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이필두는 도시 관련 신문기사를 읽다가 도시풍경을 그리기로 했다. 발상은 그렇지만, 도시풍경을 그리는 작가의 실행이 어느 날 문득 시작된 것은 아니다. 작가는 도시풍경을 발상하기 이전에 이미 도시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말과 글을 매개로 한 소통문제, 말과 글이 의미를 고정시켜 주리라는 신념에 대한 의심, 말과 글을 도구로 한 현란한 수사학이 도시에서 채집된 영상이나 조각난 몸의 편린들과 어우러져 도시의 삶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도시보다 먼저 도시의 콘텐츠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시의 콘텐츠는 근작에서 도시 자체에, 도시 자체의 구조적 생태학에 주목하도록 유도하는 도시풍경의 형태로 확장되고 심화된다.

최근에 풍경이란 말은 상당한 인문학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자연풍경(랜드스케이프), 인공풍경(인공폭포나 인공암벽을 포함하는), 도시풍경(어반스케이프), 신체풍경(바디스케이프), 심리풍경(마인드스케이프) 등등. 사실상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전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수년 내에 소위 도시회화가 일종의 경향을 띠면서 다양한 갈래로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작가의 도시풍경 그리기는 풍경의 이런 확장된 인문학적 의미와도, 도시회화의 경향과도 부합해 보인다. 풍경은 사실상 전망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런 만큼 작가의 도시풍경 그리기는 단순한 재현논리나 형식논리를 넘어서, 풍경 속에 도시에 대한 작가의 전망이 담긴다. 그 전망은 도시의 현재에 주목하게 하며, 도시의 이면을 파고드는 또 다른 전망으로 열린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도시에 대한 4개의 장면이며 전망을 예시한다.

장면 1, 픽셀도시. 바둑판처럼 구획된 도로 위로 잿빛 콘크리트 건물들이 들어선다. 그렇게 무한 증식된 건물들 위로 작가는 야경을 덧입히고, 가로에는 차들이 오가게끔 세팅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늘과 건물이 맞닿는 공지선 주변으로 실제의 하늘처럼 투명하고 파란 대기를 그러데이션으로 그려 넣어 도시다움을 완성한다. 도시는 낮보다는 밤에 더 도시답다. 야경 곧 인공조명이 만들어내는 인공적인 풍경이 도시의 마천루를 두드러져보이게 하고, 가로를 오가는 차량의 불빛들이 도시의 활성(생기?)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흔히 도시를 유기체에다 비유하곤 하는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의 불빛들의 잔상이 그 유기체의 몸속에 흐르는 실핏줄 같고 피 같다. 저마다의 욕망을 싣고 몸속 구석구석에 전달하는 적혈구며 백혈구 같다고나 할까. 이 모든 정경은 부감법으로 내려다볼 때 더 실감난다. 그래서 작가는 하늘을 날면서 이 모든 정경들을 실감해보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미처 실감할 새도 없이 마천루의 불빛은 꺼지고, 잿빛 콘크리트 건물도시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도로가 깔리고 건물들이 들어서고 야경이 덧입혀지는, 그리고 그렇게 휘황한 불빛으로 발광하다가 미처 숨 돌릴 새도 없이 어둠 속에 묻히고 마는 픽셀도시는 한눈에도 도시의 시뮬레이션 같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라크 전쟁은 사실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가상현실에서의 전쟁이었다는 말이다. 이 해괴망측한 말은 그러나 흡사 전자게임처럼, 전쟁놀이처럼 수행되는 현대판 미디어 전쟁을, 그 비현실적인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 역시 도시는 사실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뮬라크라 곧 사실은 없는데 있는 것처럼 믿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드리야르의 말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비현실적인 현실을 표현한 것이듯, 작가의 작업 역시 도시라는 현실의 비현실을, 신기루를, 추상을, 덧없는 욕망을 겨냥한 것일 터이다.


