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에서 장으로



이선영(미술평론가)


근 몇 년간 국내외에서 발표된 김진의 작품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가 된 5년간의 영국 유학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는 익숙한 시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맥락에 끼워져 있는 자신을 직시하면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스타일을 구축했다. [하이-인사동](2010)을 비롯한 요즘 작품은 거대한 창을 통해 보여 지는, 방으로 설정된 공간 밖의 세계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낯설게 하기란 예술의 원초적 방식이므로, 개인에게 다가왔던 삶의 고난은 작가로서 응전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이국에서의 삶은 공기와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지 못하고, 매 순간 의식되는 이물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생활(삶)이란 말이 ‘삶의 생물학적 뿌리내림과 동시에, 전체로서 인간의 통일성을 동시에 지칭’(폴 리쾨르)한다면, 그의 작품 속 인물은 이식에 성공하지 못한 뿌리 뽑힌 자이며, 사물처럼 파편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위축된 삶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그곳에서 이전의 모노톤의 작품은 화려한 색으로 변모했고, 자화상은 단지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실존적 선택이 되었다.

화면을 채우는 기본적인 방식은 드로잉으로, 그것은 그림으로 무언가를 쓰는 행위에 해당된다. 밀림이나 덤불숲을 연상케 하는 빠르고 복잡한 선들은 극도의 불확실성 속에서 정확한 좌표를 찾으려는 궤적들처럼 다가온다. 그의 선들은 무엇인가를 정확히 말한다기보다는 말을 위한 처절한 탐색의 과정이다. 이를테면 과정 자체가 말이다. 착종된 선들에 내재된 시간성은 공간에 붙박힌 삶을, 현재의 불타오름을 통해 온 몸으로 거부하려는 충동이 있다. 고풍스럽지만 칙칙한 실내를 밀쳐내는 현란한 색채들은 그러한 유토피아적 충동을 더욱 강조한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증거 하는 대상들에 대항하는, 주체에 의한 시간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레비나스는 [존재와 다르게]에서, 시간은 본질이고 본질의 표명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시간의 변화는 사건도 행위도 원인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한다는 동사이다. 존재는 동사 자체이다. 시간화, 그것은 바로 존재하다라는 동사이다. 의식의 시간은 시간의 울림이며 시간에 대한 이해이다.

시간의 소실인 경과로서의 시간화는 자아의 주도권이 아니며,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향한 움직임도 아니다. 현재는 나의 자유 안에서의 시작이다. 작품이란 바로 시작의 자유를 의미한다. 작가는 왜 시작하는가? 이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소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들 뿐 아니라, 자기와의 소통도 포함한다. 작가에게 거부되거나 방해된 사회적 소통은 작품이라는 인터페이스를 최대한 활성화시킴으로서 보상받고자 한다. 그것은 작가가 사회와 소통하는 역설적 방식이다. 소외는 보다 밀도 있는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다. 주변과 완벽히 융화되는 행복한 삶 속에서 예술을 해야 할 필연성이 있을까. 발상이나 방식에 있어서 주변과 거리두기를 요구하는 예술은 다름 아닌 고통 받는 자의 언어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한 언어이다. 물론 예술을 통해 치유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병을 더욱 깊게 할 수도 있지만, 작업은 소외가 일상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동병상련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가는 샤먼처럼 스스로 몸과 마음의 병을 심하게 앓음으로서 타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마음은 ‘동일자를 소외시킴이 없는 동일자 속의 타자’이며, 몸은 ‘단순한 이미지나 형태가 아니라, 자기성의 수축과 폭발의 즉자성’(레비나스)으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작품을 통해 다시 이어지는 소통은 공감을 통해서 가능하다. 소외되는 인간을 표현하는 김진의 방식은, 크고 복잡한 화면에 숨은 그림처럼 찾아내야 하는 하나의 초상을 박아 놓는데 있다. 그는 방에 있지만 그 방의 주인이 아니다. 그의 그림 속에 많이 등장하는, 책들이 가득 꽂힌 서재의 풍경은 지나가면서 남의 집 창을 슬쩍 바라본 장면들에서 왔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이지 그 곳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인간 주변에는 고색창연한 물건들이 가득하지만 그것들은 그의 손때가 묻어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회에 빨리 적응해야만 하는 이방인으로서 그 사물들은 갖고 싶고 동화되고 싶은 것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물들은 인간과 겉돌며 자신들만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그 속의 인간은 여러 사물 중의 하나로 치환되어 있다.

