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들판에서




작년 말에 열린 [빈 주소-경의선 능곡 역 앞 들녘](2010, UNC 갤러리) 전에 설치된 갤러리 내의 가건물은 불안정한 세상과 그 안에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들에 대한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빈 주소는 이 세상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장소이다. 옆으로 뻥 뚫린 가건물은 광야의 바람을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불러들인다. 안은 바깥이 된다. 1981년 경기도에서 태어나 자란 이혜인은 고향 땅에서 부는 개발의 광풍을 목도해왔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지금까지도 그 주변을 맴돈다. 사라지는 중이거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과도적 풍경 속에서 작가는 홀로 그림을 그리며 놀기도 한다. 전시장 바닥에 볏단을 깔고 그 위에 걸어 놓은 작은 그림들은 보잘 것 없지만 볼만한 구석도 있는 장면들이 간간히 박혀 있는 들녘으로, 칙칙한 색으로 칠해진 쓸쓸한 풍경이다. 공사장 가림 막을 흘러넘치는 땅을 그린 [흐르는 땅](2010)이나 잘린 나무둥치들이 비죽 솟아 있는 뻘 같은 곳을 그린 [공장](2010)에서, 대지는 만물이 비롯되고 서있는 든든한 토대가 아니라, 온통 들쑤셔져 있고 시뻘건 속살을 상처처럼 드러내고 있다.

반파되어 있는 집을 그린 [붉은 벽돌집의 순환 고리](2008)에서 보여 지듯, 층층의 색 면이 노출된 대지는 방금까지 서있던(살아있던) 것이 뭉개진 흔적이다. 뭉개진 것들은 심연과도 같은 블랙홀을 통과하여 우주 저편으로 사라진다. 우주 저편이라는 말이 너무 초월적이라면, 역사 저편이라고 해두자. 도시 풍경이 그림자처럼 매달려 있는 바닥없는 수영장을 그린 [수면 유영](2010)이나 심연 위에 떠 있는 테니스장을 그린 [일요일](2010), 검은 구멍이 뻥 뚫린 들녘 풍경을 아치형 구조 안에 그려 넣은 [남겨진 장소](2010)는 바닥이 없는 불안한 현실을 그린다. 검게 보이는 크고 작은 구멍의 색은 짙은 인디고 블루이다. 심해나 우주의 색깔을 띠는 이 고요한 평정의 지대는 언제나 변화의 와중에 있는 불안정한 물질적 환경과 대조되는 반물질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변화가 없는 공(空), 또는 니르바나, 또는 전체와 하나가 되는 죽음 충동을 연상시킨다. 블랙홀처럼 보이는 이 지대는 토대가 불확실한 현실과 다른 세계로 통하는 구멍 같은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다. 뻥 뚫린 마음이나 공허함,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이 공간은 현재의 혼돈으로부터의 탈주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혜인의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이나 집은 존재가 비롯되고 온전하게 속하는 안정된 장소가 아니다. ‘경의선 능곡 역 앞 들녘’으로 압축되는 장소는 맹목적인 운명의 집행에 의해 소용돌이 속에 있는 과도적인 곳이며. 그 안에 있는 인간 또한 과정 중의 주체로 만든다. 파라다이스라는 글자를 달고 쇄빙선처럼 얼음을 깨고 나아가는 배를 그린 작품 [유령선](2010)은 떠도는 장소와 떠도는 주체를 결합시킨다. 배는 건축물 지을 때 쓰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지만, 한쪽부터 무너지고 있으며 이미 물에 잠겨 있다. 배나 집은 사람, 특히 여자이다. 유토피아적 미래는 물론, 머무름과 속함조차 거부된 상태이다. 그 안에 속한 자로 하여금 인생의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배는 좌초되어 있다. 행복이나 풍요 따위의, 정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배의 상징은 종말론적 비전으로 끝난다. 역사 발전의 법칙을 단언하는 역사주의로부터 종말론으로의 반전은 발전이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한국 전쟁 후,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 사회는 이제 더 많은 절망과 파괴를 낳고 있다. 이혜인이 선택한 이 허름하면서도 역동적인 장소는 19세기의 파리, 20세기의 뉴욕같이 모더니티의 상징이 될 만 한 장소이다.





