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미술평론가)
7년 간 18개국을 거쳐 온 대장정이 기록과 설치 등에 담겨 있는 정재철 전은 단지 조형적 산물이 아니라, 삶과 여행이 중첩된 산물이다. 그것은 삶의 흔적에 불과할지모르지만, 예술이 아니라면 그냥 흘러갔을 작은 아름다움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삶 자체가 불안정함의 유목인 작가에게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자신은 고정된 주체를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에너지가 된다. 전시장 천정은 네팔, 티벳 등지에서 수집한 이국적인 천막들로 축제적인 분위기가 가득했고, 각지의 풍광이 담긴 수많은 사진들이 수평면을 유지한 채 죽 걸려 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작은 여행을 반복하게 한다. 그가 찍은 사진에는 자연과 문화가 하나가 된 인간의 삶이, 영원과 일상이 만나는 길목에 서 있는 민초들이 있다. 그것은 사막 같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신이 탄생했으며, 삶에 대한 경외감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
정재철은 한가로운 여행자의 입장으로 그곳들을 지나친 것은 아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산되는 일회용 쓰레기인 폐현수막을 실크로드 상의 현지인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활용하기를 제안했다. 천막, 옷, 가리개 등으로 사용된 폐현수막은 단지 한 작가의 개념이 그들의 삶에 개입한 흔적만은 아니다. 그가 말하듯이 ‘문화적 점이와 중첩, 혼성’, 즉 문화적 다양체와 변이체이다. 작가와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작품은 그자체로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언어의 보편성이 없다. 대신에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언어를 상대화시키는 다양한 언어들이 공존한다. 예측될 수 없는 용법으로 응용된 폐현수막들은 소통이라는 대의명분을 가지는 계몽적 프로젝트의 예시라기보다는, 특이한 상황을 알려주는 언표의 배치 행위이다.
거대한 부가 축적되는 현대 도시에서 현수막은 유통의 매개에 불과하지만, 실크로드 상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에게 현수막은 사용된다. 그것은 교환가치를 넘어서 사용가치를, 나아가 상징적 가치를 낳는다. [광장]이라고 붙여진 3차 여정에는 폐현수막으로 만든 천막에서 조망한 시점이 담긴 풍광들이 담겨있다. 그것은 프로젝트에 대한 객관적 도큐멘트에서 작가의 관점으로 이동됨을 보여준다. 그가 이동했던 궤적은 지도에 담겨 있는데, 실제 지도 뿐 아니라, 풍선이나 만다라 같은 이미지와 문자들이 미지의 대륙으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기억하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잊혀지는 기호들의 거대한 지도이다. 작가는 지도를 따라가다가 차츰 지도를 만들어간다. 지도가 보여주는 다양한 장들의 연결과 접속은 모든 차원으로 개방된다. 그것은 끝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흐름을 낳으며, 관념적 구조의 복제, 그리고 재현의 경계를 넘는다.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이동한 곳은 주로 유목민의 땅으로, 겉으로는 변화무쌍해 보이지만 자본을 중심으로 철저히 코드화 된 현대적 삶과 차이가 있다. 전시장에 설치된 천막이나 책자, 작은 물건들은 유목민의 필수품이다. 현대적 작가의 필수 유목 품목으로 카메라가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지하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낡은 나무배, 그러나 풍선 같은 구조물이 장착된 배는 전진을 위해 기울어져 있으며 고정된 점을 탈주의 선으로 전화시킨다. 유목적 주체로서의 작가는 세상이나 자아의 중심과 동화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이탈한다. 지도 위에 뿌리줄기처럼 그려진 유목 또는 탈주의 선들은 구조나 체계가 아니라, 상황과 상태들과 관련된다. 정재철의 지도는 한정된 공간 안에 수많은 길을 낸다. 그 길은 무수한 시간의 궤적이다. 이 미로 같은 연결망은 직선의 단거리를 우회한다. 그것은 낭비나 방황이 아니라, 창조 또는 매개의 조건이다.
출전; 월간미술 6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