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대중으로 짜여진 환상의 그물망



이선영(미술평론가)

송차영은 ‘보이지 않는 도시’전에서 그 안에 자리 잡고 살기 보다는 오직 통과하기 위해 존재하는 현대 도시의 빈 공간들을 찾아낸다. 작가가 이 빈 공간을 찾아내는 주요 매개 변수는 시간이다. 도시를 디지털로 재구성한 작품들은 시간을 가속화시키거나 이완시킴으로서 도시의 무의식을 발견한다. 스펙터클한 도시에서 보이지 않는 구석을 찾아내는 것은 어디에 소속되지 못한 채 편안함을 가질 수 없는 이방인의 시점이다. 지하철역부터 자신의 방에 이르기까지 친숙하다 못해 권태로운 장소들은 기괴한(uncanny) 곳으로 변모한다. 전시장 모퉁이를 축으로 삼아 대칭으로 배열된 2채널 비디오 작품 [Invisible City-the dead](2011)는 행인들이 드문 한적한 시간대의 종로 3가 지하철 역이 무대이다. 가운데서 갈라져 대칭으로 양쪽으로 후퇴하듯이 구성된 이 작품은 사람들이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 맞부딪히며 중심으로 함열(implosion) 된다. 맨 마지막에는 모두 희미해지는 입자로 확산되면서 단단해 보이는 현실은 공중분해 된다. 실제 속도는 40% 정도 느리며, 갈라져 나온 이미지들이 겹겹의 층을 형성하고 그것들이 흘러가는 가장자리는 흐릿해진다.

필름의 사운드와 다른 음원들이 믹싱 된 배경음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끝없이 갈라지고 사라지는 시공간은 그 곳의 사람들을 무중력 공간에 떠도는 유령처럼 보이게 한다. 작가는 공간에 레이어를 주고, 시간을 조절한 것 외에 특별한 변화를 주지 않았지만, 뻔한 익숙함은 균열이 가고 그 틈으로 심연이 드러난다. 그러나 양파 껍질처럼 심연의 핵심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거울처럼 마주 보이게 하면서 증폭된 도시의 반복적인 삶은 그 물질적 구체성을 휘발시킨다. 작가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도시 연작은 동명의 제목을 지닌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가지는 기하학적이고 대칭적인 구조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엄격한 체계에 따라 계획되었으나, 텍스트 내부는 다양한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주어진 시공간에 또 다른 템포와 층위를 줌으로서, 도시의 이면에 깔린 무의식을 풀어놓는다. 모니터로 나오는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에서 변형은 보다 다차원적이다. 다양하게 채집된 도시의 구성요소는 대칭 무늬가 되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13-14개의 레이어가 깔려 있는 복잡한 만다라 구조는 도시의 리듬을 가속화시켜 영원한 현재 속에 모아 놓는다.

밀집된 도시의 공간과 속도는 하나의 무늬가 되어 시야에서 명멸한다. 작가는 작품의 구성요소인 고층 빌딩, 자동차, 광고, 건설 현장 등을 도시가 가지는 욕망의 기호로 보며, 그것을 기하학적으로 재배치한다. 작품 [Invisible City-maze2](2011)는 동굴 같은 지하철 선로로 시작된다. 지하철을 구성하는 복잡한 기계적 구조물은 프로그램에 따라 나뉘어진 면에 배치되어 제각각 움직인다. 전체는 부분들로 잘려져 있지만, 각 부분들은 각각의 속도를 유지한 채 한 덩어리로 흘러간다. 서로의 모순은 해결되지 않고 병렬된 채 봉합될 뿐이다. 작품 [Invisible City-maze1](2011)은 불 밝힌 고층빌딩이나 어지러운 네온사인이 지배하는 야경을 소재로 했다. 영상에서 대칭적 구도의 중심에 존재하는 원은 도시를 총괄하는 감시자의 눈처럼 보인다. 그것은 각자의 질서를 가지는 것들에 동질적 리듬을 부여하려 한다. 원이나 사각형은 무정부적 이미지들에 강한 통일성을 부여하는 기하학적 요소이다. 한국에서 회화를 전공 했지만 뉴욕에서 디지털 아트를 전공한 작가는 컴퓨터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반복을 이용하여 현대문화를 반복적 패턴으로 재현한다. 종교적 성상에 가까운 완벽한 구도로 배치된 현대성은 그 경이로운 외면 이면의 불안을 드러낸다.

