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은 욕망의 전쟁터이자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굳건한 대지에 발을 딛고 서서 과감히 싸움에 임하는 전사처럼 인간은 매일 다양한 욕구와 전쟁을 치른다.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욕 등 신체적 욕구에서 명예욕, 출세욕, 지식욕 등 정신적 욕구에 이르기까지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이 인간의 몸에 불을 지핀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죽음은 그러한 인간적 욕망의 불길이 꺼져간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욕구로부터 해방된다. 에로스에서 타나토스(죽음)로의 이행, 그것은 삶을 이끌어 온 기관차의 기관이 꺼지는 것을 의미한다. 기나 긴 여행이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박신자의 작품은 인간적 욕망과 욕구에 대해 말을 건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하나 인간의 보편적 지평과 맞닿아 있다. 어떤 작가든 개인적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명제는 어떤 경우라도 몸을 떠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싼다. 보는 것을 비롯하여 듣는 것, 만지는 것, 먹는 것, 냄새 맡는 것 등 인간의 모든 감각 활동이 몸을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욕망의 전쟁터로서의 몸은 그러한 활동을 수행하는 매개물이다. 그것은 직접적 현존이며, 나의 시선이 그것의 일부를 바라볼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의 근원을 이룬다.

1990년대 중반, 미술대학 재학시절에 그린 는 예술에 대한 박신자의 초기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거친 필치로 나체의 여인을 그린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자궁이다. 마치 배 부분을 절단당한 것처럼 자궁의 단면을 과감히 보여주는 이 그림에서 몸이 지닌 강인한 생명력이 되살아나고 있다. 약간 붉은 빛이 도는 자궁을 제외하면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회색빛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 무기력하며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처럼 죽음의 음산한 분위기가 캔버스 전체를 감싸고 있다.

박신자의 작품세계는 이중적 자아(페르소나)가 자아내는 변주곡이다. 그것은 살고자 하는 현실욕구와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정신적 허무감이 자아내는 치열한 길항관계를 보여준다. 그 사이에 예술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은 치유를 향한 기나 긴 항해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부여한 삶의 기제이며, 몸과 정신의 회복을 위한 기나긴 싸움이다. 그 자신이 미술심리치료사이기도 한 박신자는 자신의 정신적 상처(trauma)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따라서 그의 작품세계는 스산한 그 자신의 내면적 풍경에 다름 아니다. 그의 작품이 유난히 ‘나르시시즘’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그가 일련의 사진작품에서 보여주는 개인적 서사(narrative)에도 기인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트라우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내가 앞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하나 인간의 보편적 지평과 맞닿아 있다”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적 한계야 말로 바로 몸의 신체적 조건에 따른 숙명적 한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눈이 전면에 나 있어서 몸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의 몸이 지닌 숙명적 한계가 아니겠는가. 거울은 바로 그처럼 눈으로 볼 수 없는 몸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뒤를 볼 수 있는 매개가 돼 준다는 점에서, 박신자 작업의 나르시시즘적 서사는 트라우마의 극복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지평의 획득을 향한 의지를 보여준다.
박신자의 사진 작품에는 유독 남자 혹은 남성성이 거세돼 있다. 그것은 여자들이 벌이는 여자들만의 잔치이다. 가정이 있지만 남자의 모습은 가족사진 속에 조그맣게, 그것도 작품의 배경에 자리 잡은 작은 액자 속에 존재한다. <2010 Hanah\\s Family 1>이란 작품에서 딸을 안고 있는 남편의 모습은 ‘배경 속의 배경’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마치 왕궁의 일부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방 안에 남성은 거세돼 있다. 이 사진 속에서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작가 자신은 기묘한 모습의 동물을 안고 있다. 러시아 고양이지만 훨씬 표독스럽고 잔인해 보이는 모습이다. 나는 이 사진 속의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가련한 한 여인의 모습을 본다. 비참한 운명에 떨고 있는 모습, 그것은 비단 주인공뿐만 아니라 형해화한 인간의 보편적 모습인 것이다. 작품이 개인적 서사를 통해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도구라면, 우리는 이 한 편의 사진을 통해 출구(exit)가 막혀버린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읽어내야 하리라.

박신자의 작품은 그것이 회화든 사진이든 심리적 미로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회상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작가 본인과 아이들, 그리고 두 여동생이 등장하는 연출 사진 작품은 서양의 고전 명화와 한국의 영화 장면에서 부분을 따와 조합하는 인용(appropriation)의 창작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패러디라기보다는 작가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참조물로 기능한다. 앵그르의 <샘>을 비롯하여 방화(邦畵) <모던 보이>, <친절한 금자씨> 등은 대표적인 인용의 사례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수의 심리극은 연민의 감정과 오버랩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치 한편의 서사를 갖춘 영화처럼 그의 사진작업 대부분이 유년시절에 자신이 살던 집을 찾아가는 회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2010 H-F2>는 지금은 포교원으로 바뀐 옛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곳은 상처(trauma)의 진원지이다. 옅은 청색의 지붕을 한 단아한 일본식 건물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산뜻한 느낌을 준다. 넓은 앞마당에서 현실의 아이들과 자신, 그리고 여동생들이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 속에 엄마(작가 扮)가 나타난다. 엄마는 여행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거나 먼 데서 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자세로 연출되고 있다.

바이올린이 연주되는 가운데 댄스를 하는 주인공의 모습도 보인다. 포토샵으로 연출한 이 사진 콜라주는 이것이 실낙원인지 복낙원인지 애매한 경계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몸은 한없이 성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또 한없이 비천하거나 불결한 것일 수도 있다. 욕망의 전쟁터로서의 몸은 성(sacred)과 속(profane)의 사이를 진자처럼 왕복한다. 몹을 이용한 동영상 사진작품에서 이 성과 속의 교차는 일상복을 입은 여인(어머니로 扮한 작가)과 수녀복(작가 扮)을 입은 여인이 스쳐지나가는 장면으로 나타난다.
1990년대 중반과 후반사이에 제작한 일련의 그림들은 박신자의 내면 풍경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작가의 말에 의하면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파기됐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아쉬운 일이다. 내가 보기에 이 작품들은 매우 진솔하고 좋은 작품들이다.). 이 그림들은 남성에 대한 분노, 성애(性愛)의 쾌락, 자아의 성(性) 정체성, 가족의 해체, 복수, 폭력, 죽음 등 인간 감정의 원초성을 다루고 있다. 사진을 통해 제시되고 있는 근작들이 이러한 감정들을 여전히 다루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잘 포장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그림들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야수적 본성을 솔직히 드러내는 해체적 기법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이 지닌 조야함과 낯설음,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맛은 현실원칙에 가려진 한 인간의 내면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들 속에서 현실과 내면의 길항관계는 갈등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그것들은 각기 성애(eros)의 원초적 본능과 억압(Untitled 3), 타나토스(죽음)에 이르는 길(Untitled 5), 가족의 해체와 성(性)의 부정(Untitled 1),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비상(飛上)에 대한 열망(Untitled 6)을 보여준다.

박신자의 작품들은 성장통을 다룬 일종의 자전적 서사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운명에 대해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것들은 지극히 비극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시지프스 신화처럼 운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운명에 바치는 장엄한 서사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