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미술평론가)
미학자 박이문은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이란 저작에서 생태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해놓고 있다. 즉 “생태계의 개념은 환경의 개념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두 개념은 모두 생명과 관계된다. 그러나 환경에서의 생명이 인간만을 의미하는 반면, 생태계에서의 생명은 모든 종류의 생명체를 말한다. 환경이 인간중심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이라면, 생태계는 생물 중심적인 생물학적 개념이다. 또한 환경의 개념이 구심적이거나 원심적인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나타낸다면, 생태계의 개념은 관계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정리를 하자면 환경이 인간 중심적 개념이라면, 생태는 인간보다 큰 범주 개념으로서 자연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생명이 환경과 생태를 매개시켜주고, 인간과 자연을 연이어준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의 차이는 어디에서 찾아질 수가 있는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천지불인에 그 답이 있다. 천지 곧 자연은 어질지가 않다. 어진 것은 다만 인간의 논리이며 개념일 뿐, 자연엔 개념이 없다. 개념은 인간의 발명품이며 인문학적 전리품이다. 인간이 자연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할지도 모른다. 자연은 인간보다 먼저 지구의 주인이었고, 모르긴 해도 인류가 멸망한 뒤에까지도 살아남을 것이다.
흔히 자연은 살아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은 현실과는 다르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사물화된 자연에 익숙하지, 정작 살아있는 자연에 대해서는 여전히 낯설다. 인간은 어쩌면 생명의 자궁인 자연으로부터 생명을 잠시 임대받아 생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어찌 알 수 있으랴. 자연은 카오스인데. 인간의 머리에서 발명된 코스모스는 카오스의 한 계기며 운동 원리에 지나지가 않는다. 그 생명의 존엄성을 인간의 머리로 다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김지하의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역설이 그 생명의 존엄성을 부연해줄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생명의 본성은 정적인 균형이 아닌 불안정성으로 기우뚱한 균형에서 찾아지고, 안정체제가 아닌 중심을 잡기 위해서 움직이는 균형에서 찾아진다. 그리고 원래 민중을 의미하는 함석헌의 씨알 역시 이런 생명의 본성과 무관하지가 않다.
전시 주제로 부친 <공존을 위한 균형>(고양아람미술관. 4.2-7.3)은 아마도 인간의 논리와 개념에 의한 일방적인 균형이 아닌, 자연과 더불어서 일궈내는 균형이며 상호 관계적인 균형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당연히 이런 생태계의 개념과 더불어서 생명사상이 놓여 있을 것이다.
무분별한 욕망과 건강한 욕망
사태를 단순화하는 감이 있지만, 한국현대미술을 1980년대의 이념의 시대, 1990년대의 몸의 시대, 그리고 21세기 들어서의 에코와 생태담론의 시대로 정의하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부연하면 1980년대는 순수미술과 참여미술, 제도권미술과 정치미술의 이념대립이 첨예했던 시대다. 그리고 1990년대는 정신과 관념, 그리고 순수이성으로 대변되는 소위 거대담론의 시대가 가고 그 빈자리에 유한하고 가변적인 몸을 중심으로 한 미시서사가 들어선다. 그리고 연이은 21세기에는 단연 생명사상이 화두다.
그런 점에서 자연과 더불어서 진정한 삶의 균형을 회복한다는 이번 전시의 주제의식은 이런 시대적 요청 내지는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경우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 성격이 본격적인 현대미술 관련전시로서보다는 환경을 주제로 한 엑스포 내지는 박람회에 가깝고, 그런 만큼 그 자체 교육적이고 계몽주의적 성격이 강한 편이다. 이를테면 위급한 생태문제 내지는 환경문제를 테마로 한 것인데, 현대미술이 간과하고 있는 지점을 건드린다는 점에서(내용적인 측면에서보다는 형식적으로), 예술과 일상이 만나지는 접점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꼭 필요한 전시로 볼 수도 있겠다.
