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평한 세계에 바쳐진 조각
권오상 전 (5.6--6.2, 두산갤러리)



이선영 (미술평론가)


나무 프레임 안에 같은 크기로 출력된 [The Flat] 시리즈에 붙여진 전시제목 ‘Sculpture’는 조각의 본질을 자문한다. [The Flat] 연작은 다양한 잡지에서 오린 이미지를 가는 철사로 일으켜 세워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후 다시 촬영한 것이다. 작품 속 모든 것들은 종류를 불문하고 입간판처럼 세워져 배후에는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다. 그의 작품은 물질적 실체들을 대신하는 표면들이 최대한 활성화되어 있다. 최종 작품 자체는 이음매 없이 평평하다. 이 평평한 우주는 한계가 없으며, 숭고(sublime)하다. 작가가 이것들을 굳이 조각이라 칭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3차원 세계를 2차원적 평면에 투사한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를 평평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세계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 시장화는 세계를 평평하게 만든다. 현대 자본주의는 오지 소수민족이 만든 민예품부터 깊숙한 정글에서 수확한 희귀 열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을 질적 차이 없이 보편적인 가격 체계에 의한 교환가치로 환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오상의 작품에서 세상은 수많은 상품의 목록으로 치환되어 있다. 그것은 상품이 소비자에게 그러하듯이, 관객을 향해 쇄도한다. 신발이나 향수 같은 작은 것부터 차나 건축물에 이르는 거대한 것들이 얇은 공간 속에서 만물상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작품의 구성요소들은 매우 이질적이다. 건조하게 연도와 월로 붙인 제목들에서 아홉 작품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분류 원칙을 발견하기 힘들다.

일으켜 세워진 기표들은 장기판의 말처럼 이리저리 옮길 수 있지만, 말의 이동을 예견할 수 있는 게임 원칙은 불확실하다. 굳이 원칙을 찾는다면, 창세기의 신이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말한 것처럼, 단지 ‘보기에 좋았더라’ 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어떤 구조와 체계가 아니라, 그것들을 분절하며 끝없이 흐르는 물질적 배치에 속한다. 이러한 배치는 지도처럼 개방되어 있다. 그것들은 소유하고 싶은 충동을 들게 하는, 적어도 눈으로라도 소비할 수 있을 만큼 세부가 정확히 촬영된 대상들이고, 자체의 드라마를 전개하면서 화려하게 폭발하곤 하며, 평면적 꼴라주와 달리 기표들 사이의 구성이 더 자연스럽다는 공통점을 지닐 뿐이다.

각 기표들이 그곳에 꼭 있어야할 이유는 없다. 기표들의 호환성은 거의 무한대이다. 대상, 그리고 기의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표들은 그 자의성과 우연성으로 예기치 못한 연결망을 이룬다. 기표들은 마치 현대 물리학이 규정하는 입자들처럼 짧은 시간 동안만 고정되는 가변성과 유동성을 지닌다. [The Flat] 연작은 모든 것을 상품화시킴으로서 코드의 제국주의를 이룩한 자본주의에서 코드의 탈루 현상이 일어남을 보여준다. 예술로 친다면 의미와 형식 간의 긴밀한 관계를 전제하는 형식주의가 무너진다. 구조와 체계가 명확히 고정되어야 안심하는 이들은 이것을 무질서로 간주할 수 있고, 코드화 된 세상으로부터 해방을 열망하는 이들은 여기에서 욕망의 언어학, 즉 탈주를 발견할 수도 있다.

출전; 계간 조각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