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진 전 (6.3--7.15, pkm 갤러리)
안두진 전 (6.17--7.30, 송은 아트스페이스)
이선영(미술평론가)
원색은 물론 야광까지 감도는 화려한 색채로 거친 광야를 그리는 안두진과 시커먼 먼지로 만들어진 소우주를 표현한 함진의 작품은, 정반대의 인상에도 불구하고 전대미문의 세계를 자연발생적 이미지로 구축해나가는 공통점이 있다. 안두진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기상현상이나 함진의 먼지 이미지는 극대와 극소라는 스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계 없는 불확실성으로 귀결된다. 화가인 안두진은 설치에서, 조각가인 함진은 회화에서 그 미지의 세계를 부연 설명한다. 안두진이 신이 출몰할 법한 대우주의 세계를 넘나든다면, 함진은 지상에서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미소한 존재들의 구석진 자리에 주목한다. 그러나 대우주 역시 먼지가 뭉쳐 형성된 것이며, 종국에는 먼지가 된다. 안두진이 주장하는 이미지의 최소단위인 ‘이마쿼크’(이미지+물질의 최소단위인 쿼크)는 먼지처럼 우주를 이루는 입자이며, 검은 점토를 주물러 뭐든 만들어내는 함진에게는 그 낮은 자세에도 불구하고 조물주적인 전능함이 내포되어 있다. 안두진은 극적 충돌이 빚어내는 폭발적인 희열을, 함진은 그 내부로 접혀진 무한한 주름으로 함열된 세계를 표현한다. 폭발이든 함열이든 익숙한 여기는 사라져 버린다. 그들의 작품에는 바깥과의 조우 또는 접촉에서 오는 강렬함과 이질성이 있다.
광대한 들판과 하늘을 배경으로 폭풍우와 해일이 몰아치는 안두진의 작품은 미학적으로 낭만적 숭고에 뿌리내리고 있다. 변화무쌍한 구름을 뚫고 나오는 빛의 띠와 천둥번개, 지상의 모든 것을 싹 쓸어가는 거대한 해일이 있는 광대무변한 자연의 한 귀퉁이에서 개미떼처럼 이동하는 인간 군상들의 대조에서 숭고가 발견된다. 원초적 혼돈부터 세계의 갱신에 이르는 시간의 폭 역시 공간만큼이나 숭고하다. 스케일 면에 있어서도, 몇 개 층이 연결된 통로에 설치된 작품이나 지름 4미터 크기의 원통형 스펙터클은 전체를 일괄할 수 없는 시점을 내포한다. 동굴같이 밀폐된 장소의 경우 악무한의 미로 같은 모습이다.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작은 습작들, 지상의 어떤 존재와도 닮지 않은 괴물들은 어떤 의도나 대상을 명확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벌려만 놓은 채 끝내 추스려질 수 없는 사건의 제시이다. 많은 요소들이 촘촘히 배열되어 극적인 경관을 형성하는 작품들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작품 [섬광]처럼 관객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
전시부제 ‘충돌의 언어’는 단층 같은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안두진의 풍경은 아련한 빛의 띠로 가시화되는 지평선 위의 세계와 아래의 세계가 구분된다. 미술의 언어로 비교하자면, 아래는 이미지의 최소입자들을 쌓아가면서 구성하며 위는 회화적(paintery)으로 처리한다. 그것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의 추이에서 미술의 형식원리를 추론했던 빈켈만의 대조를 떠오르게 한다. 선으로 구획된 유한한 요소(패턴)들로 집적된 지상의 세계와 거대한 힘으로 휘저어진 천상 세계의 대조, 요컨대 선적/회화적 어법의 대조는 그 뒤를 이어, 평면성/깊이, 닫힘/열림, 다수성/통일성, 명료성/불명료성의 대조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조는 7미터 높이의 설치작품에서도 반복되는데, 바닥에 차분히 쌓여있는 작은 오브제들 위로 솟아있는 대형 회오리가 그것이다.
단위구조가 위로 올라가면서 폭발적으로 확대되는 회오리는 평형과 중력으로부터 이탈하는 바로크적 운동형식을 보여준다. 사물들이 가득 쌓인 공간은 방향성 있는 시간의 흐름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서 역사와 진화는 보다 큰 시간의 주기 속에서 합쳐진다. 지상과 천상의 자리를 구별 짓는 거대한 차원의 도입은 속세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이 맞부딪혀 발생하는 사건의 세계를 예시한다. 신성과의 접촉은 바깥으로의 열림을 낳는다는 점에서 숭고하다. 강한 에너지를 가지는 색의 띠는 지상에는 없는 직선을 창조한다. 그것은 우주 자체의 존립근거를 마련하는 충만한 힘이다. 색채 또는 광채는 자연과 구별되는 자유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태양을 지상과 매개하는 나무들도 비슷한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작품에서 신과같이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는 때로 그에 상응하는 지상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두 세계, 또는 두 언어의 맞부딪힘이 만들어내는 사건은 파국적이면서도 창조적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멸망시키고 새로이 등장한 인류일까, 아니면 다시 도래하는 신의 세계를 예시하는 것일까. 장-뤽 낭시는 [숭고한 봉헌]에서 시작의 가능성, 그것이 바로 자유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자유는 뛰어나게 숭고한 관념이다. 거대한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사건은 숭고함을 가시화시키는 강한 힘이다. ‘숭고는 절대적으로 큰 것’(칸트)을 말한다. 이 힘은 작은 경계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움직임을 낳는다. 많은 화면에 잔뜩 끼어있는 구름대나 그 위를 가르는 섬광들, 거대한 해일은 모두 경계가 없거나 경계를 무화시키는 현상들이다. 이 탈경계의 영역에 상상력 또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언덕 위에 성냥 곽처럼 쌓여있는 작은 집들이나 운명적인 힘에 이끌려 개미떼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사들은, 단지 제시될 뿐 결코 재현될 수 없는 숭고한 세계를 돋보이게 한다.