작품들은 작가의 말대로 ‘다층적 프레임 안에 차곡차곡 쌓여진 시간의 켜들, 그 공간화 된 시간의 틀 속에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덧없는 이미지들’이 정교하게 직조된 산물이다. 서사가 없고 몰입의 경험을 자아내는 자신의 작품들을 ‘무빙 픽처’라고 말한다. 대개 3-5분을 넘지 않는 영상들은 줄거리를 가지는 영화와도 다르고 시간성이 잠재적으로만 있는 회화와도 다르다. 그것들은 차라리 뮤직 비디오를 닮았는데, 작품에 쓰인 믹싱음의 몽환적인 분위기로 더욱 고조된다. 바쁘게 지나치는 도시적 일상 한가운데 똬리를 튼 몽환성은 뉴욕을 소재로 한 이전 작품에서 발견되고, 이번에 전시된 작품과 같은 정조로 서울을 재발견한다. 동일한 구조의 복제물로서 현대 도시는 세계 어디에서나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인 [promnade #1](2005)는 이방인으로서 겪은 도시의 초현실성이 발견된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검은 점이 출렁이며 거대해지는 얼룩은 접 붙은 듯이 또는 세포분열 하는 듯이 유동하는 뉴욕 지하철의 행인들이다. 100년이 넘은 낡은 지하철에서 만난 칙칙한 옷의 덩치 큰 외국인들은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데칼코마니 얼룩이 된 행인들은 괴기한 무늬가 되어 꿈틀거린다. 작가는 자신을 포함하여 도시를 유령처럼 떠도는 것들에 자신이 부여한 질서로 다시금 영토화하려 한다. 그러나 소외와 낯섦은 더욱 증폭된다. 그곳은 더 이상 어디인지 알 수 없으며, 사람들 역시 떠도는 점이나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 [promnade#3](2005)에서는 지하철 풍경이 보다 안정감을 주는 성당 같은 구조로 재배치된다. 성스럽게 들리는 고음의 배경음과 수직적으로 구획된 면들과 빛이 들어오는 듯한 창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점차 수직 띠의 두께가 달라지면서, 끝없이 열리는 문 같은 이미지로 변모한다. 처음과 끝은 불확실하고 과정만이 가속화 된다. 관료주의로 변질된 합리주의의 지배를 받는 현대인은 근본도 목적도 모르는 수단만을 부과 당할 뿐이다. 분열하고 다시 합쳐지는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하나의 점이나 얼룩으로 환원되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뉴욕에 비해 역사가 짧아 좀 더 깔끔한 한국의 지하철은 건조한 환상성이 지배적이다. 정박지가 아닌 과도적인 공간으로서 뉴욕이나 서울의 지하철은 현대성이 집약된 공간이다.

