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미술평론가)
연출에 바탕을 둔 광모의 사진은 전작에서 시간과 기록의 사이를 다룬다. 흡사 핀홀 카메라로 본 것 같은 어스름한 가장자리 처리가 오래되고 낡은 느낌을 주고, 동화적인 분위기와 함께 초현실적인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근작에선 주제를 <세 번째 이야기>라고 부쳤다. 현실과 연출 사이로부터 파생된 제 삼의 현실을, 일종의 연출된 현실을 다룬다. 세 번째 이야기란 주제는 옴니버스 식으로 연이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듯 제 삼의 현실감을 뜻한다. 직접 배우들을 섭외해 특정 장면을 연출하고 재구성한 일련의 사진들이 현실과 연출된 현실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종의 연출된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한다. 객관성과 기록성과 연출 사이의 긴밀한 상호관계에 주목하게 하고, 감각과 서사, 기록과 참여의 상호내포를 주지시킨다. 특히 작가는 이 사진들을 유리의 공간 혹은 유리구슬 혹은 토파즈블루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토파즈블루의 색감과 질감이 사진 위에 한 겹 덮씌워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중간계조의 색감과 질감이 일종의 비현실적인 느낌과 함께 관조적인 분위기에 감싸이게 한다.
김청진은 음식사진을 찍는다. 그렇다고 음식을 소재로 한 광고사진이나 더욱이 소위 맛 집을 순례하면서 음식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 공유하는 신세대 풍속도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작가는 음식을 다 먹은 연후에 미처 그 식기들이 치워지기 직전의 막간의 순간을 포착해 일부 음식 찌꺼기가 여실한 식기들이 되는대로 널려있는 식탁을 보여준다. 그 어수선한 식탁은 놀랍게도 일종의 부재를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즉 존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암시하는 것. 분명 가지런했었을 식탁이 마구 흩트려진 정경을 보면 미처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사건과 정황이 떠올려진다. 이를테면 화기애애한 분위기나 왁자한 분위기, 격렬한 논쟁의 회오리, 그리고 드물게는 술병이 공중부양 했을 싸움판과 같은 우발적인 상황이 감지된다. 먹는 습관 곧 식습관은 어쩌면 소모적인 욕망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고, 설렁한 농담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고, 허무한 일상의 속성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로써 이 일련의 사진들은 진부한 밥상이라는 일상성 담론과 함께 밥상으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자화상이며 사회적 초상의 또 다른 한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핀란드와 러시아, 일본과 한국 등지에서 채집된 소위 빅맨(햄버그) 시리즈는 음식 혹은 식습관으로 대변되는 지역적 풍속도의 차이(어쩌면 차이보다는 동일성. 그리고 그 이면에는 소위 정크 푸드를 세계에 배급하는 다국적 기업의 기획이 도사리고 있는)를 예시해준다.
디지털프린트와 페인팅을 중첩시킨 박선민의 일련의 작업들은 각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는 것>, <어떤 사람 혹은 존재> 시리즈로 나타난다. 먼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는 것>에서 작가는 일상적인 풍경에서 자연에 해당하는 부분을 원래의 컬러 그대로 살리는 것에 비해 나머지 풍경을 흑백의 모노톤으로 처리해 대비시킨다. 이로써 도시풍경에 비해 가로수와 같은 자연풍경이 실제보다 더 두드러지게 한다. 도시에서 접할 수 있는 자연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연 그대로가 아니다. 이식된 자연이며 인공자연이다. 작가는 이처럼 인간의 인식으로 해석된 자연이며 왜곡된 자연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리고 더러 버려진 쓰레기가 자연과 마찬가지로 원색을 덧입는 것으로 보아 도시환경에서 소외된 것들에게 상실된 존재를 되돌려주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사람 혹은 존재>에서 작가는 텅 빈 도로와 도로 변에 저 홀로 서 있는 앙상한 가로수를 제외한 나머지 풍경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가로수 곁을 지키고 있는데, 지킨다기보다는 우연히 포착된 장면에서 배경이 지워진 탓에 덩달아 오롯해진 경우로 보인다. 뭔가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같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도 같은 그는 홀로 남겨진 탓에 고독해 보인다. 원래 속해져 있던 맥락이 지워진 탓에 졸지에 낯설어져버린 그나 그가 처해진 상황이 흡사 <고도를 기다리며>의 상황극이나 그 무대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포토콜라주에 바탕을 둔 <군중> 시리즈에서 작가는 보도사진을 차용해 패턴화한다. 그 과정에서 일종의 탈맥락과 재맥락이 수행되는데, 이를테면 시위진압장면이 익명적인 군중의 일부로 편집되면서 원래의 상황논리가 지워지고 변질되고 흐릿해진다. 심각한 현실이 무성격의 익명적인 이미지로 변질되고, 구체적인 현실이 현실감을 상실한 채 한갓 추상적인 이미지로 화해진다. 심각한 현실과 익명적인 현실(이미지로 화한 또 다른 현실감), 구체적인 현실과 추상적인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가 부각된다.
