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디 최 전 (4월 14일부터 5월 14일, PKM Trinity Gallery)
이선영(미술평론가)
‘후기식민주의(post-colonialism)의 두 번째 장’이라는 부제로 열린 코디 최 전은 지구촌 시대에 더욱 가까워진 지역들 간 사이에서 파생되는 권력 관계를 문화비평적 관점으로 보여준다. 20대 초반에, 처음에는 사회학도로 미국에 건너가서 그곳에서 근 사반세기를 작가이자 미술교육자이며 문화이론실천가로 살아온 그에게 문화들 사이의 간극과 충돌에서 빚어지는 현상이 주제화되는 것은 거의 자연스럽다. 뉴욕이라는 곳이 현대 세계의 수도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며, 몇 년 전 귀국한 그에게 세계화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 역시 그러한 충돌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은 남의 문제기보다는 철저히 그 자신의 문제에 속한다. 개인의 문제가 보편의 문제와 중첩되는 점은 어쩌면 작가로서는 행운이랄 수 있겠다. 이 전시는 ‘선물’, ‘무화된 의식’, ‘극동의 왜곡’ 시리즈로 분류된다. 2006년부터 2009년 사이에 제작된 ‘선물(The Gift)’은 천에 출력된 금발 미인 이미지가 작은 실내화 위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작은 실내화에는 조악한 짝퉁처럼 나이키 로고가 새겨져 있다.
작고 하얀 얼굴에 눈부신 머리칼을 가진 늘씬한 서구적 미의 이상과 안쓰럽게 찌그러져 있는 작은 신발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극대화한다. 선물이라는 제목은 어디선가 뚝 떨어져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신의 구조를 내포한다. 그의 작품에서 현대의 소비 사회를 원시부족의 미신과 연결시키는 것은 화물 숭배(cargo cult)이다. 이러한 미의 이상은 문화적 식민지에서 얼마나 거대한 산업들을 낳고 있는가. 2010년부터 2011년에 제작된 ‘무화된 의식(Zero-Consciousness)’ 시리즈는 잡지에서 잘라낸 이미지들을 꼴라주한 작품이다. 카페나 미용실, 병원 등지에 시간 때우기 용으로 비치된 잡지들은 대부분 광고로 채워져 있어, 다양한 이미지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균질적으로 보인다. 일그러진 하트 모양으로 붙어있는 모습은 이미지 포화상태에 있는 현대문화에 대한 작가의 비판을 예시한다. 마치 토사물이나 쓰레기를 뭉쳐놓은 듯한 과도한 이미지의 꼴라주는 소화가 되지 못한 음식물,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배출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화될 틈 없이 사용될 틈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품-기표들은 인간의 마음을 황폐화 시킨다.
이미지의 무차별적인 공습은 개인의 시공간을 끊임없이 잠식하고 몸에 들여보내면 보낼수록 갈증을 일으키는 속성을 가진다. 하트 콜라주와 연결된 작품으로 구식 타자기로 타이핑 된 글자들이 있는 작품은 zero-consciousness라는 단어의 무한 반복과 지우기를 통해서, 말 그대로 의식의 영도를 보여 준다. 이미지는 비워져도 계속 채워지며, 인간을 통과한다. 기표의 쇄도가 가능해지는 것은 그것이 대상이나 의미의 무게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쇄도는 정신분열증을 유발한다. 2007년에 제작된 [착란 유발자; 마음으로 읽는 회화]는 red라는 글자를 초록색으로 쓰고, black 이라는 글자를 빨간색으로 씀으로서, 기호를 인식하는 과학적인 좌뇌와 색을 인식하는 예술적인 우뇌의 역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작가는 이 이미지를 명품 가방의 무늬로도 사용했는데, 단순한 자연적 욕구를 넘어서 끝없는 욕망을 부추키는 쇼핑, 그것을 추동하는 힘은 이처럼 가벼워진 기표임을 드러내고 있다. 2010년부터 2011년에 제작된 [극동의 왜곡 (Far East Distortion)] 시리즈는 근거 없기를 요구하는 현대문화의 반대편에, 작가가 대안의 논리로 탐구하는 중인 노장사상이 등장한다.
