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또는 환상의 균열과 간극



이선영(미술평론가)





온라인상에서 열리는 김창겸 전의 영상과 사진들은 다양한 소재와 장치들이 동원되지만 ‘진짜 같은 가짜, 사실 같은 거짓, 현실 같은 환영을 연출’하고자 하는 기조에 충실한 그의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의 작품은 2003년 [사루비아 다방] 전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나, 기본적인 실험이 이루어진 것은 정물을 통해서이다. 정물은 오브제와 영상이 결합한 소박한 형식에서 최근에는 2D와 3D기법이 결합된 영상 작품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유학시절에 조르조 데 기리코와 함께 형이상학파(Pittura Metafisica)의 대표적인 작가로 활약한 조르조 모란디(1890-1960)의 정물화에 큰 영감을 받는다. 그는 정물이 의미하는 ‘죽은 자연’(Natura Morta)에서 과거의 기억이 남겨진 채 시간이 정지된 상황을 발견하고, ‘부재의 기억’을 의미하는 사진과 영상 등으로 표현하게 된다. 예술은 물론, 엄청나게 진보하고 있는 기술 역시, 그것들이 언어인 한 부재 기표라는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사물은 언어의 몸통이 되지 못하고 그것의 알리바이로만 남고 괄호 쳐지는 상황에서, 고전주의시대의 고풍스러운 표현인 ‘죽은 자연’은 작가에게 현대미술이나 문화의 적절한 은유로 다가온 것이다. 1997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전시에서 처음 일상의 정물을 사진으로 찍고 그것을 석고로 만들어 그 위에 연필로 이미지를 그렸다. 그것은 일종의 조작된 조각으로, 작품은 석고라는 물질성을 띄고 있지만 사진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사물들의 실재 크기도 모두 다르고, 정물이 놓인 테이블도 둥 떠 있는 상태이다. 실제 사물의 색이 빠짐으로서 무게감은 사라진다. 실재는 일련의 이미지화를 거치면서 무한대의 조작가능성이 열렸고, 이후 그의 작품은 현실과 허구사이의 게임에 몰입된다. 최근에 제작된 3분 분량의 [Still Life](2011)는 모란디 같은 스타일로 정물을 배치하고 정물의 색이 계속 바뀌게 만들었다. 형형색색으로 변하던 정물은 나중에 하얗게 변한다.

눈을 현혹시키는 현란한 영상은 결국 실재의 부재를 암시하는 역설적인 어법이다. 그의 초기 작업인 [이미지를 위한 좌대](1998)는 돌의 단면에 또 다른 돌의 무늬를 비춤으로서 시뮬라크르로 변해버린 대상을 표현한다. 그럴듯한 표면이 가짜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영상 사이에 끼어듬으로서 실재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관객의 몸이다. 그의 작품이 알려주는 것은, 표면이 화려할수록 실재(대상과 인간)는 더욱 유령같이 변한다는 것이다. 모종의 조작을 거쳐 자율성을 획득한 스펙터클에서 인간은 슬쩍 끼어드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재의 몸통은 불활성의 믿믿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역학이 사적, 공적 기억을 담은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이어진다. 김창겸의 작품은 정물과 사진의 미학에 깔려 있는 실재의 부재를 다루고 있지만, 실재는 여러 코드 중의 하나로 쉽게 포기 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미디어 아트가 보편화된 현재에 김창겸의 작품이 가지는 독특한 점은, 작품에 디지털 기기를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아나로그적인 감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 실재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추동하는, 몸과 마음에 강하게 새겨진 응어리진 흔적과 분리불가능하다. 코드와 코드 사이에는 암전과도 같은 불연속성이 있고, 의미는 이 불연속성에서 발견 된다. 가령 비디오 설치작품 [편지](2000)는 첫사랑을 기억하며, 20년 전의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는 설정인데, 편지를 쓰는 동안 오브제와 일치된 동영상은 상상의 나래가 펼쳐짐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지만 편지를 다 쓸 즈음 사물을 닮은 초라한 틀만 남는다. 편지는 나지막이 독백--‘...그럼에도 항상 묻고 싶은 것은...정말 당신은 내가 생각하듯이 그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습니까. 당신은 정말 존재했었습니까. 나는 존재했었습니까....’--된다. 실재는 첫사랑처럼 강렬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시간의 흐름이나 공공의 기억을 환기시킴으로서 불가능한 실재에 보다 근접하려 한다.





대표작이라고 자부하는 비디오 설치 작품 [water shadow-four seasons](2006-2007)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사계절을 오롯이 담았다. 2003년 [사루비아 다방] 전은 다방의 문화사라 할 만 한 대중의 집단적 기억을 투사했다. 이 전시에서 인상 깊게 나온 거울의 틀은 2007년 사비나 미술관에서 열린 [거울] 전에 다시 등장한다. 거울 앞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인물들, 그리고 그럴듯하게 연출된 모든 배경을 무화시키는 검은 그림자를 보여주는 [memory in the mirror](2006-2008)는 조각난 몸을 가상으로 연결시켜주는 거울이라는 장치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를 원하는 개인의 환상과 관련된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보여주듯, 환영은 실재만큼이나 취약하다. 환영과 실재는 가상과 원본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두 개의 중심을 가지는 짝패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 고흐에 대한 경의](1998-1999)나 [like a Mao](2004)같이 위대한 인물에 자신을 투사하는 작품들은 초상을 담는 황금색 액자와 거울의 유사성을 예시한다.

