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와 현대예술



1. 낭만적 세계
낭만주의는 세계의 무한한 표면과 층들에 감성적으로 탐닉한다. 그것은 이성적 앎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고전주의와 대조를 이룬다. 고전주의가 동일성으로의 환원이라면, 낭만주의는 타자로의 확산을 보여준다. 환원을 거부하는 낭만주의는 양이 아니라 질을,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성에 경도된다. 낭만주의자들이 중시하는 영감이란, 기계적으로 흐르는 시간과 단절된 질적 도약을 말한다. 낭만주의의 무한에 대한 긍정은 현실의 유한성에 대해 비판적이다. 자신의 한계에 충실한 태도는 현실적 삶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현실에 명확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도록 한다.

그러나 한계의 거부, 즉 재현이나 표현 불가능성에 주목하는 낭만적 태도는 주체로 하여금 현실을 초월하거나 현실에서 소외시킨다. 초월은 관념적 태도를, 소외는 저항적 태도를 낳는다. 근본적인 관념과 저항적 행동이 만나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현실 이상이면 이상이고, 이하이면 이하이지, 현실에 적응하거나 화해하지는 않는다. 일상어에서 ‘낭만적이다’라는 표현은 ‘비현실적이다’라는 의미로 통하곤 한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이 주목하는 현실은 동일성의 깔대기에 걸러지지 않는 이질적 현실이고, 이러한 점에서 낭만주의는 사실주의, 더 나아가 모더니즘과 연결되기도 한다. 미술사에서 들라크루아와 인상파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특정한 사조이기 이전에 일종의 태도, 즉 예술과 예술가들의 영원한 조건이라 할 만한다. 예술사는 자본주의적 상품화를 통해 코드의 지배가 전면화하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 현실에서 소외된 ‘저주 받은 예술가’와 ‘천재’라는 근대적 예술가상이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전면적인 체계화, 즉 코드화는 주로 전자매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낭만주의는 근대 이후 계속되고 가속화된 체계화에 대한 예술가들의 응전을 보여준다. 오늘날 미디어 화 되고 있는 사회에 속에서 낭만주의자들은 또 다른 차원의 길항작용을 하게 된다. 아르코 미술관의 기획전 ‘몹쓸 낭만주의’는 미디어 화 된 새로운 조건 속에서의 낭만주의를 언급한다. 애증이 어린 ‘몹쓸’이란 말은 낭만주의가 가지고 있을 법한 시대착오나 오류를 꼬집는 듯하다.

그러나 이 전시의 작품들은 낭만주의가 하나의 사조이기 전에 예술적인 태도의 문제이며, 고정된 범주를 거부하고 막 생겨나려 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그 점에서 ‘몹쓸 낭만주의’는 미술과 당대성을 만나게 한다. 우선 근대의 낭만주의는 자연에 주목했다. 산업화에 의해 자연이 마구 파괴되는 시점에서 자연은 되돌아가야할 원초적 환경이자 감성의 원천으로 주목되었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새로운 것과 현대적인 것, 역사에 반대해서 감성을 옹호하였다. 그에게 감성은 인간의 기원과 태초의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대자연에 대한 찬양은 문명 비판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순수한 것과 인위적인 것, 진정으로 독창적인 것과 거짓스럽게 새로운 것’이 대조된다. 기계가 지배하는 근대사회에 대항하여 무한한 움직임으로 가득 찬 유기체적인 자연은 풍요와 다양성의 원천이 되었다. 자연 자체가 예술로 간주된다. 굳건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에 주목함으로서, 낭만주의자들의 작품은 자연스러움 속에서 기괴하고 신비한 국면을 보여준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자연은 동일성에 의해 억압된 타자의 저장고로 여겨진다.

박병춘의 [창밖의 풍경-숲바다]는 광대하게 펼쳐진 원시림 위에서 여가를 즐기는 현대적 산수화를 보여준다. 그가 제주에서 만난 숲은 바다와도 같이 무한하다. 이혁준에게 숲은 에덴이다. 하나의 평면에 모두 담아낼 수 없어, 부분적으로 재현된 자연의 단편들을 이어 창출한 공간적 광활함은 시간 또한 무한대로 늘려 시간이 시작되는 지점을 향한다.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이 둥글게 연결된 권대훈의 숲은 그곳에서 길을 잃었던 체험으로부터 왔다. 이러한 정처 없는 헤메임은 공포이자 황홀로 다가온다. 박재환은 곰팡이를 배양하여 미지의 대륙들을 펼쳐놓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매개로 하여, 미시적이며 거시적인 비전을 교차시키는 그의 작품은 고정이 아니라, 과정에 방점이 찍혀있다. 김신일은 시간의 흐름에 그대로 맡겨진 자신의 삶 주변을 미디어로 기록한다. 그의 작품에서 생의 약동은 분절화 된 문자들에 의해 단절되곤 한다.