공항 또한 그러하다. 송차영은 이전 작품 [floating](2004)에서 공항 풍경을 속도만 조절함으로서 심해의 몽환경으로 변모시켰다. 무빙 워커를 타고 파노라마 식으로 쭉 훑어나간 영상은 지하철 작품에서처럼 부유하는 느낌이다. 전망이 보이는 곳에서 각자 홀로 시간을 보내는 대중들은 한 장소의 점유하고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익명으로 대상화되어 있다. 그들은 헤드폰을 끼고 있거나 핸드폰, 텔레비전, 창밖, 또는 책을 보면서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송차영의 작품에서 그들을 그곳에 배치한 공간적 힘은 더욱 압도적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비행기 때문에 더욱 작게 느껴지는 흩어진 대중들은 현대적 구조물에 끼어있는 부산물, 또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장기판의 말처럼 보인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공항이나 지하철 같은 장소는, 표면상 공공적이지만 특성이 모호한 비장소들(non-places)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 근대]에서 인용하듯, 비장소는 이방인들이 어쩔 수 없이 체류하는 곳이다. 비장소들에는 다양한 거주민들이 일시적으로 머물지만, 그들이 머무는 동안 모든 다양성들이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차이점들이 무엇이든 주민들은 동일한 행동 유형을 따라야 한다. 비장소들은 정체성, 관계, 역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 없는 공간이다. 역사적으로 오늘날처럼 비장소들이 그토록 많은 공간을 차지한 적은 없다. 이러한 비장소들은 통과 외에 아무런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따라서 차이점에 대한 조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빈 공간으로 나타나곤 하는 비장소는 일종의 잔여물같은 곳으로, 지배적 공간의 이면이 들춰지는 허약한 고리가 된다. 송차영의 작품에서 가장 친숙한 공간인 집 역시 비장소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전 작품 [chamber](2008)는 햇빛이 드는 화분들이 놓인 평범한 아파트 베란다 창을 찍은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숨 쉬듯이 앞뒤로 진동하면서 점점 겹이 늘어난다. 집은 괴기한 음에 실려 악무한의 회로로 변모한다. 진공 상태의 집 역시 작은 화분에 일시적으로 이식된 식물처럼, 존재가 깊이 뿌리를 내리는 곳은 아니다. 작가는 창밖을 보다가, ‘끝없이 닿아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시간대가 모두 다른 수많은 레이어들이 한데 쇄도하면서 그 안의 인간은 염두에 두지 않고 공간 자신만의 자율적인 운동을 진행한다.

친숙한 공간은 괴기하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다만 하루 종일 찍은 것을 빠르게 돌린 것, 즉 일상을 압축 재현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통과하는 곳도 개인이 홀로 머무는 곳도 아닌 다수가 모인 장소는 어떨까. 시간도 공간도 확실치 않은 희뿌염 속에 잠긴 [the isle of dead](2007)는 수많은 대중들이 모이는 스타디움에서 뵈클린의 [죽음의 섬]을 떠올린 작품이다. 작가는 선수와 관중의 에너지가 함께 폭발하는 그 곳에서 역설적으로 죽음과 같은 적막을 발견한다. 태양을 대신하는 강한 조명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환상을 자아냈고, 위아래의 구분이 사라진 채 인공조명은 분열과 함열을 거듭한다. 흩어진 힘들을 집중시키며, 최후의 한판을 기다리는 대중의 욕망으로 요동치는 원형 경기장은 삶과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경계를 와해시키는 묵시록으로 다가온다. 송차영은 도시의 장소들과 그 속의 대중들을 표현한다. 작품 속 도시와 대중들은 겉보기의 화려함 속에 단조로움을, 역동성 속에 지루함을, 친숙함 속에 기괴함을 숨기고 있다. 시공간을 떠도는 부유물로 나타나는 단편적 풍경들은 짜깁기 되어, 즐겁게 또는 고통스럽게 고동치는 무늬가 된다.