검은색 점토와 가는 선을 이용하여 만들어져 화이트 큐브의 벽과 바닥 등에 위태롭게 점착된 함진의 세계는 거미줄이나 먼지뭉치처럼 금방 부스러질 듯하다. 하나의 덩어리에서 뽑아낸 면과 선, 점들은 조형요소가 되어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그려진다. 2층에 전시된 평면작품들은 오토마티즘에 기반 한 작업의 발상과 진행과정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하얀 공간 속의 검은 얼룩은 미지의 유기체의 모습을 띄며, 때로는 유기체의 물질적이거나 심리적인 분비물 또는 운동 궤적 같기도 하고, 때로는 그 유기체가 자리하는 생태적 지형 같기도 하다. 전시장에는 다종다양한 구조물이 있었지만, 그것은 추상적 공간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성장한다. 미분화된 원초적 덩어리는 지속적인 차이의 과정을 통해 변형되지만, 그 방향성은 미리 설정되지 않는다. 명확한 중심 축 없이 공중에 둥 떠있거나 벽이나 바닥에 붙어있는 그것들의 성장 및 변형 원리는 뿌리 줄기적이다.
그것들이 자리 잡는 공간 역시 예측 불허이다. 그것들은 공간 안에 놓여 진다기 보다는 공간 자체를 만들어낸다. 공간은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생성된다. 그것들은 추상적인 공간적 좌표 속에 위치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밀도 있는 자리(place)를 만들어낸다. 그곳은 상상력이 놀이하는 자리이다. 함진의 작품은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매우 다채로워 보이는데, 그것은 점, 선, 면이라는 조형요소로 변신한 검은 점토 조각들이 맺는 연결망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결됨으로서 생성되는 그의 방식은 맥락 자체가 역동적이다. 변환과정들의 연속인 그것들은 그자체가 역동적인 사건의 장이다. 그것들은 어디가 출발이고 어디가 목적지인지 알 수 없는 뒤엉킴, 핵심이 없는 표면들, 뼈대나 구조 없이 끝없이 부가되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통로이자, 분리와 연결방식이 예측 불허인 미로이다.
비대칭적이며 야성적인 형태는 끝없는 변환의 와중에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작가는 한정된 부피 속에 무한을 담는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 안에 집결된 무한’(칸트)이다. 거대해도 닫힌 공간이 있는가하면, 작아도 열린 공간이 있다. 함진의 작품이 속한 곳은 후자이다. 어쩌면 그것은 먼지처럼 너무나 작고 하찮기 때문에 점유되어지지 않고, 자체의 자율성을 구가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얽히고설킨 미소한 것들, 그것에 내포된 이질성은 거대 서사에서 남발되는 낯익은 유토피아가 아닌 낯선 헤테로피아이다. 함진의 작품은 사방팔방으로 뻗쳐있으며, 또 그만큼의 빈 구멍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러한 허술함은 부정적이지 않다. 무정형이나 기형,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해 보이는 형상에는 새로움을 낳는 잠재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주물럭거림에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유한 속에 무한을 담는 작가의 방식이며, 한정된 인간적 조건 속에서 자유를 창출하는 방식이다.
모든 경계와 금기가 위반되는 축제적인 자유로움과 핵심이 부재한 가벼움은 검은색에 내포된 육중함과 우울함을 날려버린다. 함진의 블랙은 모든 형태들의 원초적 바탕이자 모태인 코라(chora)를 닮았다. 적절한 한계에 충실한 미를 낳는 이데아와 달리, 코라는 늘 상 경계를 넘는 과도함을 가진다는 점에서 숭고하다. 장 뤽 낭시에 의하면, 숭고는 다만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의 윤곽을 그으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경계의 궤적에 맞추어 스스로 소멸하고 경계를 지워가는 탈경계의 움직임이다. 이러한 숭고의 미학은 재현이 아닌, 제시와 관련된다. 재현은 적합성과 의미를 매개로 구성되지만, 제시는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사건과 그 사건의 섬광에 관여한다. 숭고의 미학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안두진과 함진의 작품은 예술의 목적이 ‘진리의 재현이 아니라 자유의 제시’(칸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
출전; 아트 인 컬처 6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