그리고 종이 박스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서 엿보이는 작품 <군중 속에서> 나는 저마다 고독한 사람들과 맞닥트린다. 모르긴 해도 현실이라는 구체적 자장 속에 정박해 있었을 그를 막상 이렇게 따로 동떨어진 모습으로 조망해보니 그에게 잠재된 고독이 보이고 고립이 보인다. 작가는 아마도 군중 속에서 오히려 더 고독한 개인을 부각하고, 군중과 더불어서 오히려 더 고립된 개인을 조망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임윤수는 전작 <따뜻한 식물> 시리즈에서 늙은 노모의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해 찍은 사진 위에 각종 미세 식물 문양을 정교하게 자수로 수놓은 일련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사진을 오브제로 사용하는 경우가 이제는 합성사진만큼이나 흔한 일이 되었지만, 작가만큼 감각적이고 밀도감 있는 경우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마치 노모의 늙은 육체를 텃밭 삼아 그 위에 각종 화초를 키워낸 것도 같고, 흔히 그렇듯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서 탈피해 죽음을 육감적으로 감각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사진들이 두고두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근작 <꼬리 잘린 도마뱀은 어디로 갔을까>에서 작가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작업을 보여준다. 위급한 순간에 도마뱀은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다. 그러나 그렇게 잘려나간 꼬리는 분명 도마뱀의 일부였다. 그래서 그 부재하는 꼬리가 없이 도마뱀을 온전히 복원할 수는 없다. 도대체 도마뱀은 무엇이며, 도마뱀의 일생에서 잘려져 나간 꼬리 부분은, 지워진 부분이며 상실된 부분은 무엇을 상징하고 암시하는가.
작가는 2007년 일본에 유학하는데, 그 교과과정에는 지역공동체를 테마로 하거나 연계한 프로젝트가 포함돼 있다. 그래서 작가는 제일교포로서 한때 조총련 간부를 지낸 할아버지를 소재로 한 장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했다. 민단과 조총련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 삼의 단체(일명 코리아협의회)를 설립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다가 결국에는 무위에 그치고 아예 사무실 자체가 없어져 버린 전 과정을 담담하게 기록한 작품이다. 작가는 먼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그림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위에 투명한 비닐에 자수로 수놓은 텍스트를 걸었는데, 할아버지가 평소 즐겨 불렀던 노래로서 아마도 떠도는 영웅들을 노래하는 노랫말일 것이다. 투명한 비닐 소재 탓에 그 텍스트는 마치 허공에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깨지기 쉬운 신념과 신앙과 역사의식을 상징한다.
그리고 영상의 대부분은 코리아협의회를 설립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결국에는 무위에 그치기까지의 과정으로 채워진다. 협회 설립은 처음에는 호의적인 반응을 끌어내면서 순조롭게 시작하는 듯했다. 그랬던 것이 점차 꼬이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는데, 이를테면 할아버지의 확인되지 않은 빈번한 말 바꾸기와 공금횡령에 대한 불신이, 제 삼세대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괴리감이, 그리고 결정적으론 현지 일본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인 통일교가 과정 중에 개입되면서 논쟁을 키웠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허사로 되돌려지고 전에 사무실이었던 텅 빈 공간을 마주한 작가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역사)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이야기(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비전은 처음부터 현실이 아닌 이상에 속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상은 꿈꾸는 것이다. 그 꿈이 현실에 부닥칠 때 박살이 날 것임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현실원칙을 보여주지 않는다. 현실원칙에 부닥쳐 박살난 할아버지의 이상을, 꿈을 부각한다. 번잡하던 사무실이 텅 빈 공간으로 바뀐 것만큼이나 할아버지의 일장춘몽을 강조한다. 바로 그 일장춘몽이 도마뱀의 잘려진 꼬리에 해당한다. 그 꼬리가 없이 도마뱀은 도마뱀일 수가 없고, 도마뱀을 도마뱀으로 인식할 수도 없다. 도마뱀과 꼬리 잘린 도마뱀은 다르다(비록 잘려져 나간 부분이 복원된다고 해도 문제는 달라지지가 않는다).
