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잔혹 사; 고문에서 전쟁까지

장지아
7.7 - 7.30 갤러리 정미소

김태은
7.1 - 7.17 인천 아트 플랫폼






사진, 영상, 설치 등으로 이루어진 김태은과 장지아의 전시는 잔혹극 속의 주인공들을 다양한 픽션의 장치들을 동원하여 연출한다. 그들에게 미디어는 더 이상 근사한 비주얼을 낳기 위해 새로움과 신기함으로 치장된 낯선 장치들이 아니라, 능숙한 화가의 손에 쥐어진 붓처럼 메시지 전달을 위한 효과적 수단이 된다. 다양한 장치들에는 그림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들이 흘러나온다는 점에서 미디어는 필연성을 띤다. 그들의 작품은 매우 환상적이지만, 철저히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것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은 작품의 메시지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런 것도 있다는 식의 소재주의를 넘어선다. 고문의 역사를 참조한 장지아와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김태은의 작품은 실제로 일어난 구체적 사건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인간의 보편적 조건, 특히 인간의 몸에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몸의 맥락 자체를 만들어내는 권력의 실상은 바닥이 유리로 된 장지아전과 크리스탈 룸에서 이루어진 김태은 전에서 적나라하게 투영된다.

그들의 작품에 깔려 있는 구조적 폭력의 실체는 가부장제나 제국주의 등이다. 고문은 내밀한 공간에서 전쟁은 육해공을 망라한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지만, 작가들은 미시 또는 거대 권력의 힘이 관철되는 궁극적인 지점인 몸을 부각시킨다. 고문과 전쟁은 고통 받는 몸과 시체를 생산하지만, 그들의 작품에는 일면의 진실만 나와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을 발생시키고 종결시키는 에너지로서의 권력과 폭력은 쾌락도 낳는다. 사적/공적 공간을 지배하는 독재자는 파트너나 대중을 핍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밀한 협조를 받곤 한다. 그들의 작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개인의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거나 대량 살상을 낳는 권력에는 가학/피학적 충동이 있으며, 금기에 의해 가려져 있지만 실상은 삶에 진한 그림자를 남기는 죽음이 깔려 있다. 죽음은 더 이상 생물학적이거나 심리적인 것 이상의, 사회적 기원을 가진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실체감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미디어에서 이러한 그림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장지아의 ‘I confess’전에 나오는, 고통을 주는 각종 기구들과 상황 설정은 진기함과 심미성을 갖춘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전선의 피복을 벗겨내 ‘I confess my sins’라는 문장을 만든 작품이다. 문장 끝에는 작업복과 고깃덩어리가 매달려 서로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스파크에 그을려 진다. 작업이란 스파크가 생길만큼 짜릿한 것인가? 여기에서 희열과 죽음은 한 몸의 두 얼굴이다. 작업이란 자신 뿐 아니라 타자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행위임을, 작업이라는 것 자체가 죄임을 고백하는 현장이다. 장어가 담긴 어항 위에 앉은 소녀는 진나라 때 고문방법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80년대 한국에서도 미꾸라지를 이용한 성고문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아름다운 곡선을 가지는 여체의 구멍을 향하는 거대한 물고기들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에 멈춰버린 물신적 환상이 있다. 묶인 채 대숲에 누워 있는 나체의 소년은 대나무가 몸을 관통하여 죽음에 이르는 상황이 중첩된다. 사진 속의 남녀는 젊고 아름답기에 그들의 고통과 죽음은 더욱 극적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아름다움 속에 내재된 가혹함, 잔인함 속에 내재된 쾌락이 있다. 남자의 엉덩이를 매질하는 여자는 소유와 계약에 기반 한 쾌락인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있다. 들뢰즈가 [냉정함과 잔인성]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사드와 마조흐의 스타일은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는 양적 되풀이와 질적 긴장감에 있다. 스팽킹(spanking)은 성적 하위문화에서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이자와 코타로는 [사진과 페티시즘]에서 스팽킹 사진은 처벌행위를 에로틱한 환상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전략으로, 교육과 규율이라는 명목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육체의 존재를 떠오르게 만든다고 한다. 동물학자 데이먼드 모리스는 궁둥이 때리기는 성행위를 연상시키며, 붉어진 피부는 흥분된 상태를, 맞는 이의 고통스런 몸짓은 오르가슴 동작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박물관에 안치된 유물처럼 꾸며놓은 [beautiful instrument]에는 수수께끼 같은 기구들이 놓여 있다.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고양이’라 불리는 채찍이 내려쳐져 부드러운 피부에 차가운 금속이 박힐 때, 사물과 몸은 고통과 쾌락 속에서 하나가 된다.