한국적 모더니티의 맥락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 또한 파국적이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토사물들은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유아론적이고 물질주의적 전망 속에서 무시되고 내팽겨 쳐지는 가치를 묻어버린다. 이런 곳에서 작품을 하고 살겠다는 생각 자체가 좌초되기 쉬운 유토피아적 전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혜인의 작품은 작가가 결핍 속에서 무엇인가를 일구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거친 황야 같은 무대는 거기에 어울릴 법 한 인간의 등장을 불러온다. 최근 아르코 미술관의 기획전 ‘몹쓸 낭만주의’에서 선보인 작품은 하드보드지에 물감을 밀어서 마룻바닥 같이 잘라 지붕을 만들고, 그 아래에 드로잉 11점을 붙인 것이다. 상상과 기억이 조합된 작은 그림들은 지붕 아래에 펼쳐진 세계를 말한다. 그것은 보이는 그대로 지붕 아래의 삶일 수도 있고, 의식 하부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 어느 것이든 거칠고 삭막하다. 암흑 같은 배경 속에서 수수께끼 같은 오브제들이 고문 도구처럼 등장한다. 삶의 무대와 그 안의 배우는 각목으로 얼기설기 이어져 있고, 충돌하며 함께 파괴되기도 한다.

사물과 사람의 연결은 조화보다는 사고나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혜인의 작품에서 파헤쳐 지는 땅, 허물어지는 집, 죽어가는 사람은 같은 계열에 속해 있다. 지어지는 중이거나 파괴되는 중의 건물 재료나 사람의 뼈대는 비슷하다. 사람이라고 질적 차이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 와서 땅과 인간은 어느 때 보다 멀어졌지만, 도구화라는 면에서 다시 근접한다. 이혜인의 작품에서 대지는 고대의 상징적 우주처럼 인간의 살과 뼈와 이어진다. 단지 그것이 파괴를 통한 접합이라는 점이 존재의 사슬이라는 상징적 우주에 내재된 조화로움과의 차이점 이다. 사람이 풍경을 만든다면, 풍경 또한 사람을 만든다. 자연의 풍경은 인간의 표정이 있고, 인간의 얼굴에는 자연에 새겨진 시공간의 층이 있다. 토건국가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에서 이 시공간의 층은 급조되고 급변한다. 그 안에서 개발 이익을 챙기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다수가 파괴 가능성에 노출된다. 대규모 개발은 자연을 포함한 다수를 타자화 시키는 동일자의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이다.

땅이 파헤쳐지듯 인간도, 인간관계도 사정없이 파헤쳐 진다. 공동체는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생산자로, 자신의 사소한 욕망에 충실한 소비자로 와해된다. 하나로 수렴되는 이 물신주의 속에서 화가의 자리 또한 맹목적 변화의 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나대지와 교차된다. 작가는 바람 부는 바깥에 있다. 그러나 안쪽 또한 바깥처럼 황량하다는 것이 작가처럼 경계 위에 놓여 진 이들에 의해 밝혀진다. [빈 주소-경의선 능곡 역 앞 들녘] 전을 계기로 만든 작은 책자 [철새 집]에는 ‘...우리는 파괴되는 것이 두렵습니다....그 안에는 공허한 공간이 태어납니다. 시린 바람이 불고 떠돌게 됩니다. 그래서 헤매는 마음이 되어 빈 들판에서 다른 헤매는 종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는 말이 적혀있다. 이 두려움은 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을까. 작가는 2010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쓸쓸한 계절에 전시 준비를 위해 바람 부는 들녘에 선다. 여기에서 그린 그림은 ‘이제는 마주할 수 없는 것들과 만나기’ 위한 것이다.

올해부터 그리기 시작한 인물화는 그녀의 작품에 많이 나타나는, 들녘에 펼쳐진 거친 풍경들에 투사된 내면 풍경이기도 하다. 아무 바탕이 없는 하얀 종이에 그려진 최근의 초상화들은 개발 광풍이 휘몰아치는 천민자본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될 법한 광경들을 시대에 대한 반영이나 비판이라는 사회적 차원을 넘어, 존재론적 차원으로 고양시킨다. 나이프로 짓이겨서 그려지는 초상화는 물감의 층과 지층을 중첩시키면서 하나의 풍경으로 펼쳐진다. 설치의 방식을 통해 회화의 경계를 벗어나곤 하는 작가는 초상화 또한 조각적인 방식으로 그린다. 조각을 만들 때 쓰는 심봉이 등장하고 그 위에 살점을 붙이듯이 그린다. 이 즉물적인 초상에서 인간이 숨어 있을 구석은 없다. 나이프나 실크 스크린 할 때 쓰는 도구를 이용하여 종이 위에 누르면서 즉석에서 색을 섞는다. 보통 유화가 그러하듯이 색을 선택해서 갠 다음에 겹쳐 올리는 방식이 아니라, 몇 가지 색과 그리는 방향만 결정되고 나머지는 우연적이다. 계산에 의해 억압된 열정이 되살려짐으로서, 혼돈과 불확실성은 새로운 질서와 쾌로 전환되기도 한다.

