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미술평론가)
당신은 왜 코카콜라 병을 그리느냐는 질문에 앤디 워홀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느냐는 반응으로 답한다. 이 그림과 반응 속에 팝아트를 해명해줄 수 있는 키워드가 들어있다. 대중적이고 일상적이고 민주적인(?) 소재를 대중적이고 일상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재현하는 것. 실제로 그가 즐겨 사용하는 실크스크린 판법은 공장에서 포장지와 광고 이미지를 생산할 때, 그것도 똑같은 이미지를 대량으로 생산할 때 사용되는 인쇄공법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이렇게 워홀은 보통사람들이 매일 같이 마시는 코카콜라 병을 그리고 자본주의의 매개인 지폐를 그린다. 사람들이 매일 같이 먹는 캠벨 수프 깡통을 그리고 사람들이 열광해 마지않는 대중스타들의 초상을 그린다. 매스미디어의 광고 이미지와 같은 일상적이고 대중적으로 친근한 소재를 차용하는 한편, 실크스크린을 이용한 복제 혹은 복수미술의 전면화를 통해서 작품의 일품성, 원본성, 오리지널리티 개념에 도전한다(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 세리 레빈의 작품 역시 이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를 건드린다). 소위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것이며, 생산보다는 상품처럼 소비하는 대상(혹은 대상성)에서 이미지의 의미기능을 찾은 것이다.
그런가하면 브릴로 상자 작품으로 현대미술의 담론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후 일종의 재 제작된 레디메이드를 제안함으로써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려는 아방가르드의 기획을 완성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기획은 현대미술의 생리를 오브제 위주로부터 개념 중심으로 옮겨놓는 계기가 된다. 아서 단토는 이로부터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게 해주는 당위성을 찾는다.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특수성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가 없게 된 것이며, 이로써 이후 일단은 모든 것이 예술의 이름을 부여받을 수가 있게 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넘는, 그리고 허무는.
이번 전시는 <이것이 미국미술이다>(덕수궁미술관. 6.11-9.25)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미국현대미술로는 팝아트를 빼놓을 수가 없고, 앤디 워홀을 빠트릴 수가 없다. 그리고 진작부터 미국현대미술을 전문적으로 지원 육성하고 수집 장려해온 휘트니미술관을 간과할 수가 없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에는 3대 미술관이 있다. 그 중 메트로폴리탄은 미술관보다는 박물관에 가깝고, 모마 곧 뉴욕현대미술관은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인 경향성을 아우르는 것에 반해, 휘트니미술관은 동시대 미국현대미술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가장 미국적인 미술관에 속한다. 그리고 미술관 운영과 함께 개최해온 휘트니비엔날레는 베니스비엔날레,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힌다(참고로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바 있다). 정황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젊은 미술관으로 봐도 될 것 같다.
뉴욕 휘트니미술관 소장품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는 총 87점의 선별된 작품들이 선보이는데, 표면적으론 오브제 개념을 중심으로 미국현대미술의 역사를 개괄한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상 팝아트가 그 핵심이 되고 있고, 특히 오브제의 형식을 빌린 팝아트의 제 경향이 메인이 되고 있다.
그 경향을 보면 앤디 워홀을 비롯해 1964년 미국 작가로는 사상 처음으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한 로버트 라우센버그가 있다. 당시 수상작은 작가가 매일같이 사용하던 침대와 그 끝에 베개를 매달아놓은 오브제 작품이다. 팝아트의 키워드랄 수 있는 일상성 개념과 오브제 미술이 세계현대미술계로부터 공인받는 사건으로 봐도 될 것 같다. 작가 개인적으론 콤바인아트와 정크아트를 매개로 팝아트의 개념을 풀어내는데, 이질적인 것들 간의 결합을 통해서 예기치 못한 의미를 겨냥한다든지, 폐 공산품 쓰레기들에서 의외의 감동을 캐내는 것이다. 쓰레기를 이용한 작품으로 치자면 에드워드 키엔홀츠를 빼놓을 수가 없다. 문명의 쓰레기들을 인간의 면전에다 던져놓는가 하면, 정상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비정상성의 암시를 읽어내는 작가의 시선은 비인간화를 떠올릴 만큼 시니컬하다.