화려한 네온 빛에서 화려함을 자제하고, 악필에 가까운 작가의 필체를 살려서 자연에 근접한 문화를 보여주고자 한다. 낙서처럼 쓰여진 말자체가 재미있는 이 작품은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갔던 장자(莊子)의 내편(內篇)에 나오는 내용을 영역하고, 이를 다시 한국어로 썼다. 여러 단계의 번역을 거치는 동안 원전의 내용은 더욱 시적으로 변화했다. 언어를 소재이자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개념미술가로서의 코디 최의 뿌리를 드러냄과 동시에, 앞으로의 대안적 지향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에 배어있는 냉소주의가 약화되어 있다. 현대에 지친 지식인 및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노장사상은 자기 식의 해석에 넉넉한 여유를 부여한다. 그것은 인생자체를 규정하는 역설을 모순 없이 수용하고 해석한다. 코디 최는 자신의 작업의 가장 큰 틀을 문화충돌이라고 말한다. 그가 20대 중반에 만든 작품 [golden boy poster]는 성인이 다되어 미국에 가서 겪어야 했을 순탄치 않은 과정을 만병통치약 선전 같은 형식으로 표현했다. 작가가 들고 있는 분홍색 약은 우리나라로 치면 활명수 같은 것으로, 체함을 치료하기 위해 몇 년 동안 계속 복용할 수밖에 없었던 소화제이다.
그것은 한 문화를 체화하기까지 정신은 물론 몸이 겪어내야만 했던 고난을 표현한다. 낯선 문화에의 적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기 때문에, 익살광대 같은 웃음 뒤에 감추어진 눈물을 느낄 수 있다. 90년대 중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분홍색 소화액에 적신 휴지로 만든 작품 [the thinker, December#3]는 문화라는 것이 먹고 싸는 문제이며, 태변을 보지 못한 갓난아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생존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온 영혼을 영어로 적시기를 요구하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그의 작품이 여전히 코메디처럼 보일 수 있을까. 영어가 생존의 중요한 기준이 된 한국사회에서 그가 겪은 문화충돌은 역설조차도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그는 2002년 한국의 한 대학에 교환교수로 잠깐 오면서 그러한 문화충격을 다시 겪는다. 지구화시대에 이러한 충격은 거의 일상적 체험이 되었다. 라면 하나를 끓여 먹어도 거기에는 세계화가 있다. 수많은 원산지를 가지는 것들이 그때그때의 교환관계에 따라 손쉬운 소비의 대상이 된다. 그저 소비자의 입장에 있을 때는 간극과 차이가 주는 색다름은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생산자의 입장에 있을 때는 고통, 또는 이겨내야 할 고난 같은 것이 된다. 타문화에 대한 관광객 같은 입장과 그 내부로 파고 들어가 생존해야 하는 입장 차이는 크다는 것이다. 더구나 예술이라는 것은 생산 그자체가 아닌가. 그가 먹고 소화한 것을 확인하는 적나라한 장인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의 ‘무화된 의식’ 시리즈는 세계화 시대를 사는 소비자가 먹은 것들을 그대로 확인하게 한다. 상품화된 기표들은 병렬되는 것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틈 없이 빠르게 주파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상품이 그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한다면 그것은 소비 전략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소비를 추동하는 것은 즉흥적 충동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렇게 우리를 스쳐가는 기표들을 뭉쳐서, 그 시공간을 압축해서 우리 앞에 던져 놓음으로서, 어떤 각성을 요구한다. 적응, 더 나아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문화와 그렇지 못한 문화 사이에 낀 개인은 몸부림 칠 수밖에 없다. 특히 그 이질적인 문화가 헤게모니를 가졌을 경우, 문화 간 충돌은 잔인한 결과를 초래하는 권력 게임이 된다. 이러한 충돌이 악화되면 전쟁도 야기되지만, 승화되면 새로운 창조가 가능해진다. 충돌은 결국 중심과 주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중심과 주변은 인간의 마음속에도 존재한다.
