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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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을 때는 단번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기도’ 하지만, ‘평범한 날이 더욱 많다’는 윤지영은 삶속에서 건져낸, 소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진실에 작품의 뿌리를 대고자 한다. 작가는 반갑다고 흔들어대는 시골집 강아지의 꼬리 끝이나 바람에 날리는 난의 잎 끄트머리에서 동양의 자연스러운 붓질을 발견하며, 시골에 흔해 빠진 파 꽃, 도라지 꽃 등에서 작가에게 전해오는 전파를 느낀다.

작가는 꽃잎을 둘둘 말은 채 떨어진 무궁화 꽃 주변에서 어떤 숨겨진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닌 가 실없이 의심하며, 자연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말에 대답하려 애쓰는가 하면, 사랑하는 이와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욕망도 숨기지 않고 그린다.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대소사 모두가 그림의 대상이 되며, 그림은 차후의 보고가 아니라, 진행 중인 삶의 지표가 되어준다. 나날의 반성과 성찰이 담겨진 그것은 그림일기와 비슷하다. 윤지영의 그림에는 글이 내재해 있다. 그림 속의 글은 요즘 유행하는 칼리그래피처럼 조형적이면서도 운치 있다. 작품 [언니는 요리사]나 [개집]에서는 글자가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이미지를 형성하는 필획과 구별될 수 없는 글자체는 동양의 시서화의 전통을 떠오르게 한다. 형상이든 글자이든, 거기에는 어눌함과 느슨함 속에 내재된 순간적인 각성이나 성찰 같은 것이 있다. 주어진 시간에 집약적으로 행해지는 직업이나 노동으로서의 작업이 아닌, 삶의 길을 따라 가면서 접하는 주름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진다. 윤지영의 작품은 주어진 목표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경쟁적 삶이 아닌, 소요와 성찰의 나날을 소박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인간과 마주해 걸리는 대상으로서의 그림은 필연적으로 중요하고 기록될만한, 또는 무의미해도 최소한 볼만한 무엇이 있기를 요구받는다. 그래서 현대의 스펙터클은 그렇게도 장황하고 자극적이며, 더 배고프고 목마르게 할 뿐인 가상의 포만감을 준다. 그러한 시각 환경에 비한다면 윤지영의 그림은 소박한 시골밥상 같다. 헛배부르게 하는 불필요한 자극이 없다. 거기에는 볼만한 것, 읽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원래의 자연스러운, 그래서 진짜 행복한 삶이 그러한 것처럼 굴곡이 없다. 거친 명암과 화려한 색채, 왜곡된 형태가 없다. 그것은 질주하는 현대적 삶에 작가가 제안하는 쉼표이다.

7. 김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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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리의 작품에서 조각 및 현실질서의 근본이 되는 인체는 서서히 침식당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인체의 공간적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집 역시 그러하다. 2008년 ‘조용한 침범’전에서는 전시장 바닥으로 몸의 일부만 남긴 채 심연으로 가라앉는 모습이나, 벽에 흙으로 드로잉 한 거대한 지문이 말라서 떨어지는 작품은 시간 속에 과정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마른 흙덩어리들은 물이라는 원소가 가해짐으로서 서서히 해체된다. 인간은 원래의 무기물로 되돌아간다.

형상을 만드는 것은 작가이지만, 이후의 과정은 자연의 물리력에 내맡겨진다. 우주에 작용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은 인체 형상의 무너짐으로 보다 직관적으로 감지된다. 거기에는 삶의 극점에 놓인 죽음으로의 직행이라는 비극적인 코드가 아니라,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동양의 순환적 원리가 나타난다. 비슷한 방식으로 집을 서서히 침식시킨 근자의 [휘경(揮景)] 시리즈는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벽돌의 연립주택을 축소하여 흙으로 재현한 것이다. 점토 주택은 물에 반응하여 아래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기우뚱한 모습은 마치 침몰하는 배처럼 위기감을 준다.

김주리가 만든 집은 단단한 지반 위에 세워진 지상 위의 안전한 거처라는, 집에 대한 원형적인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대량으로 지어졌고, 곧 재개발에 헐려나가야 하는 너무나도 단기적인 전망 속에 배치된 집단 주택들이다. 지나치게 미래를 앞당겨 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집들은 그 자체가 곧 사라져야할 살아있는 화석이나 유물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무너뜨리지 않아도 이미 무너지고 있다. 작가는 그러한 물리적 심리적 과정을 예술이라는 수단으로 가속화시킨다.

시간을 빨리 돌려 파괴의 과정을 보다 극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작가는 가속화된 죽음, 즉 짧은 순환 주기를 가지는 공간의 파괴 속에서도 뭔가 생겨나는 것을 발견한다. 고고학은 당시에 가장 흔했던 것이 나중에는 가장 희귀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작업의 출발이 된 휘경동 같은 재개발 단지나 철거지구의 주택들은 서민들이 생활 속에서 발명한 장치들이 산재되어 있어, 도시를 배회하는 고고학자로서의 예술가에게 발견의 기쁨을 준다. 매순간 허물어지는 김주리의 작품은 그렇게 사라지는 삶의 흔적을 예술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잠시나마 붙잡아둔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출전 | 2011 아르코 미술관 전문가 성장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