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의 이면
유토피아 유감 전 (4.22--5.22, 아트스페이스 루)



이선영(미술평론가)


새 출발의 희망으로 가득 찬 개관 전 주제어에 ‘유토피아’라는 말이 포함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현실에 속해있으나 그것과의 화해 내지는 안주에 머무르지 않고, 기존의 질서를 초월하여 그로부터의 비상을 꿈꾸는 예술은 이상향, 즉 유토피아에 대한 예견을 담는데 인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부제는 ‘유토피아 유감’이며, 이는 언제나 배반당할 수밖에 없는 유토피아적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한끝 차이이며, 다섯 작가가 참여한 1부 전시 ‘경계와 유토피아’가 의미하는 것도 그 경계에 관한 것이다. 그 말이 유래한 토마스 모어의 책제목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의 outopia와 ‘완전한 곳’이란 뜻의 eutopia사이의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완전한 곳은 현실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점에서 허구적이지만, 그것이 집단화 되면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전화하기도 한다. 신화나 역사라는 거대담론은 이러한 이중적 역학 관계 속에서 움직여 왔으며, 인류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헤게모니를 쥔 세력이 제시하는 유토피아는 지배적 구조와 체계에 동화(同化)될 것을 요구한다. 이미 다가온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김영헌의 작품에서 동화는 부정적으로, 동양의 별천지가 배경인 호야의 작품에서 동화는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김영헌의 [electric cloud] 시리즈에 나타나는 줄무늬는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전자 정보에 의한 왜곡을 다룬다. 그의 작품에서 정보사회는 투명하지 않고 구름이 가득 끼어 있다. 현실과 정보는 일치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보가 현실을 압도하고 대체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경험과 상상은 체계와 구조에 의해 조종된다. 고공 정찰중인 스텔스기는 정보화 사회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내재된 폭력을 표현하며, 모든 것을 대신 수행 해주는 가상공간에서 인간은 사이보그로 전치된다. 대부분의 작품에 샴쌍둥이가 등장하는 호야의 그림은 십장생도 같은 이상향이 무대이다. 배경 속에서 인물을 찾는 것은 숨은그림찾기 같은 노력을 요구한다. 인물들이 샴쌍둥이처럼 군체를 이루듯이, 배경과 형태는 서로 의태(擬態)화 되어 있다. 그것은 나와 나 아닌 것과의 구별이 불가능한 동양적 이상향을 표현한다. 이러한 구별불가능성은 서구적 패러다임에 의하면 정신분열증이지만, 동양적 패러다임에 의하면 물아일체, 또는 무아경이다.

이상향과의 동화작용에 의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김영헌과 호야의 작품에 비해, 이상현, 사윤택, 전채강의 작품에서 동화를 이질화시키는 틈은 더욱 벌어진다. 김영헌과 호야의 작품이 뒤집혀진 유토피아라면, 후자의 경우 찢겨져 가는 유토피아의 틈새로 헤테로피아가 드러난다. 고풍스러운 제목을 가진 이상현의 작품은 가상공간에서 합성된 디지털 프린트이다. 작품 [도원유희]는 흑백 정자의 풍경 앞에 분홍 꽃나무를 배치한다. 작품 [유정만리]에서는 안개 낀 호수를 배경으로 연꽃 안에 가야금 타는 여인이 헬멧을 쓰고 있다. 정상 논리를 비껴가는 이미지들의 기이한 조합은 가상공간의 산물답게 자연스럽게 접합되지만, 꼴라주의 흔적은 남아있다. 사윤택의 작품은 동양의 산수화와 서양의 풍경화가 혼합되어 있으며, 여기에 난데없는 이미지들이 배치되어 있다. 골프장을 에워싸는 산수도 안에 군인과 목욕하는 여자가 동시에 있는 작품 [순간의 틈]처럼 여러 시점과 공간이 병치된 장면은 시공간의 틈이 벌려놓는다. 느슨한 논리가 전제하는 자유로움이 현실의 폭력을 감출 수는 없다. 그의 작품에 내재된 시공간의 틈 사이로 환경 파괴나 전쟁의 이미지들이 드러난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회화적 장면으로 완성하는 전채강의 그림에서 현실은 언제나 공사판이다. 현실은 유토피아적 비전에 의해 뜯어고쳐지는 중이다. 정치 경제학의 논리에 따른 그 비전은 다수의 희망사항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풍경은 늘 부자연스러운 선과 면으로 절단되거나 변형되고 있으며, 자연의 녹색피부는 벗겨지고 먼지가 풀 풀 나는 어수선한 광경위로 거친 건설현장의 표어나 선거용 마스크들이 떠있다. 전채강이 그려내는 오늘의 시대풍경과 사건사고는 토건국가가 강요하는 유토피아의 실상이다.

유토피아는 조화로운 질서라는 상을 가진다. 리차드 해리스는 유토피아를 다룬 역사서에서 유토피아 중 가장 초기의 것은 B.C 6세기경의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이태리 남부의 한마을에 세운 Oder라고 전한다. 이러한 수학적 질서의 비전은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나타나는 이상향과 조응한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 대해 완전히 통제된 세상, 어떤 불변하는 나라의 이상적인 건설만이 나타남을 본다. 그 자체 불변하며 동일하고 영원한 구조를 지닌 유토피아 상에는 개인의 잃어버린 자유 대신에, 이루어지지 않은 질서만 강조된다. 이러한 이상국가의 상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도 강력하게 인간의 상상을 지배하였다. 좌우익을 막론하는 전체주의의 악몽은 늘 근사한 기하학적 이상 질서와 함께 시작되곤 하였다. 끼우려는 소수와 끼워 맞춰지는 다수가 구별될 따름이다. 다양한 세력 장으로 이루어진 사회에 걸 맞는 희망사항과 달리, 저 멀리 떠 있는 이상사회에 대한 비전은 좁혀지기 힘든 세력들 간의 갈등이 잠재되어 있다. 정적인 세계로 귀착되고 마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은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다. 작가의 유토피아는 그들의 디스토피아일 수 있고, 그 역도 성립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한 몸의 이면이다. ‘유토피아 유감’에 전시된 개성적인 작품들은 전체를 일괄하는 비전이 아니라, 각자의 유토피아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이 진정한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출전; 아트 인 컬처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