인간은 도구를 가지고 노동 하면서 가시적 세계의 혼돈에 인간적 질서를 부여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 역시 자연적 혼돈에 인간적 척도를 부여하려는 충동의 연장이다. 인간적 척도와 질서는 객체와 대립되는 주체의 진영을 확실히 한다. 한계의 개념에 충실한 고전주의적 미가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과 닿아있다. 그러나 재현될 수 없는 나머지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근대에 숭고의 미학을 낳았다. 리오타르는 숭고의 미학을 다시 개진하면서 최고의 이념은 비매개적으로 그것의 실재화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무한이란 비교적으로 큰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큰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사유는 절대성에 이를 때 관계는 관계없음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절대성이란 관계함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관계없음이 관계로 드러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형이상학적 실재처럼 부인함으로서, 환영처럼 금지된 것으로 드러난다. 상상력은 광기에서 실행되지만, 제시는 근본적인 척도 너머로 확장되고 부정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부정적 표현, 혹은 제시는 절대적인 것의 현존의 기호이며, 제시 가능한 형식들이 부재 한다는 기호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것은 표현 혹은 제시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다. 상상력은 그것의 현존은 거의 광적인 망상으로 신호를 보내며, 황홀은 절대적인 것을 잠시 동안 직관할 수 있게 한다. 부정의 미학은 이전시대의 종교적 사고인 부정의 신학과 같은 궤도에 놓여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역사의 톱니바퀴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불가사의한 것과 수수께끼를 암시 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들이라는 상징과 새벽 예불 소리를 결합시키는 강소영의 애니메이션 [검은 파도]는 지상의 현실과는 다른 근본적인 현실계를 예시한다. 조이수의 [검고 깊은 호수]는 여행 중에 만난 몽골의 거대한 호수의 물결 속에서 유사 이래 끝없이 굽이쳐 왔던 인간의 욕망을 발견한다. 김지아나의 [빛소리]는 빛이 투과되는 도편들을 이용하여 빛이나 소리같이 포착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바다라는 무한의 상징은 최종운의 작품에서 시시각각 지각을 체험을 만들어내는 연극의 무대로 화한다. 그것은 금색 실 커튼이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파동 치는 [수직의 바다]가 된다.

2. 낭만주의의 절대자아
고전주의자가 보편적 이성을 내세운다면, 낭만주의자는 절대적 자아를 내세운다. 고전주의적 계보가 형식과 내용면에서 진보를 추동하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로 이어졌다면, 낭만주의는 19세기 말 유미주의자들에게 유사 종교로서의 예술, 20세기 말 포스트 모더니스트에게는 해체에의 충동과 타자성을 부각시켰다. 레나토 포지올리에 의하면 낭만주의자들에게 현실은 한계를 가진 것으로 보였고, 반면 자아는 무한한 것으로 우상화되었다. 격동의 시대에 모든 이상과 개념이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 개인의 자아가 유일하고도 확고한 닻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 관념론자들은 자아에 대한 의식을 발전시킨다. ‘존재하는 것은 일체 자아’(피히테)가 되었다. 피히테에게 자아란 일종의 절대성을 띄는 것으로, 여기에서 인간의 자기의식은 철학의 원칙으로까지 고양 된다. 창조적 자아의 절대성을 확신하는 피히테주의는 특히 독일 낭만파에게 공감을 얻었다. 낭만주의자들은 무한이며 자유 그자체, 어떤 법칙으로도 속박되지 않는 예술을 동경하였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작품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정신이 순수하게 계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루소처럼 인간의 유아적이며 원초적인 상태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비합리적 주체로서 예술가는 무한히 승격된다. 예술가는 과거의 옹호자가 아니라, ‘미래의 전령사이자 선구자이며, 예언자로서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입법자’(셸리)가 된다. 그들은 합리주의적인 개인과 달리, 대체되지 않는 개성을 가진다.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예언자로 격상된 낭만주의 예술가는 실제 현실이 그랬다기 보다는 적대적 현실에 대한 반응이자 위기의식의 산물이었다. 낭만주의자는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에서 소외되고 현실을 도피한다. 예술가들의 현실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은 동시에 무산계급화를 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은 통상적인 무산계급과 달리, 정신적으로는 귀족이다. 그들은 방랑자처럼 현실로부터 떠나 있는 대신에, 보통사람들은 알 수 없는 어떤 비전과 방법을 가지고 올 괴짜, 또는 야만적 별종으로 받아들여진다.

