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진의 작품에는 팽창하는 회오리 같은 강한 에너지의 흐름이 있다. 대폭발을 연상시키는 에너지의 발산은 주체 내부로부터 발원한 것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주목하는 현대 문명자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시작도 끝도 없이 여러 중심을 통해 들어와 돌고 나가는 힘들은 현대를 이끄는 힘이다. 그의 작품 속 시간 주기는 원초적 혼돈으로부터 시작되는 우주적 차원을 포함한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맹목적 힘에 의해 휘둘리는, 해체된 채 보이지 않는 다수의 중심을 공전하는 기호들은 묵시록적이다. 20세기 미술사는 세계대전 전야에 근대 이성에 기반 한 모든 질서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도한 화가들에 의해 추상미술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모더니즘에서 질서정연한 형식만 주목하지만, 그 형식을 추동한 힘은 묵시록적이었다. 근대 화가들은 쇄신에의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낡은 질서를 전면적으로 거부했지만, 도래할 새 질서에 대한 확신은 부재했다는 점에서 역사상에 부침했던 종교적 종말론자들과는 달랐다. 작업 초기부터 추상미술을 해왔던 이호진의 작품 속에서 예수와 성모상은 물론 부처 같은 종교적 도상들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들은 작품 속에 간간히 등장하는 작가의 초상처럼,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현대의 묵시록을 지켜볼 뿐 세상사에 관여 하지는 않는다.






성스러운 도상의 호출에 의한, 이 불연속적인 현현(epiphany)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속세가 더욱 구제 불능하다는 역설을 표현할 뿐이다. 모든 것을 끝없는 이행과 위기로 보는 과도기적인 사고(transitionalism)와 태도 역시 현대와 묵시록을 연결시킨다. 작가는 변화 자체 속에서 영원을 본다. 작품은 어디선가부터 유래한 정신과 물질의 기호들이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는 장이다. 기호들은 폭풍 같은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한다. 충돌은 소멸의 흔적과 손상된 파편들을 낳는다. 이 파편적 기호들은 매번 다른 작품 속에서 회귀하지만 반복되지는 않는다. 작품의 지배적 기조는 혼돈을 위한 혼돈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어지러운 짝짓기이자 실험이다.

작품 속 공백은 기호의 변형이 가능하기 위한, 그리고 해석의 개방성을 위한 여백이기도 하다. 각각의 기호들이 다양한 속도로 펼쳐지며 충돌하는 장은 회화를 기본으로 하지만 오브제와 영상 등이 결합되기도 한다. 이호진의 작품은 정제된 완성품의 생산이나 완결된 형식에 집중하기보다는 원초적 감성과 행위, 그리고 과정에 방점이 찍혀있다. 속도감, 생경함, 날 것, 거칠음, 황량함 등은 그의 작품에서 받는 첫인상이다. 집중된 순간의 감성에 충실한 그의 작품은 학습과 진도의 개념에 뿌리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상품성을 보증하는, 표면을 윤택하게 하는 기교가 축적되지 않으며, 매 순간 새로이 출발해야하는 고통이 있다. 물론 그것은 희열이기도 하다. 매번 원점에 자신을 되돌려 놓는 행위는 자기학대나 비효율이 아니라, 단순한 직업적 노동과는 다른 예술의 본질적 특성 아닌가. 그러나 진보의 개념에 뿌리를 두는 현대사회가 억압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원초적인, 그래서 무정부주의적인 충동이다. 이 파국적 충동이 거부하는 것은 재현의 질서이다.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일관성도 없지만, 그의 작품이 단순히 배설적 충동의 산물은 아니다.






작품 속에 떠도는 파편들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의 조각들이다. 그의 작품 속에 많이 등장하는 한국의 재개발 지역들은 직선적 발전에 대한 강박관념이 질서가 아니라, 혼돈을 낳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한국의 근대를 지배해왔던 역사주의(historicism)는 먼 길을 돌아서 묵시록과 다시 조우한다. 요즘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야생 동물은 역사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맹목적 자연을 상징하는 듯하다. 광대하게 펼쳐진 시공간의 장 속에 박혀 있는 이호진의 묵시록적 기호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의미 있는 지속으로 채워질 것을 요구한다.

출전; 금천 예술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