거시적인 역사를 볼 때 비슷한 문명의 단계를 거쳐 왔던 세계는, 근대라는 결정적인 시기에 산업혁명과 식민지 지배를 통해 서구의 헤게모니가 관철되었으며, 그것은 후기 현대라 일컬어지는 현재까지 짙은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세계화는 강제적 복종 또는 자발적 합의에 기초한 지배관계를 낳는다. 근대시대에 개인의 해방이 노동자와 소비자 관계로서 재편되기 위한 자율화 과정인 것과 마찬가지로, 2차 대전 이후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한 식민지는 더 깊은 종속과 종속에 의존한 발전모델을 따라 ‘진보’해왔다. 이제 식민지는 그들뿐 아니라, 우리안의 서구인에 의해, 검은 눈을 가진 서양인에 의해 지배적 제도 속에서 우리 머릿속 부드러운 뇌 위에 건설된다. 동질화는 급속히 진행되고 있어서, 작가가 ‘최고급 한우 스테이크’라는 말에서 느꼈던 괴리감 자체가 이상할 정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동질화는 결코 민주화가 아니다. 지배 문화에 순조롭게 적응하기 위한 교란 요소들을 사전에 차단시키는, 어릴 때부터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의식화는 충돌을 충돌로 느끼지도 못하게 한다. 그것이 코디 최의 작품 ‘무화된 의식’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나 코디 최의 작품은 상품의 유통과 언어적 소통을 위해 강요된 코드의 동질화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초월적 삶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동질화의 추세 속에서도 차이를 감지하고 충돌을 충돌로, 충격을 충격으로서 보이게 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코드화가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는 곳 중의 하나는 사이버스페이스이다. 코디 최의 작품은 문화적 식민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90년대 말 그가 시도한 데이터베이스 페인팅은 곧 도래할 가상현실의 식민화를 예견케 한다. 현실은 점차 데이터베이스로 환원됨으로서, 가상공간은 점차 현실공간을 식민화 한다. 기술 언어적 인터페이스들은 새로운 규율을 만들고 동시에 통제한다. 무엇보다도 가상현실은 상품화를 절정으로 하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의 직접적 통로가 된다. 그는 아들이 유치원에서 샘플링을 이용해 그려온 호랑이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1997년부터 시작한 데이터베이스 페인팅은 [abstraktes bild]라는 제목으로 몇 년 전 pkm 갤러리에서 집중적으로 선보인바 있다. 이 시리즈는 웹상에서 맘에 드는 색깔과 패턴을 다운로드 받아서 수백 번의 층을 쌓음으로서 이루어진다.
컴퓨터는 RGB를 바탕으로 여러 색이 나오는 기제를 가지는데, 새로운 색은 기존의 색을 새롭게 쌓음으로서 만들어진다. 기본 소스는 얼마 없지만 계속 정보를 얹어서 진행되는 데이터베이스 샘플링은 어떤 추상화 못지않게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작업의 방식 자체는 오랫동안 민속 문화의 방법론이었으며, 미술사적으로는 20세기 초에 다다에서 시작된 꼴라주에서 기인한 방식이지만, 찢어 붙인 자국이 없고 무한 반복이 가능한 컴퓨터를 통해 꼴라주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abstraktes bild] 시리즈는 받아놓은 데이터는 10개 미만이지만 조합의 방식은 무수하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명멸하는 수많은 정보들이 0과 1이라는 디지털 형태의 산물임을 생각한다면, 그가 택한 소스도 적지는 않은 셈이다. 이번 전시작품에서는 [선물]이 천위에 출력한 방식이다. 확대된 픽셀은 여전히 추상적인 패턴으로 보이지만, 흐릿한 금발 미인의 이미지를 알아 볼 수 있다. 전체 전시의 맥락 속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 아래 찌그러진 작은 실제의 신발이 예시하듯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미지들은 현실에 실제적인 영향을 준다.
여기에서 실재는 ‘대기도 없는 파생공간 속에서 조합적인 모델로부터 발산되어 나온 합성물인 파생실재’(보드리야르)이다. 그것은 원본 없는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세계이다. ‘완벽한 복사본이 있는 곳에는 원본이 그리고 근원조차도 지워져’(블랑쇼) 있는 것이다. 컴퓨터로 그려진 코디 최의 그림은 사라진 지시대상들이 기호체계 속에서 인위적으로 부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1세기의 작가는 정보의 모사물(simulacra)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미술사에서 추상이 나왔을 때 그것은 자연, 인간, 역사들로 점철된 지시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지시적인 자율언어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이었는데, 오늘날 정보 혁명에 의해 지시대상이 사라져버린 의사소통의 방식 또한 비슷한 여정을 밟는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은 나름대로 전위적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이 미술을 초과한다. 코디 최는 회화가 심오함에 빠져서 시대의 추세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현대회화와 전자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 방식에 공통적인 것은 자기지시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지시성이 전적으로 자율적이고 중성적이기만 한 것일까. 게임의 모든 참여자가 정보를 입력하고 변화시킬 수 있지 못하는 이상, 거기에는 여전한 식민주의가 작동한다. 전시장 벽에 걸려 있는 흉측한 외곽선을 가진 하트는 사이버 거울 앞에 서 서 분열을 피할 수 없는 주체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주체가 분열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코디 최의 작품은 자기 의식적이고 자기 반성적이며 자기 비판적이다. 그의 성향은 1960년대 개념주의 1세대 작가들로부터 받은 교육의 영향이 크다. 현대 문화를 규정하는 다양한 코드의 의미 뿐 아니라, 자신이 탐구하고 있는 동양의 고전이 등장하는 이 전시의 작품 또한 개념적 성향이 강하다. 그것은 그자체로는 ‘불안한 오브제’(해롤드 로젠버그)이며, 미술 자체를 불확실한 것으로 몰고 간다. 개념미술가들에 의해 ‘예술의 조건은 하나의 개념적인 상태’(조셉 코주스)이며, ‘언어가 없다면 예술도 없다’(로렌스 와이너)고 정의되었듯이, 최종 산물보다 작가의 의도와 태도에 방점이 찍히는 개념미술의 주요 매개 변수는 언어이다. 언어학으로부터 출발한 구조/후기구조주의가 현대 인문학의 주류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코디 최의 경우 중심/주변에 얽힌 정치 경제적 언어, 사이버 언어, 대중 언어, 고전의 언어 등을 아우른다. 넓은 의미의 예술 언어라기보다는, 자신을 정리하고 관객에게 보내는 보다 직접적인 메시지로서 언어가 동원된다.