부연하면 김성현의 <생태맹 측정표>는 색맹 측정표가 색맹 여부를 가리기 위한 것처럼 생태맹 여부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작업을 위해 차용한 색맹 측정표에 고유의 기호 대신 각종 곤충과 동물 기호를 숨겨 놓았다. 이 곤충과 동물들이 사라져 전설로 남은 먼 훗날 미처 그것들을 못 알아 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이경래의 <달고나- 달콤한 진실>에서는 달고나의 표면에 각종 동물 문양을 새겨 놓았다. 지금은 거의 잊힌 문화가 돼버린 달고나는 정작 어린아이보다는 어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서 작용하는 경우로 보인다.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모두 과거시제와 관련된다. 과거시제와 부닥치면서 달콤한 진실이라는 부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즉 인간의 탐욕을 위해 단물을 빨아먹다 보니 불현듯 자연이 고갈돼버렸다. 인간에게 자기를 다 내어준 자연이 빈껍데기만 남았다. 그래서 달콤한 진실은 달콤했던 진실처럼 들리고,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처럼 들린다.
또한 손채성의 <과자, 그 안의 진실>은 어린아이들이 무심결에 먹는 과자에 함유된 각종 화학 첨가물들을 텍스트로 써 놓았다. 어느덧 음식을 가지고 장난치는 어른들의 행태가 거의 매일같이 접하는 뉴스거리가 되었다. 유전자조작음식이 지구 반쪽의 식량난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만 다국적기업의 자기변명에 지나지가 않는다. 지구의 한쪽은 배가 터져서 죽고, 그 반대쪽은 굶어서 죽는다. 해법은 분배에서 찾아야지, 화학작용과 유전자조작에서 찾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유산자는 천연음식을 먹고 무산자는 화학음식을 먹는 미래가 그저 허무맹랑한 공상과학소설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나아가 온갖 성인병의 원인으로 지목된 소위 정크푸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으로는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거대한 순록 형상의 조형물이다. 고양시민들에게서 수거한 헌 옷이며 이불을 소재로 기워 만든 조형물로서 아마도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삶을 겨냥한 이번 전시의 주제를 특히 형식적인 면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아닐까 싶다. 순록이라는 특정 모티브도 그렇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광활한 스케일이 느껴지고, 그 자체 유목민의 그리고 유목주의(실제의 유목으로서보다는 의식의 유목)의 표상으로 와 닿는다.
그런가하면 한국은 미디어환경에 관한한 세계적으로 수위를 다투는 수준이다. 미디어와 개인과의 관계는 쌍방통행인 것 같지만, 거미줄처럼 네트워킹 되는 자기 확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표준화된 시스템과 한정된 콘텐츠 내에서 일어나는 일방통행이다. 이처럼 미디어가 일방으로 전송해오는 정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디어는 개인의 감각을 자극하고, 의식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들고, 판단과 가치관의 근거로까지 작동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그 정보를 근거로 웃고 울고 분노한다. 그 정보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정보가 알고 보니 조작된 것이고, 그 정보가 알려준 실제가 연출된 것이라면? 작가 진기종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린다. 일종의 가상 시스템을 통해서 실제는 가상임이 드러나고, 현실은 가공된 것임이 드러난다. 조작된, 연출된, 만들어진 리얼리티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트루먼 쇼에 출연하게 된 트루먼 버뱅크처럼,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가상현실이 미처 도래하기도 전에, 이미 진즉에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역시 작가는 세팅된 무대장치를 통해서 일종의 허구적 리얼리티를 연출하고 가상적인 현실감을 만들어낸다(항해). 암흑천지의 바다를 위태롭게 표류하는 배에는 아마도 빙하가 모두 녹아내려 지구가 범람하는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마지막 인류가 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 묵시록적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마지막 인류는 고립된 섬(이호인의 무제)처럼 우주의 미아며 지구의 고아로 남겨질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