나, 자아, 주체, 에고라고 부를 수 있는 손에 잡히는 실체는 있는가. 아마도 그가 꽤나 진지한, 그리고 더욱이 내성적이기 조차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 물음에 맞닥트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를 모르고선 너를 알 수가 없고, 너를 알지 못하고선 나를 알 수가 없다. 나와 너는 서로 깊이 연동돼 있고 연속돼 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이고, 너는 또한 누구인가.
한승구의 작업은 온통 이 물음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물음을 묻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나르시스의 신화를 피해갈 수는 없다(나르시스의 두 얼굴). 나르시스가 물 표면을 들여다본다. 검은 물이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해 그 표면에 나르시스의 상을 반영한다. 그런데 두 얼굴은 서로 일치하지가 않는다. 거울은 주체가 아닌 타자를 되돌려줄 뿐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나르시스는 그 타자와의 사랑으로 말 그대로 물에 빠져 죽는다. 여기서 물은 자기의 무의식이며 물에 빠져 죽는다는 것은 곧 무의식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다.
물이 거울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 표면에 비친 상은 주체가 아닌 타자이며, 의식적 자기가 아닌 무의식적 자기이며, 상이 아닌 반영상이다. 여기서 자기가 사회에 내어준 주체 곧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인 주체 곧 페르소나며 가면이 유래한다(거울 가면). 가면의 정체성은 익명성으로 나타난다. 비록 감각적 표면에 드러나 보이는 얼굴은 하나지만, 그 이면에 결코 손에 잡히지 않을 천의 얼굴을 숨기고 있다. 그래서 그 얼굴의 진정한 실체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다. 이런 사실을 증언이라도 하듯 얼굴은 점차 거울로 변해 더 이상 자기를 반영하지 않고, 그저 외부의 이미지 환경을 반영할 뿐이다. 이렇게 주체는 그 반영상 위로 증발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
이재헌은 회화 이전에 기계공학을 전공한 탓에 그림에 대해서 남다른 관점을 가질 수가 있었다고 한다. 선입견으로 결정된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 와중에서 작가는 그리는 행위 자체의 미학적 가치에, 몸으로 나타난 행위와 표현 자체의 가치에 눈 뜨게 되고,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의 자동기술법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가 그린 그림들(주로 자화상을 비롯한 초상들)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로부터 파생되어지는 긴장감이 감지된다.
이런 경계(분명하기보다는 불분명한)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와진 그림이 <더러운 그림> 시리즈다. 이 그림들에서 작가는 반 고흐를 연구하고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연구한다. 반 고흐로부터는 삶에 대한 태도와 보편적인 형상들, 존재의 변이와 혼란, 개념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캐내고, 리히터에게선 사진과 회화와 전자 이미지 간의 상호관계를, 그림의 물리적이고 유동적이고 불완전한 속성을, 저화질 이미지에 반영된 디테일이 지워져 삶(형태?)을 무화시키는 물리적 현상을 발굴한다. 그리고 이는 대상과 창작주체와 그림과의 거리감으로, 사진과 대상과 회화와의 거리감으로, 사진과 전자 이미지와의 거리감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고흐와 리히터를 재해석했다기보다는 작가의 그림 연구를 위한 실마리 역할을 한 경우로, 그리고 그 실마리가 불러온 암시를 덧붙이고 부풀려나간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주요 관심작가를 연구하고, 그 연구과정 자체를 통해서 자신의 작업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폭력의 역사> 시리즈에서 이 거리감은 이미지와 나와의 거리감으로 변주된다. 이를테면 이라크 포로 학대 사진은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 사진은 나에게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를 불러일으키고 윤리적 공감을 호소해 오는가. 그러기는커녕 그 사진에서 작가는 오히려 실제가 추상화되는 경험을 하고, 현실인식 자체가 모호해지는 경험을 하고, 중력이 약화되고 부유하는 경험을 한다. 이미지를 본다는 것, 그리고 그 이미지를 재현한다는 것, 그 경험은 오히려 거리감을 상실하게 만들고 추상적으로 만들어버린다. 마치 성적인 장면인지 폭력적인 장면인지가 아리송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소스(현실)가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은 것처럼, 그리고 그저 애매한 흔적만 남아 현실을 겨우 증언하는, 그것도 희미하게 그리고 흐릿하게 증언하는 것처럼. 