장면 2, 큐브도시. 픽셀은 큐브를 닮았고, 현대도시 또한 큐브를 닮았다. 현대인의 생활환경이나 기물들을 보면 큐브 아닌 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집도, 창문도, 책장도, 가방도, 컴퓨터도 온통 큐브 일색이다. 그래서 아마도 큐브야말로 가장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봐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픽셀이 모여 형태를 이루듯, 큐브들이 모여 집을 일구고 건물을 일구고 도시를 일궈낸다. 큐브들은 스스로 움직이면서 이 모든 일들을 해내는데, 관객이 개입해 큐브가 만든 건물이며 도시를 허물어 원점으로 되돌려놓을 수가 있다. 그러면 큐브는 다시 건물이며 도시를 짓는 일을 반복해 보여준다. 관객이 직접 조작해 건물이며 도시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일들을 큐브가 대신 수행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큐브는 큐브 형태의 건물과 도시를 향한 현대인의 욕망을 상징하며, 이로써 큐브의 수행은 현대인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것이 된다. 큐브는 쉼 없이 건물을 짓고 도시를 짓는다. 건물을 짓고 도시를 짓는 큐브의 수행은 자동이다. 이처럼 큐브에 투사된 현대인의 욕망은 멈출 수도 조절할 수도 없다. 욕망은 자동기계다. 그 기계는 이미 개별주체의 손을 떠났고, 도시 자체의 욕망으로, 제도의 욕망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도시 전체를 욕망의 대상으로 전유하는 물화된 리비도, 페티시화된 리비도의 기획이 자동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은 있다. 관객이 개입해 큐브가 만든 건물이며 도시를 허물어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고 했다. 여기서 관객의 개입은 이중적이다. 관객의 개입은 다만 큐브로 하여금 다시 시작하게 하고 새로 시작하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동시에 큐브의 수행을 매번 무위로 되돌려놓을 수는 있다. 비록 시시포스처럼 큐브의 작동을 멈출 수는 없겠지만. 작가는 이처럼 큐브도시 속에 인간 혹은 인간관(비극적 인간? 실존적 인간? 영웅적 인간?)을 심어 놓았다. 세계를 다시 건축할 수만 있다면, 하고 발터 벤야민은 바랐다. 혹 작가는 그렇게 심어놓은 인간을 계기로 큐브의 자동성에 반하여 저마다 머리에 그리고 있는 세계 건축을, 혁명을,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면 3, 회색도시 혹은 위성도시.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거대한 회색도시가 무슨 우주선처럼 보이고, 위성도시처럼 보인다. 여기서 위성도시는 이중적이다. 지구 마지막 날 지구에서 쏘아올린 위성도시의 세기말적이고 비현실적이고 SF적인 판타지를 암시하기도 하고, 대도시 주변에 형성된 베드타운을 떠올리게도 한다. 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이 도시의 두 전망은 표면적으로 동떨어져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한다. 즉 베드타운은 도시로서의 자족적인 기능을 일정정도 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대도시에 종속된 도시인 것이며,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다만 이름뿐인 도시며 유사도시며 비현실적인 도시다. 이렇게 현실적인 위성도시는 그 속에 내장된 비현실성으로 인해 비현실적인 위성도시에 겹친다.

위성도시는 도시(혹은 대도시)라는 관점에서 볼 때 비현실적이라고 했다. 도시의 현실과는 비교되는, 어쩌면 도시의 현실에 반하는, 그래서 도시의 현실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를 모종의 궁리가 잠행되는 곳이며, 도시의 현실을 수리하기 위한 모사로 꿈틀대는 곳이며, 적어도 표면적으로나 사실상 없는 장소 혹은 잊힌 장소며,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시에서 사람들은 타자와의 관계와 소통에 있어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보이는 와중에도 사실은 저마다의 헤테로토피아 속으로 후퇴하고, 저마다의 의식의 골방에 틀어박히고, 저마다의 공상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화면에는 보이지가 않지만, 우주를 떠다니는 위성도시 말고 다른 위성도시들이 또 있으리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런 상상이 가능하다 쳐도 위성도시들 간에 무슨 교신이나 교감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다만 위성도시 저마다 그 자체 자족적이고 완전한(사실은 그렇게 보일 뿐인) 체계를 세상으로 믿는 닫힌 삶을 살지 않을까. 마치 지구인이 지구를 세상으로 알고 있었듯.

우주공간을 부유하는 위성도시가 저마다 헤테로토피아호에 몸을 싣고 착각의 바다를 유영하는 현대인의 고립된 삶에 대한 알레고리 같고, 회색 콘크리트로 뒤덮인 삭막하고 비정한 현대도시의 SF 버전 같다.


장면 4, 아파트단지 그리기. 이 작업에서 작가는 아파트단지를 촬영한 자료를 바탕으로, 마치 드로잉을 통해서 실사를 구현하는 것 같은 이미지 환경을 예시해준다. 드로잉과 실사 사이에 이미지의 스펙트럼이 펼쳐지는데, 앞쪽에 가까울수록 회화의 질감이 강하고, 뒤쪽으로 가면서 실사가 오롯해진다. 그래서 영상작업을 스틸 컷으로 전환해보면 그 이미지가 회화인지 아니면 실사인지가 애매해진다. 실사에 드로잉을 덧입힌 것처럼도 보이고, 드로잉을 개입시켜 실사의 견고한 형태를 허물어트리고 해체한, 그래서 그 구조가 헐렁하면서도 어떤 아우라를 발생시키는 회화처럼도 보인다.

광의로는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리고 말을 만들자면 일종의 마우스페인팅으로 정의할 만한 이 작업은 다른 작업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사진과 회화, 영상과 회화, 실제와 이미지 혹은 허상이 만나지는 접점에 대한, 그 경계가 현저하게 모호해지는 지점에 대한 관심이 읽혀진다. 전작에서의 언어와 의미와의 불완전한 관계에 대한 인식이 또 다른 탈경계에의 인식으로 그 지평이 확장되고 심화되고 변주되는 경우로 보이고, 향후 작가의 작업을 지금과는 또 다른 지점으로 견인해줄 계기로 보인다. 다른 작업들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전제로 이 작업을 보면 잿빛 콘크리트도시와 무미건조한 아파트단지에다 회화(감성?)의 질감을 덧입혀 현대도시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되찾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주지시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