가장 최근에 열린 국내전 [Natura Morta](브레인 팩토리, 2010)의 부제에 암시되듯, 그는 다시 정물로 회귀하는 듯하다. 사비나 미술관 전시에서 선보였던 비디오 설치 작품 [Still Life](2007)는 또 다른 버전으로 탄생했다. 미술관 벽에 설치된 작은 선반 하나는 비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여러 가지 병 모양의 틀이 있는데, 요정 같은 소녀가 나비처럼 병 안팎을 뛰어다니며 놀면서 병들이 다채롭게 변한다. 요정은 환타지의 요소가 강하지만, 거기에는 죽은 대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사람이라는 은유가 있다. 또 다른 버전에서 소녀는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며, 분신들로 변신하기도 한다. 작품 속 사물들은 스케일이 모두 다르며 그림자도 자율적이다. 싱글채널 비디오로 만들어진 새로운 버전의 [Still Life](2010)는 실사사진을 밑그림 삼아 인위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붙인 영상과 사진이다.

새로운 버전의 [Still Life]는 관조적이기 보다는 유희적이다. 실재와 허구 사이의 경계보다는 허구적인 면이 더 강하다. 자연은 물론 모든 사물과 인간들을 빨아들이는 하이퍼 리얼의 세계에서도 가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역학관계는 여전하지만, 모니터 안의 세계는 보다 균질적이다. 그것은 현실을 보다 멀리 따돌리고 모든 것을 동질적인 코드로 재편하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새로운 현실(=언어)이다. 퍼트리셔 워는 [메타 픽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유발시켰던 외부의 질서체계에 대한 신념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위기의식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저자의 비교법에 의하면, 모더니즘에서 리얼리티는 주관적으로 구성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리얼리티는 언어적으로 구성된다. 모더니즘이 아직 의식에 기초해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허구에 매몰된다.





모더니스트 텍스트는 은연중에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에 주목하지만 그것은 의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의 자의적 체계를 통해 세계의 윤곽을 제시한다. 이 체계에 의해서 최상의 리얼리티를 만들려한다. 언어적 인간에게 현실이란 그자체가 아니라 늘 상 어떤 언어로 구축된 것임을 생각할 때, 해체는 구축의 이면이다. 연속적으로 흐른다고 가정된 선적 질서에 불연속을 도입하는 것은 미학적이면서 정치적인 선택이다. 사실주의는 확고한 것에 매달리고 싶은 부르주아의 욕망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세계의 합리성과 묘사가능성을 확언하지만, 사실 자체가 관찰에 의해 해석에 의해 변모한다. 김창겸의 작품에서 현실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한정적인 구조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서 구성(가공)된 현실을 이루는 취약한 이음매는 그 헐거운 본성을 드러낸다. 수지 개블릭이 마그리트의 작품은 분석하며 말했듯이, 재현이란 오브제를 그대로 비추거나 모방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과정이며, 상대적이고 변화무쌍한 상징적 연관 관계를 가진다.

김창겸의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는 투명한 매개가 아니라, 재현이라는 관습적 방식을 반성하는 일종의 도구이다. 그의 작품은 객관적 세계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들추어낸다. 그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익숙한 것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품에서 환영을 투사하는 바탕은 거울, 어항, 깨진 접시, 찻잔, 병들처럼 매우 일상적이다. 최근의 [정물]에는 장난감을 비롯한 온갖 잡동사니가 등장한다. 정확성과 불명확성의 역설적 결합이라는 비슷한 전략을 취한 마그리트는 자신의 작품의 구성요소를 ‘오브제, 의식의 그림자 속에서 그 오브제와 연결된 사물, 그리고 그 사물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빛’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러한 방식은 ‘물질세계의 모든 독단적인 광경을 붕괴시키기 위한 체계적인 시도’(수지 개블릭)이다. 김창겸의 작품에서 재현의 장치가 정교하게 구동되는 것은 재현의 해체와 관련된다. 그것은 재현을 통해 재현을 부정하는 전략이다. 그의 작품에서 현실에 난입하는 검은 구멍은 현실 자체가 구성된 것임을 알려준다.

작품에 동원된 사물들은 ‘그것들에 내재된 의미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을 남기는 방식 속에 존재’(로브그리예)한다. 빛이 사라지면 드러나는 창백한 모형들은 대상에 대한 단순한 투영이나 반영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체험을 구성한다. 그의 작품이 주는 주된 체험은 기분 좋은 몰입 후에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각성이다. 시간적 차이, 공간적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균열은 오히려 현실적이다. 만약 현실이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닫힌 구조가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지 개블릭은 말의 사용이 상투적일수록 재현되는 사물은 표현자체와 더욱 혼동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로 인한 혼란의 결과를 사실주의라고 본다. 이 혼란이 최고의 경지로 나타날 때 이 둘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김창겸의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작동하는 균열과 간극의 어법은 자연스러움에 내재된 혼란을 드러내는 또 다른 혼란이다. 이는 현실과 가상이라는 관념적 이분법을 전제하지 않는 일종의 동종요법인 셈이다.

출전; k-artist, global ar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