작가는 그렇게 희미하고 흐릿해진 현실의 흔적을 그린다(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작가는 <달 위의 남자> 시리즈에서 아버지의 개인사를 다룬다. 전두엽 손상으로 기능이 훼손된 아버지는 이따금씩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생각 속에 빠져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만의 생각 속에 빠져있는 아버지는 무슨 낯선 사람 같다. 그 낯선 사람은 어쩌면 자기만의 생각 속에 빠져 자기만의 세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그렇게 자기만의 생각 속에, 자기만의 세계 속에 빠져있는 아버지를 달을 여행하는 남자 혹은 달 위의 남자로 은유한다. 그리고 그 은유로부터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본성을 캐낸다. 인간은 어쩌면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가 현실원칙에 부닥칠 때 고통으로 폭력적이게 되고, 다만 달을 여행할 때(현실원칙으로부터 일탈할 때 곧 자기만의 생각과 세계 속에 빠져 있을 때)만이 평화로울 수가 있다.
작가는 고통을 연구한다. 고통을 직시하고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그린 고통을 지운다. 그러면 고통이 지워진 자리에 고통의 흔적이 형상으로 남는다. 그 형상은 고통을 닮았는가. 그 형상은 고통을 증언해줄 수가 있는가. 그 형상은 고통과 상관이 있는가. 지우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생성되는 형상이란 무슨 의미인가.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이런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물음들을 파생시킨다.
원래 외모 콤플렉스에서 시작된 변윤희의 그림은 인간의 욕망을 주제로 다룬다. 엄밀하게는 욕망이라기보다는 욕구다(욕구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이며 생리적 현상인 것에 반해 욕망은 일종의 결여 내지는 결핍의식으로서 욕구보다 더 본질적이다). 이를테면 식욕 스트레스, 성욕과 배설 욕구 등 생리적 현상에 주목한다. 부연하면, 식욕 스트레스는 단순한 식욕에서 나아가 성욕과 같은 다른 욕망들과 만나진다. 이를테면 거식증 혹은 절식증과 포식증이 사실은 성욕 내지는 애정과 관련한 심리적 현상 내지는 징후의 표상인 경우가 그렇다. 그런가하면 제도가 욕구를 이용하고 조장하는데, 특히 욕구 혹은 욕망은 자본주의 기계가 돌아가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욕구는 개인의 차원(주로 억압과 관련한 심리적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넘어 대개는 사회적인 차원으로까지 감염되는데, 이를테면 남자의 권력이 흔히 자동차와 남근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통념이 그렇다.
욕구 혹은 욕망을 매개로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관계를 조망하고 있는 주제의식이 인간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의(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다)를 떠올리게 하고, 미셀 푸코의 성과 권력의 문제를 곱씹게 한다. 만화와 일러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회화적 형식에 암시적이기보다는 원색적인 욕망을 담아낸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서사성이 강한 편인데, 나아가 아예 일종의 이야기 그림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김동현은 에너지에 관심이 많다. 형태도 없고 색깔도 없는 에너지를 보고 만질 수 있는 에너지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물질의 변환 내지는 변질을 수행하는 중세 연금술의 현대판 버전이랄 만하다. 물론 여기에는 우주의 먼 별에서 쏘아 보낸, 미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에너지원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일명 오토포이 박사의 실험을 통해서 현실화된다. 이를 위해 주로 폐 장난감이 동원되기도 하고 그 형태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지기도 하는데, 그림이나 입체로 나타난 형태적 특징을 일종의 트랜스포머에서 찾아질 수가 있다.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고, 사실상 무한정 부풀려질 수가 있고, 자유자재한 변신이 가능한 형태며 구조다. 그 구조가 질 들뢰즈에 연유한 리좀을 닮았고, 오토포이 박사의 실험실이라는 가상적인 상황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허구적 서사 만들기에 연동되고, 전체적으론 생태문제에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