16세기 독일의 고문 장면이 있는 나무 몽둥이 뒤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권력의 성애학을 암시한다. 불에 달군 구리구두는 채찍이나 몽둥이처럼 물신적 도구이면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나 전족부터 현대의 하이힐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움을 위해 몸을 기형화하는 잔인한 풍습을 알려준다. 남자들의 페니스 크기를 조사하여 기하학적 모형으로 만든 작품은 ‘더 이상 수축과 팽창이 될 수 없는 고정된 상태로 그들의 욕망을 거세’하려는 목적이 있다. 언제 생겨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확실한 욕망을 의도된 형태로 고정시킨다. 엽기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성형이나 패션에 내재된 전략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영상작품 [mouth to mouth]에서 세계 인권 헌장에서 발췌한, 인간의 가치를 담은 단어를 새긴 남녀들이 키스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한다. 카라멜을 입에 넣어 혀로 형태를 만들어서 전달된 최종 산물은 머리가 절단된 사람이다.

거창한 명분들과 사랑이라는 내밀한 통로를 통과한 결과는 인간의 죽음 또는 괴물의 탄생이라는 역설이다. 고문에 가까운 사랑, 사랑에 내재된 가학 피학성은 상식적인 휴머니즘을 초과하는 ‘저주의 몫’(바타유)이다. 마지막으로, 타자들이 죄의식을 고백할 때 마다 눈에 빛이 비추어져 고통 받는 사람이 등장하는 작품은, 고백이 치유가 아닌 고통의 심화임을 알려준다. 억압이 제거되면 인간 해방이 가능하다고 믿는 지배적 가설과 달리,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쾌락과 권력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를 생산한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도 권력은 더 이상 배제와 억압을 넘어서, 생산한다고 본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대상들의 영역과 진리의 의식들을 생산한다. 장지아의 ‘고백’은 욕망과 지식으로 점철된 권력과 그것이 생산하는 도착적인 몸들을 매개한다.





김태은의 ‘영웅들의 섬’은 월미도에서 벌어진 인천 상륙 작전을 다룬다. 북한과 남한에서 만든 전쟁 영화 사이에 현재의 한가로운 월미도 풍경을 끼워 넣은 [전쟁 삼부작]은 불과 60년 전의 격전지의 흔적이 완전히 소멸되어 있는 상황을 대조한다. 구식이기는 하지만, 패닉을 야기함으로서 전쟁에 버금가는 체험을 낳는 놀이기구가 게임과 다를 바 없어진 현대 전쟁과 중첩된 지점도 가리킨다. 크리스탈 룸 한 가운데 설치된 작품은 유원지 같은 곳에 있는 천막과 총 쏘기 같은 게임 같은 기구를 떠올린다. 천막 내부에는 장난감 총이 서로를 마주하고 총소리를 내며, 아래의 수조와 위의 스크린에서는 긴박감과 흥분을 야기하는 영상들이 흘러나온다. 남과 북에서 만든 영화의 서사와 이미지에는 전쟁을 이끌어가는 각각의 영웅들이 있지만, 서로 극점에 서 대치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차이가 없다.

김태은의 ‘영웅들의 섬’은 월미도가 이제 섬이 아닌 것처럼, 영웅들의 실체 또한 모호하다. 영웅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남이나 북이나 비슷하며,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죄 없이 죽어간 사람들도 공통적이다. 김태은은 남한의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과 북한의 조경순 감독의 ‘월미도’(1982)에서 대립과 충돌의 공통적인 방식을 부각시킨다. 비록 영화이지만 실제 못지않게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장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거치면서 다양한 영상과 이미지로 생산되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영화의 서사는 그 비슷한 구조 때문에 용이하게 섞여든다. 생사를 갈랐던 전투의 고지들은 아름다운 패턴으로 재탄생되었고, 죽고 죽이는 격렬한 사건의 궤적들은 춤추는 선으로 변화했다. 종교화처럼 3개로 나뉘어진 [월미도에 대한 영화적 지형도]는 프로그래밍을 통해 산출된 격전지의 등고선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월미도이다.

이 낯선 풍경들은 그 금속성 표면 때문에 미지의 혹성같이 보인다. 가운데의 붉은 색 만이 그곳에서 스러져갔을 수많은 희생을 떠오르게 할 뿐이다. 전쟁은 권력에 동원된 몸을, 고통과 죽음은 몸을 더욱 의식화 시킨다. 나무 선반위에 8개의 모니터로 설치한 또 다른 지형도에는 전쟁에서 발산되는 에너지가 흘러나온다. 김태은은 육체를 극단적으로 대상화, 도구화시키는 전쟁, 불과 1세기도 흐르지 않은 역사적 사건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는 전쟁에 버금가는 현재의 폭력성, 서로 다른 듯하지만 동일한 구조를 이루는 짝패로서의 남과 북을, 미디어라는 깔대기에 통과시켜 아름다운 무늬로 재생산한다. 자신이 만들어가는 작품의 재료로서의 세계라는 발상에서, 예술가 또한 독재자 못지않은 권력에의 의지를 품고 있다. 작가 또한 작업을 통해 가혹한 역사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다.

출전; 아트 인 컬처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