인물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도자기나 조각상처럼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잡동사니에 속해 있다. 자율성을 상실한 그는 물리적으로 그 곳에 있을 뿐, 그 세계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 안은 바깥처럼 황량하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이 난감한 상황을 직시할 뿐이다. 작품 속 눈에 띄지 않는 등장인물은 관객을 향해 서 있는 나레이터처럼 ‘자, 나의 상황이 이러하다’는 것을 침묵으로 웅변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색 공포에 질린 듯, 뻣뻣하게 굳은 모습은 어떤 극적인 행동보다도 더 큰 고통을 전달한다. 폴 리쾨르는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에서 고통을 신체적 아픔, 나아가 정신적 아픔으로 정의될 뿐 아니라, 행동하는 능력, 곧 수행 역량의 감소와 나아가 파괴, 자기의 총체성에 대한 침해로 느껴지는 그런 감소와 파괴로 정의한 바 있다. 김진의 영국 풍 실내에는 보이지 않는 창살 같은 것이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하나의 자율적인 기호로 변모한 검은 선들은 영국의 오래된 창에서 발견한 검은 때로부터 온 것인데,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 이 차단막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 무대와 등장인물은 개인의 경험에서 나온 특수성을 가지지만, 사물(또는 상품)과 공간(또는 구조)이 주체가 되고, 정작 인간은 장기판의 말처럼 취급되는 상황은 보편적이다. 점차 인간은 구조의 산물이지 구조를 만드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김진은 회화를 ‘내가 바라보는 세계와 인간을 보여주는 창’이라고 본다. 이 창은 점차 커져서 하나의 장이 되어간다. 이 장 속에서 그는 더욱 활기차게 움직일 것이다. 창은 초상과 더불어 많이 나타난다. 장면이 창을 통해 바라본 시점일 뿐 아니라, 물건이 가득한 실내에 숨통을 틔워주는 밝은 공간이 배치되곤 한다. 거울 역시 창과 유사한 맥락이다. 좌우로 물건이 가득 쌓인 실내 깊숙이 창을 등지고 있는 사람을 그린 최근 작품 [N_ether](2011)에 나타나듯이, 창은 후광처럼 존재감 없는 인물을 극적으로 드러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작품에 나타나듯이, 밝은 창은 오히려 인물을 깊이 숨겨 놓는다. 창 앞에 있든 옆에 있든 인물은 검은 그림자 같은 존재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이 투명한 창일 수 없듯이, 소실점 맞은편에 있는 존재가 확고한 주체일 수 없다.

실내를 바라보게 하는 창은 ‘공간과 나 사이에 막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있으나 만질 수 없는’ 그리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을 상징한다. 관객 역시 작품이라는 창을 통해 작가의 내면 공간을 훔쳐볼 수 있다. 창은 나를 보호하는 것이면서도 격리시킨다. 창이 깨지면 나는 외계에 노출되는 위험에 처할 수 있지만, 창은 늘 분리의 위험이 있다. 개방과 밀폐 사이에 설정된 적절한 거리감은 작품에 있어서도 필수적이다. 낡은 창에서 온 검은 선들은 앞에 펼쳐진 것의 소유와 동화라는 정물 및 풍경의 기본적 역할을 방해한다. 그것이 가지는 이물성은 결코 투명한 창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김진의 작품은 알아볼 수 있는 지시대상이 있지만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창의 불투명성을 예시할 뿐 아니라, 인물과 상황의 합리적 관계를 전제하는 서사가 부재하고, 작품의 생산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시간의 궤적이 드러나 있다.

너무나 많은 사물들의 쇄도로 방향과 목적의 판단이 힘든 김진의 작품은 질서 있는 사실주의와 달리 야생적이다. 확정되지 않은 수많은 선과 얼룩은 인과관계를 벗어나며 우연성을 위한 여지가 있다. 삶의 불확실성은 작가로 하여금 그리기라는 또 다른 질서의 주도자로 서게 한다. 김진의 작품은 지시대상과 명확히 일치할 수 없는 색과 형태를 가진다는 점에서 추상적이지만, 세계(또는 내면)를 보는 창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의 작품은 제목 [N_ether]처럼,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계 선 상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재현이자 표현이다. 작품 제작 역시 스케치를 비롯한 계획된 구조에서 출발은 하지만, 즉흥적인 요소가 강하다. 화면을 떠도는 검은 선들처럼 지시대상에 완전히 붙박혀 있지 않은 조형언어들은 기의들에 대한 기표의 초과를 나타낸다. 이러한 기표의 특권은 작가의 현존을 예시한다. 기의와 기표 사이에 설정된 결정 불가능성의 관계처럼, 그의 작품은 결정화된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방식이다.

출전; 박영 스튜디오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