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원은 전작에서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주제화하는 것으로 그림을 시작한다. 옛 봉천동 달동네를 소재로 한 것인데,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 군락을 화면 가득히 그려 넣은 것이었다. 세부가 생략된 것이나 정경이 최소한의 선들의 집적으로 환원된 것, 그리고 특히 수묵의 번짐 효과로 인해 비록 모티브 자체는 현실의 자장으로부터 취해온 것이지만 이미 그 속에 추상화로 발전할 수 있는 개연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자연스레 화면 자체의 내재적인 원리와 구조적인 성질, 그리고 특히 수묵 자체의 물성에 주목하게 되면서 현실과 실제의 모티브는 눈에 띠게 암시적이게 된다. 이때부터 작가의 그림 속엔 사각형의 분할된 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후 분할된 면은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되면서 근작에까지 연이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화면에 사각형의 분할된 면을 설정하고, 그 면들을 수묵으로 지워나가는 것인데, 실크로드와 특히 둔황 지역을 여행하면서 받은 인상이 그 계기가 되고 있다. 사각으로 구획된 면들이 고대문명의 터전을 상징하고, 그 면들을 수묵으로 지워나가는 것으로써 시간의 풍화 앞에 최소한의 흔적으로만 남은 고대문명의 잔재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사각의 면은 터 혹은 터전 혹은 바탕 혹은 그림과 그림으로 유비되는 존재가 비롯되는 장을 표상하며, 수묵은 행위와 그 행위를 무위로 되돌려놓는 시간을 표상한다. 각각 공간과 시간을 표상하는 것으로 정리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이후 공간과 시간은 작가의 그림을 구조적으로 뒷받침하는 날실과 씨실의 역할을 도맡게 되는 것이다.
작가들에겐 다른 작가들과는 구별되는 저마다의 형식적인 특징이 있다. 이길원의 경우에 그 특징은 바탕화면에 교직된 선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그 선은 화면을 가로지르거나 세로로 분할되는 선들이 병렬되는 경우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로선과 세로선이 중첩되면서 일종의 격자를 만드는 경우로 현상하거나 한다. 이렇게 바탕화면이 조성되는 것인데, 그것은 흡사 공책과 노트, 서간집과 오선지, 그리고 원고지를 떠올리게 한다. 흡사 목수가 나무를 가공하기에 앞서 나무에 먹줄을 튕겨 표시하듯, 작가에게 그것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마음을 가다듬는 일종의 의식이며 제식이고 제스처다. 그림이 시작되는 바탕이며 원점이다. 그로부터 작가의 사유가 비롯되고 행위가 생성되는 그림의 원형이며, 그림으로 유비되는 존재의 원형이다.

이렇게 의식이 치러지고 나면, 그 격자망을 바탕화면 삼아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리는데, 마치 오선지에 글을 쓰고 원고지에 기록하듯 개인사며 세상사를 회상하고 반추하는 과정에다 비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둔황지역을 여행하면서 받았던 인상들이며 시간과 풍화의 흔적들, 유년시절에 땅바닥에 낙서를 끼적거리거나 공책의 여백을 그림으로 메웠던 일,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나 주변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들, 하고 싶었고 또한 해야 했지만 미처 못 했던 말들, 그리고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작가의 신상에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때로는 헐헐하게 그리고 더러는 격렬한 필치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필치라고 했다. 그러나 그 필치는 유감스럽게도 읽을 수가 없다. 더러 산과 강의 추상화되고 양식화된 형태를 알아볼 수는 있지만, 대개는 어떤 의미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기호 내지는 문자로 보기에는 좀 그런, 그저 무의미하고 무분별하게만 보이는 비정형의 얼룩들이다. 그럼에도 그 얼룩들은 기호이며 문자다. 현대인이 이집트와 잉카 그리고 고중국과 같은 고대문명의 상형문자를 읽을 수가 없듯이, 비록 읽을 수는 없지만 작가에게 얼룩은 분명 기호이며 문자다. 물론 그 기호며 문자가 무슨 의미인지 작가에게 캐물을 수도 없고, 정작 작가 자신마저도 그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얼룩은 적어도 작가의 심중에서만큼은 때로는 상당한 의미가 부여된 기호이며, 더러는 애틋한 감정을 전달하는 문자다. 고대 상형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서 그 문자를 배워야하듯, 작가의 문자를 이해하기 위해선 작가 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읽어야 한다. 마음으로 쓴 문자며 마음의 흔적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상형문자에서 암시되듯 그림이 문자가 되고 문자가 그림이 되는, 문자와 그림이, 이미지와 의미가 상호 관계되고 호환되는 어떤 경지를 작가가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비정형의 얼룩은 초서 같은 서체를 연상시키기조차 한다.
이렇듯 서간형식이나 서체를 연상시키는 얼룩을 매개로 문자와 이미지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그림은 이미지는 읽는 것인가 아니면 보는 것인가, 라는 물음과 관련한 최근의 논의를 재확인시켜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읽고, 마음으로 읽을 때 하나의 이미지는 하나의 의미로서 와 닿고, 굳게 닫혔던 의미가 비로소 자기를 열어서 보여준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여기에 그림의 한 가운데에 세팅된 원 형상이 주목된다. 원 형상은 화면의 중심이나 균형을 잡기 위한 조형요소로서 기능하는 것이지만, 나아가 원 형상 자체를 일종의 의미론적인 메타포로 읽을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세계의 배꼽(옴파로스)이며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우주란을 떠올려준다. 그리고 그 주변에 흩어진 비정형의 얼룩을 문자며 기호며 의미로 본다면, 세계의 중심이며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문자며 기호며 의미가 내뱉어지고 샘솟는 형국을 떠올려 봐도 좋을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암흑(마치 그림 속의 원 형상과도 같은) 속에 거하던 신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 곧 이성의 메타포다. 세상은 말하자면 신의 이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신의 이성을 따라 지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세계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개념화된 세계(신의 말씀으로 명명된 세계)다. 언어로 매개되지 않은 세계, 언어로 명명되기 이전의 세계, 곧 세계 자체는 알 수도 없고 인간의 인식으로 거머쥘 수도 없다.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인간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만큼만 세계를 알 수가 있고, 인간의 언어로 개념화할 수 있는 만큼만 세계를 거머쥘 수가 있을 뿐.
여기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작가가 치르는 의식으로 되돌아가보자. 그림의 초입에서 작가는 먼저 터를 조성하고 그 터 앞에 선다. 그 터로부터 작가가 구상하는 의미가 비롯되듯, 원 형상으로부터도 세계가 내뱉어지고 샘솟는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터도 원형이고 원 형상도 원형이다. 그로부터 그림이 시작되는 그림의 원형이며, 그림으로 유비되는 존재의 원형이다. 어쩌면 작가에게 그림 그리기는 이처럼 그림의 원형에로 되돌려지는 행위이며, 존재의 원형에로 환원되는 과정이며, 매번 그림이 시작되는 시점 앞에 서는 반복과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