톰 웨슬만의 <위대한 아메리카 누드>는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여성의 몸이 일종의 성 상품으로서 전시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는 공공연한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고, 부분 이미지들의 조합을 통해서 전체 화면을 재구성해내는 제임스 로젠퀴스트의 화면은 그대로 광고 이미지를 보는 것 같다(실제로 로젠퀴스트는 화가가 되기 전에 광고 간판 그림을 그렸었다). 성조기와 과녁을 소재로 한 재스퍼 존스의 작품은 오브제 개념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전기를 마련해놓고 있는데, 평면의 오브제 그대로를 평면에다 평면적으로 재현한 것으로서 오브제와 그림, 실물과 재현된 이미지 간의 경계를 허물거나 최소한 모호하게 한 것이다. 국내에서 언론에 노출되면서 유명세를 치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알려진 바와 같이 만화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만화로 나타난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미디어를 소재로 차용하는 것과 함께, 확대해보면 망점들을 집적시켜 형상을 구현하는 인쇄매체의 방법론을 전용한 것으로서 동시대 이미지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클래스 올덴버그의 오브제 작품은 특히 현대조각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전기를 제공하고 있는데, 부드러운 조각과 소위 뻥튀기 조각이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조각의 전통적인 개념은 매스 곧 양감인데, 비닐이나 천과 같은 소프트한 소재로 만들어진 조각이며 매스를 결여한 조각이 조각의 외연을 확장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크기로 증폭된 사물이 사물 본래의 의미기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크리스토는 소위 포장미술이라는 또 다른 형식을 통해서 이처럼 전혀 다른 감동을,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경험을 가능케 한다. 하이포리얼리즘 경향도 발견되는데, 리차드 에스테스의 쇼윈도와 로버트 커팅엄의 야외광고보드를 소재로 그린 일련의 그림들에서 일종의 파사드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파사드는 원래 건물 전면을 의미하지만, 여기서의 의미는 건물 자체의 구조와 기능과는 상관없이 건물 전면에 덧댄 장식을 말하며, 그 자체가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감각을 코드로 하는 팝아트의 생리와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일련의 사진작업들 역시 흥미로운데, 현대예술사진의 선구자 만 레이의 필름 없이 찍은 사진 레이오그램은 현대예술사진의 형식실험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일종의 가상적인 비주얼 환경을 공들여 제작한 세트 장면 그대로를 사진으로 옮기는 샌디 스코글런드의 이미지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번 전시에는 오브제는 아니지만, 미국의 대표화가들의 그림들도 확인해볼 수 있었는데, 에드워드 호퍼와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들이다. 도시 변방의 고즈넉한 모델이나 주유소, 외떨어진 철길의 정경을 소재로 한 호퍼의 그림에서는 마치 풍경 속에 현대인의 고독을 투사한 듯한 정서적인 환기가 느껴지고, 오키프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하학적이고 유기적인 형상 특히 만개한 꽃잎 형상은 여성의 몸에 대한 표상과 함께 초현실적인 비전을 불러일으킨다. 이외에도 미니멀리즘과 명상의 계기가 결합된 댄 플래빈의 라이트아트와 세속적인 미적 취향을 세련화한 제프 쿤스의 키치가 주목된다.
팝아트는 현대미술이면서도 왠지 고전이 되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미국현대미술의 미술사적 의의를 되짚어본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겠지만, 지금여기 곧 미국현대미술의 현재를 실감하기에는 역부족인 감이 없지가 않다. 그럼에도 여하튼 팝아트에 의해 촉발된 오브제 개념이 현재까지도 여전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오브제 개념을 매개로 예술과 일상, 예술적 상상력과 현실인식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과 상호 간섭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전시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