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미술평론가)
얼마 전 전시 오프닝 때문에 인사동에 갔다가 종로구 노점상들이 인사동 사거리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보았다. 새봄을 맞아 환경 정비를 위한 구청의 일제단속에 대한 반대 투쟁이었는데, 생존권 사수라는 내용의 펼침막 옆에 ‘반값 등록금 실현하라!’는 펼침막이 함께 있는 점이 특이했다. 시위 대중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전 같으면 노점상을 할 정도의 경제 사정이면 대학 등록금의 문제는 다수의 이슈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전문대 이상의 학력이 50%를 넘었고, 현재는 전체 국민의 80% 이상이 고등교육을 거쳐 가니, 등록금 문제가 극소수 사회이탈자를 빼고는 보편적인 문제가 된 것이다. 대학교가 전공 공부는커녕, 취업 준비소가 된지도 오랜 지금, 예체능 분야의 경우 한 해 천만원이 넘는 등록금의 실상에도 불구하고, 투자 대비 효과가 이전보다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 대신 꼭 학자가 되지 않을 사람도 석사, 박사, 그런 것이 있다면 천사까지 가방 줄을 무한대로 늘리 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현대의 생산력이 정보와 지식으로 방점이 이동되고 있으니만큼 많이 배워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모든 부담이 개인에게 지워지는 것이 문제다. 먹고 쓰는 것에만 과소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 졸업생의 취업률도 열악하지만, 직무 수행을 위해 대학생 사교육비까지 요구되는 취업용 지식이 실무에 얼마나 유용할까. 직업 현장에서 요구되는 것은 회사, 또는 현장에서 배워야 하며, 그 비용 역시 기업이 맡아야 한다. 더 나아가 미래의 생산력을 책임지는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은 사회가 부담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학력 자본에 의한 차별이 없어야 하고, 공익사업은 커녕 학생 등록금으로 졸업증 장사나 하는 있으나마나 한 대학들도 대폭 정리되어야 하며, 공적 기금으로 공부를 한 이들은 지식의 공공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현실은 모두가 반대이다. 이 땅에서 학교가 필요는 하다. 줄을 대기 위한 인적 네트워크, 어릴 적의 사교육부터 시작된 ‘스펙’ 용 무한투자가 가능할 정도의 경제력, 나아가 이 모든 억압적 과정을 견뎌내는 인내력 등등은 이 땅에서의 현실 적응을 위한 필요 품목이고, 이 모두는 학교를 매개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이전이 좋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70-80년대는 대학진학의 문제가 전 국민을 압박하는 보편적인 근심거리는 아니었다. 누구는 여상을 졸업해서 은행에 취직하고, 누구는 관련 학과를 마치고 어렵지 않게 학교 선생님도 되곤 하였다.
가계 소득에서 공적/사적 교육비의 부담이 매우 커짐으로서, 교육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합의하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엥겔지수처럼 생활수준의 저하를 야기하는 악재이자 필요악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만들어 경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여기에 근대 이후부터 대규모로 자연을 착취한 결과가 맞물려 위험사회를 넘어 재앙사회가 다가오는 지금, 실효성도 없이 사회 구성원 전체를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사안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제거할 수 있다. 막을 수 있는 재앙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피차가 다 알고 있는 이 진실이 왜 실행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알뛰세적 용어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학교는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차별의 정치가 가장 장기적으로 가장 철저하게 생산되는 곳이다. 사회의 지배세력은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을, 피할 수 없는 도전을 받지 않은 이상 포기해 본적이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대학교는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곳이 아니라, 소수에게 이익을 집중시키는 합법적인 기구이다. 80년대에는 민주화 투쟁을 위해서 학생들이 죽어간 반면, 30년이 지난 지금 스스로를 미국사람으로 만들지 못해서 자살한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문화 운동은 대학교 안가도 되기 운동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운동이 활성화되면 원래부터 자기 하고 싶었던 것을 열심히 해왔던 예술가들의 지위는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아트 와이드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