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미술평론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살펴본 기획전의 참여 작가 10명은 예술의 영원한 모델인 자연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출발은 자연과 인간의 공감 및 공존은 물론, 양자 사이에 놓인 간극을 표현하는데도 필수적이다. 자연은 그 자신의 합목적성과 아름다움 때문에 그것의 실추는 더욱 비극적이다. 동물은 인간보다 자연에 더 가깝게, 즉 더 완전하게 태어난다. 문명사는 동물에 비해 불완전하게 태어난 나약한 인간이 동물을 포함한 자연의 주인이 됨으로서 생겨난 사건들과 그 파국적 결말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문명의 국면으로 전환하는데 동물성의 극복은 필수적이었다. 인간은 동물과 천사 사이에 낀 존재로 승화를 위해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어떤 반(反) 모델이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성의 반대편에 세워진 모델은 다름 아닌 동물이다.
동물은 타자로서 인간의 동일성을 정의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동물은 인간 또한 동물이라는 진실을 잊게 해주는 역설적 역할을 맡은 것이다. 동물은 인간 안의 타자로, 괴물이 되었다. 근대의 끝자락에서 인간성과 함께 신성의 황혼을 바라보았던 니이체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누구라도 그 싸움의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 바 있다. 동물은 인간이라는 하나의 통일적 기준을 세우기 위해 주변화 된 것들을 대표한다. 이 전시는 근대에 강화된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극복하기 위해 타자에 주목하는 탈근대의 문화에서 동물이 차지하는 위상을 알려준다.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중심에 두는 세계관의 모순이 폭발하고 있는 지금, 인간은 새로운 주체성의 발명을 위해 다시금 동물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전시에서 인간과 동물간의 관계는 반 정도는 긍정적이고 반 정도는 부정적으로 비추어진다. 자연과 문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김남표의 풍경에서 그 즉흥적 연결망은 시적이다. 인도, 파키스탄, 티벳 등지에서 찍은 이종선의 사진에서 아직 서구화가 완전히 진행되지 않은 곳에서 인간과 동물은 가족처럼 나타난다. 물론 그들도 동물을 도구화할 수 있지만, 기계 문명이 그러한 만큼 극단적으로 착취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연처럼 최소한의 것만을 취한다. 인간과 함께하는 친근한 동물인 개와 말이 등장하는 임만혁의 그림은 거친 목탄의 선으로 인간과 동물 모두가 고독하고 소외되어 있음을 말한다.
곽수연은 민화의 기법으로 현대의 대표적인 애완동물인 개와 고양이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반은 고양이이고 반은 인간인 성유진의 초상화에서 인간과 동물은 완전히 감정이입이 된 상태이다. 원시의 토테미즘 이래, 이러한 교감은 인간과 동물을 신적인 차원으로 고양한다. 물론 이러한 승화의 반대편에 비천 시 된 괴물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인간의 바깥에 있는 신성함을 예시한다. 양승수의 비디오에서 러닝머신 위에서 끝없이 달리는 투견의 훈련 모습은 충격적이다. 개가 놓인 상황이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긁힌 상자 위에 놓인 어린 사자를 세워놓은 금중기의 작품은 동물이 처한 비좁은 입지를 암시한다. 정정엽은 붉은 잉크로 멸종 위기 종을 세세히 묘사한다. 그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되고 있으며, 그리기라는 마술을 통해 다시 태어날 것이다. 첩첩이 쌓여 있는 돼지를 그린 박종호의 작품에서 동물은 고기나 장기로 재생산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초상이 된다. 자연과 인간을 벌어지게 했던 과학은 다시금 동물과 인간을 하나로 수렴시킨다. 연필 드로잉 애니메이션인 송상희의 작품은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태초의 평등이 인간이 주도권을 쥔 역사에 의해 종말로 치닫는 이야기이다. 작품 종반부에 위기에 처한 처절한 고래의 울음 소리가 귓속을 맴돈다. 그것은 어떠한 인간의 주장보다도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온통 기름으로 뒤덮인 바다 모습에서 미래의 지구를 보는 송상희의 작품처럼, 인간과 자연 사이에 놓인 간극은 문명을 세웠지만, 동시에 문명을 무너뜨린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인간이 동물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한 것은 노동이라고 지적한다. 동물이 인간이 된 것은 바로 노동에 의해서이다. 노동은 인식과 이성의 바탕이 된다. 주어진 자연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도구를 통해 세계를 변화시킴으로서 인간은 새로운 세계, 즉 인간적 세계를 건립한다. 그러나 지구상의 수많은 종 중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만든 세계에서, 언제나 다수로부터 취한 이익은 소수에게 집중된다.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범주에서 소수는 일차적으로 인간이지만, 그것은 다시금 인간들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A.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서양의 지배담론 속에서, 한편으로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통해 인간을 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인간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물을 활용하는 이중 작업이 벌어진다고 말한다. 아이, 여성, 이방인, 장애인, 성적 소수자, 대중, 민중 등은 어른, 남성, 백인, 정상인, 이성애자, 개인, 자본가에 비해 동물과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결국 인간 간의 관계를 상호간에 복제한다. 그래서 동물의 고통과 죽음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인 것이다. 이종선의 작품에 나타난 바 있듯이 오늘날 서구화가 덜 진행된 곳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보다 우호적이다.
서구화란 곧 삶의 전면적인 도구화를 말한다. 창세기 이래 동물은 인간에 봉사하는 도구였고, 이성의 진보가 구가되는 근대에도 동물은 ‘목적인 인간’에 반대되는 ‘수단이자 도구들’(칸트)이었으며,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데카르트)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동물과 짝패 관계인 인간 역시 동물과 같은 운명을 겪는다. 난 멜링거는 육식문화를 연구한 [고기]에서 컨베이어 벨트와 조립 라인의 기원을 밝힌다. 그것들은 원래 자동차의 조립에서 이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가축을 분해하기 쉽게 하려고 만들었던 분해 라인의 모조물이며, 그것이 포드사의 첫 대량 생산 설비에 적용된 것이다. 컨베이어벨트 앞의 현대인 또한 조각난 고깃덩이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출전; 월간미술 8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