이 전시에서 장자라는 동양의 고전을 출발로 하여 여러 언어들 사이의 간극을 넘나드는 [극동의 왜곡] 시리즈는 상업광고에 사용되는 네온사인에 실려서 아무런 장식 없이 글자라는 날 것의 형태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뒤샹으로부터 시작된 현대미술의 개념적 성향은 편협한 취향에 근거한 명품으로서의 예술작품을 지양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주기적으로 부활되곤 하였다. 그러나 개념미술 또한 상품화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끝없이 희귀성을 만들려는 물신적 경향은 모든 것을 박물관에 안치시키는 포용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금 회화의 복귀가 이루어지는 등의 추세가 있어왔다. 개념미술이 탄생한지 반세기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개념미술이라는 꼬리표가 아니라, 새로운 개념의 창조일 것이다. 코디 최의 작품은 굳이 개념미술이라고 분류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감각적이며, 그 자신 자체가 머리보다는 가슴에 호소하는 작품을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대략 도사 같은 화두를 던져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짜 맞추기의 노동을 강요하는 썰렁한 스타일의 개념미술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경향은 아카이브 스타일의 장황함으로 관객의 피로감을 축적시켰다. 그것들은 단순한 견해의 제시나 주체할 수 없는 카오스로 전락하곤 한다. 반면 [abstraktes bild] 시리즈에 나타난 바와 같은 집약적인 노동은 코디 최의 작품이 하나의 개념에 대한 이론적 샘플이 아님을 알려준다. 개념의 차용이 아니라 창조가 되기 위해서는 동서공금의 백가쟁명적인 담론에 대한 자기 식의 소화가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성격을 가진 책에서 이러한 개념의 창조를 강조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개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되는 것이며 창조되어야만 한다. 개념들은 무한정 이어질 수 있으며, 비록 창조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무(無)로부터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 구성요소들은 여전히 변별적인 것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둘 사이의 미결정 상태의 무언가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행한다. 즉 a에도 속하며 b에도 속하는, 거기에서 a와 b는 서로 구별이 불가능하게 되는 그러한 ab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개념의 내적 일관성을 규정하는 것을 바로 이러한 지대들, 경계 턱 혹은 생성들, 이러한 불가분리성이다.
바로 이 지점이 현대의 작가들이 주목하고 기거하는 곳이다. 개념은 철학이나 과학과도 관련되지만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저자들에 의하면 철학은 개념들을 통하여 사건을 발현시키며, 예술은 감각들과 더불어 기념비들을 세우며, 과학은 기능들에 의하여 사물의 상태를 구축한다. 물론 세 개의 항은 서로 연결되며, 창조된 각각의 요소는 다른 이질적 요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과학마저도 비(非)과학과 관련맺음으로서 그 효과들을 반영시킨다. 예술 또한 비예술을 필요로 한다. 이미 현대 미술의 장은 미술이 아닌 것들로 포화상태이다. 코디 최는 지금의 문화상황이 19세기말과 20세기 초를 규정지었던 세기말 현상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판단의 기준이 사라진 상태에서 다양성이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배금주의가 자리 잡는 것이 문제이다. 강준만이 진단하듯, ‘미국보다 더 미국 같은’ 한국 사회에서 시뮬라크르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코디 최의 작품에서 개념은 이 구별 불가능한 포화상태에서 또 다른 길을 내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다.
월간미술 5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