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 흩날리는 시뮬라크르

류호열 전 (3.24--4.11, 빛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키 큰 나무의 꼭대기에서 부는 바람에 온 몸을 맡기는 나뭇잎들의 움직임은 장관을 이루곤 한다. 특히 다음해의 재생을 위해 빨리 잎을 떨구라고 재촉하는 가을 녘 찬바람 소리는 아직 가지에 남아있는 잎들의 바스락거림을 비장하게 들리게 한다. 높은 곳의 잎 새 하나하나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그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올라갈 것만 같다. 거대한 기둥으로부터 분지된 줄기에 붙어서 하나하나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곤 하는 잎 새들, 그 바람에 몸을 맡긴 거대한 나무는 하나이자 다수라는 이미지가 있다.

바람을 안은 나무는 정지에 가까운 식생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 물활론적 활기로 가득하다. 지상에 뿌리박고 있으며 천상을 향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잔가지들을 펼치는 나무는 그 인상적인 크기와 형식으로 인해 인간, 나아가 신과의 비유를 멈춘 적이 없다. 3D로 만들어진 류호열의 창백하게 탈색된 인공생명체들이 나무와 맞대면한 인간의 공감각적 체험을 오롯이 구현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벽면에 크게 투사된 풍경 뿐 아니라, 아크릴 박스 안에 설치된 작은 모니터에서 나오는 장면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효과는 작가의 자연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시키는 기제, 즉 자연의 복잡한 움직임을 시청각적 차원에서 정교하게 시뮬레이션 하는 기술의 힘이 클 것이다. 소리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계적 회로들이 노출된 작품은 새로운 기계 문명 속에서도 자연의 맡을 막중한 역할을 보여준다. 디지털 프린트 작품은 보다 서사적이다. 지평선을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 기념비적 인간 형상은 자연과 같은 원소로 합성되어 있다. 그러나 쓰레기가 가득 쌓인 언덕에 사람 형태들도 보이는 작품은 인간문명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낙관적이지 만은 않다. 인간과 가장 밀착된 가구인 의자들은 공중에 붕 떠서 공기 입자처럼 흩날린다.

자연, 인간, 그리고 사물은 같은 원소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연속성이 강조된다. 모든 작품의 배경으로 깔린 푸른 하늘은 인공 생태계에서 합성된 빛과 공기의 흐름을 더욱 시적으로 만든다. 바람에 떨어져 나가는 나뭇잎은 먼 곳으로 보내는 편지처럼 보인다. 류호열의 작품에서 푸른 하늘에 상응하는 지상적 존재는 바다이다. 작품 [meer]는 레고 또는 벽돌 같은 입자로 이루어진 파도들이 출렁거린다. 입자들이 춤추는 바다는 지상의 여러 존재들을 두루 보여주겠다는 구색 맞추기보다는, 이 전시의 중심 이미지인 나무에서 파생된 것 같다.

바람을 가득 맞고 있는 나무에서는 바다 소리 같은 것도 나기 때문이다. 나무는 무엇보다도 산소를 배출하는 역할을 통하여 공기와 밀접하다. 나무는 지상의 모든 것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 존재로서, 인류 문명에서 으뜸가는 우주적 상징으로 나타난다. 밝고 빛남이 강조되어 있는 류호열의 나무는 자크 브로스가 [나무의 신화]에서 말하듯이, 나무들이 삼(三) 세계, 즉 바다 깊은 곳과 땅의 표면과 하늘을 서로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특권을 부여받았음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재생하여 살아있는 우주를 구현하는 나무는 하늘과 가장 가깝게 닿아있는 생물체로 땅과 하늘을 서로 연결시켜 신들이 다니는 통로의 역할을 했다.

나무의 수직의 축은 ‘지상의 조건을 건너뛰는 상승의 역학’을 보여주며, ‘높이를 지향하는, 하늘을 향한, 빛으로의 길’(로베르 뒤마)을 가리킨다. 빛과 공기에 반응하는 나무는 해방을 향한 비상의 이미지를 내포한다. 그의 작품은 종교의 토대가 되었던 나무의 근본적 상징주의가 내포되어 있지만, 그것을 구동시키는 틀 또한 숨기지 않는다. 예술 언어를 비롯한 상징 자체가 인위적인 산물이며, 오늘날 이 과정을 총괄하는 대표적인 장은 가상공간이다.

탈색된 자연, 인간, 사물은 이러한 인공성을 강조하기 위한 거리두기 장치로 보인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원소로 세계를 환원시키는 그의 작품은, 오늘날 게임이나 영화를 비롯한 오락의 영역에서 현란하게 발전하는 실제 같은 눈속임 기술보다는, 사물의 근본적인 운동 법칙, 가령 원자론과 더욱 닮아있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나타나는 것의 근원들 또는 제1물체들, 즉 원자들은 무한한 허공 안에서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보는 고대 원자론을 소개한다. 원자는 색도 냄새도 맛도 없다. 물질적 미립자인 원자는 유비적으로 세계를 이루는 일종의 모듈이 된다.

류호열의 작품에서 하얀 입자들이 그 모듈이다. 또한 원자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허공의 존재였다. 이 허공 덕분에 물질원소들은 쉼 없이 운동할 수 있다. 텅 빈 공간의 무한성 안에서 원자들의 결합과 배치 덕분에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무(無), 공(空), 영(zero)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작품 [null]은 2미터 높이의 금속 틀 속에서 공형태의 LFD가 주기적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물질입자들이 영원히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인 허공을 상징한다. 이 허공을 매개로, 대상의 표면에서 계속 흘러나와 사방으로 흩날리는 시뮬라크르는 자연의 힘과 현상을 감지하게 한다.

출전; 미술세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