인물과 풍경에서 물감의 두툼한 물질성 속에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에너지가 잠재해 있다. 그리기와 만들기의 일치를 통해 안으로부터 차오르는 에너지는 완전히 제어되지 않으며, 그것은 우연 속에서 자유를 찾는 작가의 방식이다. 인물에서 뼈와 살을 덮어야 할 피부는 벗겨지고 인간을 이루는 물건들과 다를 바 없는 구성요소들이 드러난다. 그것들은 구성된 것만큼이나 해체될 수 있다. 그것은 그 땅에서 목수였던 할아버지, 건축가였던 아버지의 방식이기도 하다. 살벌한 해부학적 외관은 비극적 사고나 비참한 죽음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러한 현대적 회화에서 기존의 휴머니즘적 전망은 유효한 기준이 될 수 없다. 이혜인의 초상에는 인간성의 묘사나 서사 대신에, 표피 아래의 무의식과 욕망이 들끓고 있다. 켜켜이 형성된 지층과 급작스럽게 노출된 단층은 무의식과 욕망이 발현되는 방식을 말해준다. 인물은 지형학적 풍경을 이루며, 풍경을 이루는 터전이나 바탕처럼 거칠다. 자화상을 포함한 자그마한 얼굴에는 무엇인가 쓸려가고 밀려온다. 뒤섞이고 뭉개진 잔해에서 막연하게나마 어떤 인간의 형상이 떠오른다.





이혜인의 풍경이 역사의 끝에 서 있는 역사이후(post-history)의 풍경이듯이, 인간 또한 인간 이후의 인간(post-human)이다. 바탕 없음은 풍경과 인물에 공히 적용되는 원칙인데, 그것은 황량함을 표현하는 방식이자, 분리된 것들을 섞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각자 온전히 서있을 수 있는 것만이 다른 것들과 섞일 수 있는 것이다. 배경이나 바탕이 부재는 존재론적 고립이나 회화의 자율성의 구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형상의 고립은 들뢰즈가 베이컨의 그림에 대해 지적했듯이,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삭풍이 부는 스산한 광경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재현적 질서가 당면한 상황을 보여준다. 늘 불안정한 변화의 와중에 있는 풍경을 만질 수 있는 실체로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 작가는 촉각성을 중시한다. (재)개발이 추구하는 것이 시선이 미끈하게 주파할 수 있는 광학적 공간, 즉 스펙터클을 만드는 것이라면, 현대의 화가는 그리기를 통해 또 다른 구체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것은 손으로 그린 것만이 가능한 구체성, 즉 촉각성이다.

촉각은 눈에 집중된 근대적 감각을 전신으로 확장한다.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를 중시한다.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아치형 틀에 그림을 그리는 식이나 들판 같은 곳에서 그림을 배치하는 식, 또는 풍경에 아예 들어가는 방식, 주어온 폐자재로 입체를 만드는 방법 등은 설치로 확장되는 회화이다. 가령 작가는 들판을 돌아다니다가 버려진 금속조각으로 별을 만들어 주변을 반사시킨다. 이러한 광경은 그림으로 그려지고, 다른 오브제와 같이 설치되기도 한다. 시간성과 몸은 중요한 매개가 된다. 한 장면에 모든 것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살리는 것이다. 설치의 방식에 나타나는 연극성은 지층이 살아있는 회화의 방식과 어우러진다. 이혜인의 그림과 설치에서 두드러지는 가변성은 시간성을 표현한다. 물론 이 시간성은 단선적인 질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 갑자기 돌출되는 지층처럼 뒤섞인 채 관객 앞에 던져진다. 던져진 단편들은 서로 겉돌고 있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세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출전; 난지 창작 미술스튜디오 워크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