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진 전 (4.12--5.22, 몽인아트센터)
이선영(미술평론가)
정수진의 그림은 늘 수수께끼에 가득 차 있다. 제목 또한 [무제]로 많이 정해져 있어 그림에서 뭔가 읽으려 하거나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은 거듭된 좌절에 빠진다. 그것은 블랑쇼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서 말하는 것’을 근대문학의 이상으로 삼은 것과 비교할만하다. 수많은 요소들이 동시에 웅성거리는 정수진의 작품은 소통의 투명성 보다는 이질성이 두드러진다.
불투명성, 물질성 등의 의미와 호환될 수 있는 언어의 이질성은 혼돈과 매혹을 동시에 낳는다. 종횡으로 분열되는 언어의 분산은 심층의 의미가 아니라, 존재의 표면에 주목하게 한다. 작가는 그 표면을 무제한으로 늘이려 한다.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는 중심은 없고, 함정처럼 여러 겹으로 드리워진 상호이질적인 표면들이 임의의 교차점을 형성할 뿐이다. 작품 [무제](2011)는 사과와 캔 음료, 사람 등이 배열되어 있는데, 관객은 사물들 사이의, 사람들 사이의,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가늠할 수 없다. 앞에 걸린 것은 단지 그림이니 보기만하라는 듯하다.
제목이 분명한 작품 [crag](2008)은 바위, 또는 바위 모양의 집이 균열이 있다는 것 외에 어떤 힌트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재현에 난 균열에 더 가깝다. 눈에 잘 띄는 지평선 위로 배열된 식물들은 같은 종류가 시간적 차이를 가지는지, 다른 종류가 공간적 차이를 가지는지 알 수 없다.
학교가 보이는 작품 [school](2010)에는 박카스 병이 나열되어 있고 구름 위치에 조화 같이 똑같은 꽃들의 배열되어 있어, 관객에 따라서는 학생들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생산된 결과물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떠올릴 수도 있다. 수많은 도상들이 보이지 않는 좌표계를 떠다니는 와중에 간혹 관객과 시선을 맞추는 존재들--[무제]의 빨간 두건을 걸친 소녀나 [pyramid dialectic]에서 남자 등위의 강아지가 그렇다--이 있지만, 이들이 화면 속에서 어떤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역시 불확실하다. 도상들 간의 비관계성을 정수진 만큼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가도 없다. 그녀의 작품에는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 형상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이 배치된 맥락이 불확실할 뿐 아니라, 그나마 끊임없이 계열(series)을 이루며 변형되기에 의미를 확정짓기 힘들다.
작품 [무제](2008-2010)는 새, 술병 같은 것이 수직 수평으로 배열되어 있고, 잘리고 있는, 또는 분열 중인 미확인 물체들이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긴 변형의 계열을 보여주는 작품은 [100 seconds](2011)이다. 녹색 벽에 100개의 같은 크기와 형식의 그림이 배열되어 있다. 나무 책상 위에서 열심히 독서하는 남자, 그 반대편에 풍선같이 생긴 마스크와 파란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뛰는 모습이 기본을 이루고, 수많은 변주가 이루어진다.
여자의 몸통으로 구현된 감각과 남자의 머릿속 장면인 상상은 어떤 경계나 모순도 없이 하나가 된다. 만화의 연속 이미지를 떠올릴 때, 열독하는 남자의 머릿속 풍경들로 간주될 수 있는 변형의 계열체에서 상상의 유희는 극대화된다. 작품 [faces](2009)에서는 한 화면에 마스크같이 생긴 수많은 얼굴 형상들이 배열된다. 서로 간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붕 떠있는 형상 옆에 다양한 굵기와 길이의 적색 선들이 진동하는 이 작품은 모종의 형태가 만들어지기 위해 꿈틀거리는 조형요소를 예감케 한다.
추상으로 정점을 이룬 모더니즘의 역사는 지시대상과 연관된 의미를 배제하고 보여지는 시각의 조건에 충실했다. 읽지 말고 보라는, 요컨대 해석에 반대하는 태도와 더불어, 이번 전시에는 추상적인 화면이 전면에 배치된 작품들은 이례적이다. 작품 [무제](2011)는 서로 섞이며 번지는 색과 구체적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아래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마치 지워지는 중인 것 같다. 아니면 추상적 얼룩에서 구체적 형상이 생겨나는 중일까. 작품 [landscapel vertical](2011)에서 집의 안팎이 동시에 드러나는 다차원적인 화면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선은 그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투명한 창이 아니라, 흐르는 물감으로 그려진 물적 조건을 가진 것임을 확인시킨다. 무려 6년을 붙잡고 있었던 작품 [pyramid dialectic](2005-2011)에는 서로 무관계한 인물과 사물, 동물의 빼곡한 배치 위와 아래로 보라색과 적색이 얼룩져 있다. 이러한 얼룩들은 2000년 사루비아 다방에서 전시된 [뇌해]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다종다양한 물마루처럼, 또는 비너스를 탄생시킨 물거품처럼 화면에 떠도는 형상들을 구조화시키거나 해체시키는 회화의 원동력처럼 보인다.
정수진의 작품이 완전한 카오스라고 볼 수는 없다. 어쨌든 관객들은 그녀 특유의 스타일을 알아 볼 수는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구성요소들의 조합 방식이 무한하여 전체를 총괄할 수는 없지만, 선호하는 이미지나 배열방식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폐쇄적 체계에 안주하는 형식주의가 아니라, 의미에 개방된 감각의 논리가 있다. 작품 속 요소들은 관념이라고도 실재라고도 할 수 없는 중간 단계에 있으며, 작품 속 요소들이 변조되는 과정은 특히 중요하다.
독서하는 소년이 등장하는 작품은 100개가 걸려 있으나, 그 추세라면 더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치는 이미지들은 분열을 거듭하면서 변화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한 논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보충되고 대치되며 근본적인 원칙 없이 운동하는 반복변화성(iteration)을 보여준다. 마이클 라이언의 [해체론과 변증법]에 의하면, 반복변화성이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반복하는 가운데 변화하는 운동을 말한다. 정반합에 ‘합이 아닌 것’의 과정을 추가한 정수진의 ‘입체 변증법’은 무한히 이어지는 차이의 계열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변증법보다는 해체론을 더 닮았다.
정수진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변형 사슬의 무한함은 세상이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대상과 기호, 기표와 기의 간의 미결정성으로 인해 체계의 완결성은 와해된다. 괴델이 증명하듯이 이러한 불완전성은 엄격한 수학적 공리에서도 관철된다. 지시대상과 의미의 거리를 무한대로 벌리는 정수진의 그림은 알레고리적 성격을 가진다. 기의가 확정되지 않는 기표들의 향연은 엄격한 자기지시성이 아니라, 자체의 우연성을 강조한다. 아래로부터의 중력을 받지 않고 깊이로부터 자유롭게 떠도는 기호들은 끊임없이 동요한다. 사물들은 명확한 논리를 가지고 구조화되기 보다는 단지 순차적으로 누적될 뿐이다. 의미는 확정되지 않는 채 계속 덧붙여진다. 의미는 의미화의 끝없는 과정이 된다. 보이지 않는 기호들의 그물망으로 겹겹이 둘러쳐져 있으며, 그 안에서 기호의 개방적인 유희가 일어난다. 이렇게 이루어진 정수진의 낯선 풍경들은 호기심을 유발하는 기호로 가득한 그림일 뿐 아니라, 세계 그자체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출전; 공간 6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