작가는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며,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라는 구절을 상기시키면서, ‘의미를 지닌 장소로서의 도시 공간’을 사유하고자 한다. 현실 이면의 비현실성을 찾아내 증폭시키는 송차영의 작품은 현실과의 거리두기 장치를 통해 다소 초월적인 시점을 내포한다. 그러나 철저하게 현실의 단편으로부터 출발하는 그녀의 작품은 추상적인 공간(space)이 아니라, 자리(plce)의 문제를 제기한다.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삶 자체가 바로 자리 잡기의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자리는 사건이 발생되는 곳이다. 자리가 확실하지 않은 현대는 진정한 변화와 무관한 가짜 사건들만 판을 친다.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서 ‘자리를 잡아주면 무언가가 발생한다’는 주제를 전개한다. 이 물리적 공간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의미를 부여한 곳이다. 그에 의하면 공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사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자리는 수동적인 용기(容器)가 아니라 인식의 능동적 산물이다. 인간이 위치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를 존재하게 한다. 미분화된 공간은 가치부여에 의해 자리가 된다. 그러나 현대는 구체적인 자리를 추상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 자리는 성과 속의 체계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아왔다. 물론 성과 속은 실체적(substantial) 범주가 아니라 상황적(situational) 범주로, 성스러움은 무엇보다도 자리잡기(emplacement)의 범주이다. 그것들은 지위의 구분이고 차이의 표지이다. 장소(topos)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도시적 질서의 전범이 되는 성전 안에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흐트러짐이 없는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차이(difference)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위기는 차이가 사라지는데 있다. 가령 현대는 성/속의 차이를 철폐한다. 철폐라기보다는 이전에 신이 자리했던 곳에 자본을 자리하게 한다. 자기가 속한 장소에 대한 의미부여를 가능하게 하는 자리잡기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자리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로 변모한다. 조너선 스미스는 종교의 진정한 힘은 이 불일치의 상황에 대한 사유라고 강조한다. 인간과 자본을 집중시키는 만큼이나 모순을 집중시키는 도시는 이 불일치의 상황이 펼쳐지는 극장 그자체이다. 그 간극과 틈들로 엮여진 송차영의 새로운 도시 풍경은 20세기 초 표현주의 회화 등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소외를 넘어선다. 현대인은 소외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소외를 겪었던 근대인의 경험을 넘어 분열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포스트 모던한 사회의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해체된 주체를 묘사하듯이, 도시는 환각 에너지로 충만한 채 신비롭고도 억압적인 정서의 돌진과도 같은 형태를 띄면서 거세게 펼쳐진다. 세계는 시시각각 깊이를 잃고 가식적 껍데기나 입체적 환상, 드문드문 이어지는 일련의 이미지로 바뀐다. 현대 도시적 삶에서 실재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 감각을 파편화되기 마련인데, 송차영은 그것을 더욱 가속화하면서 강렬한 현재적 체험을 자아낸다. 작가는 합리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기표의 인과적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유기체에게는 낯선 기계적 리듬을 부여하면서 몰입의 상태로 몰고 간다. 현대적 삶의 생산과 소비의 회전 속도가 그러하다. 그러한 견딜 수 없는 속도는 인간적 감각에 과부화를 건다. 작가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압도적인 현재 속으로 압축한다. 시뮬레이션 속에 도시의 기호들은 과거도 미래도 영원한 현재 속으로 함열 된다. 이러한 압축은 서사를 이미지로, 투사를 몰입으로, 주체를 욕망으로 변환시킨다. 그것은 동시에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가 추동하는 것이다. 현대의 매체 문화나 예술이 추구하는 강렬한 경험은 이전의 문화나 예술이 가졌던 어떤 의미나 상징, 표상을 추월한다.

도시 및 도시적 삶은 결코 중용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과도함을 요구한다. 이 영구적 도발 속에 인간은 불안하다. 도시적 삶 자체가 광기를 낳는다. 송차영의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이상함은 소외(alination)로부터 비롯된다. P. 브르노는 [광기와 예술]에서 소외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 ‘alienus는 타자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광인은 다름 아닌 불특정 타자 속에서 타자화 된 주체이다. 디지털 영상이 주를 이루는 송차영의 작품에 내재된 반복은 몽환적이고 싸이키델릭(psychedelic)한 경험이 있다. 이 영혼(psyche)이 보는 계시(delosis)는 때때로 경쾌하고 신비하지만 다소간 암울하다. 작품 제목에는 ‘죽음’이란 말이 종종 발견된다. 주변으로부터 고립된 자아가 누리는 환각적 경험은, 소외를 해결하기 위한 객관적 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한다. 주변과 구별됨 없이 하나의 무늬로 섞여 들어가는 동일화의 체험은 삶보다는 죽음의 본능에 의해 추동되며, 씁쓸한 각성을 낳는 가짜 환락을 낳는다. 입구와 출구가 분명치 않는 미로 같은 공간 속에서 악무한의 반복으로 영원화 된 현대도시는 그 속에 포박된 생명들의 에너지를 취하여 점점 거대해지고 자율화된다. 그것들이 자율화되는 만큼 인간의 자리는 더욱 축소된다. 송차영은 인공낙원으로서의 현대도시를 상상의 감옥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