최승훈+박선민은 식물 이파리를 이불삼아 잠을 청하는 공원의 노숙자를 자세히 묘사한다. 바쁜 일상에 쫒기는 사람들과 달리 한적한 자연을 점유하는 그들에게서 소외된 자들의 모습이 발견된다. 그들은 낭만주의자들처럼 집이 없다. 잃어버린 아이들과 유년기를 방같이 연출된 무대 또는 풍경으로 표현하는 강민수는 상실과 부재를 다룬다. 김진의 [N_either] 시리즈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잘못 놓여진, 뿌리 내릴 수 없는, 환경과 심한 괴리감을 가지는 주체를 표현한다. 대상이든 주체든 모든 것을 과정으로 해체시켜 버리는 이혜인은 모든 그럴듯한 존재들이 서있는 밑자리에 주목한다. 그것은 현대가 서있는 불안정한 물질적, 심리적 토대의 실상이다. 이들의 작품은 소외와 상실, 부재와 파괴 등을 다룸으로서 사라져 버린 전체, 또는 총체성을 암시한다. 주체이든 객체이든 그 온전성을 유지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언어가 자리를 대신한다. 이창원은 각종 보도 사진들의 표면에서 인물을 오려낸다. 그림자처럼 오려진 실루엣은 조명을 통해 빛으로 투영된다. 인간은 사라지고 구조와 장치들이 인간에 대한 허상을 만들어낸다. 이세경은 도자기 위에 머리카락으로 정교한 무늬를 만든다. 인간의 본체가 아니라, 경계 위의 존재인 머리카락은 코드화될 수 없는 나머지들이 만들어내는 보물의 존재를 일깨운다.

3. 정보화 사회 속의 낭만
정보 혁명을 통해 열린, 전자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의 시대는 인간과 현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상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킨다. 미디어 이론가인 마크 포스터는 [뉴 미디어의 철학]에서 고대와 중세의 상징적 유사물과 근대의 기호적 재현을 넘어서, 정보적 시뮬레이션이 정보사회의 주된 의사소통 방식이라고 본다. 의사소통의 전자적 단계는 구어적으로 매개되는 직접적인 마주함이나, 인쇄된 문자를 매개로 한 자율적 합리적 소통과는 매우 다르다. 전자단계에서 자아는 끊임없는 불안정 속에서 탈중심화 되고 분산되면서 여럿으로 불어난다. 마크 포스터는 말/사물, 주체/객체, 안/밖, 인간성/자연, 관념/물질 등의 경계가 흐려지는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행위와 언어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세워진다고 강조한다.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 로맨서]는 사이버스페이스이라는 말을 널리 유행시켰는데, 사이버스페이스는 ‘모든 나라의 수십억 명에 달하는 인간들이 신경과 컴퓨터를 직접 연결하여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환상’으로 정의된다. 실재는 무한한 관계망으로 해소된다.
이 주체라고도 객체라고도 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곳에서 광대하게 펼쳐진 세계는 낭만주의의 숭고를 다시금 호출한다. 윌리엄 깁슨은 이 소설에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고 몰입한다는 발상을 보여준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 조건]에서 데이터 뱅크는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의 ‘자연’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권력은 정보에 달려 있다. 리오타르는 원칙적으로 모든 전문가가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완벽한 정보게임에 의해 지배되는 포스트 모던적 지식의 세계를 가정한다. 그에 의하면 능력이 똑같다면, 여분의 수행성은 결국 상상력에 달려있다. 상상력은 게임 참여자가 새로운 수를 두게 할 수 있고, 게임 규칙을 바꾸게 할 수 있다. 이 국면에서 단지 체계를 재생산하는 것을 넘어서 차이의 감각을 고무하는 예술가, 즉 낭만주의자들이 요구된다. 그들은 여러 가지 언어 게임들, 즉 언어요소들의 이질성을 부각시킨다.

새로운 현실로 간주된 가상현실은 과학이자 동시에 예술이 된다. 미디어의 복잡한 언어 세계 속에서 안정적인 재현은 사라진다. 리오타르는 여기에서 새로운 숭고미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작가들이 이데아와 이데아의 재현 사이에서 발생하는 메울 수 없는 간격 속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어군들과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진술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틈새 사이에서도 발생되는 숭고이다. 외부 실재와 내부 실재를 분리시키는 장벽을 낮출 때 두께나 한계를 모르는 유일한 리비도적 표면만이 남는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모든 예술은 필름처럼 얇은 표피와 같다는 의미에서 평면적이다. 현대예술은 전통적 담론이 갖는 통사구조가 와해되어 가장 기본적 접속사인 ‘그리고’로 연결된 짧은 문장들의 병렬적 연속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거대한 표면으로 변해버린 숭고한 포스트모던 조건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이질성을 존중해주면서 이질적 어구들 간의 이행을 강조할 수 있을 뿐이다.

아크릴 거울로 만들어진 한정림의 [바벨의 도서관]은 어떠한 것도 직접 재현하지 않으며 정밀한 반사면으로 화한 정보의 표면들을 보여준다. 시선이 주파할 거리가 없는 표면은 재현주의로 가시화되는 원본과 복제라는 이원적 행위를 무화시킨다. 이준은 가장 예측하기 어렵고 조절 불가능한 날씨나 감정을 조이스틱을 조정하는 게임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게임으로 구현된 인공생태계 역시 불확정성이 지배한다. 마크 포스터의 [뉴 미디어의 철학]은 합리적인 개인이나 중심화 된 주체가 본래 갖고 있다고 말하는 자율성이란 언어기호와 지시대상, 말과 사물을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 요컨대 언어의 재현적 기능을 전제한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적인 것의 영역은 갈수록 언어의 자기 지시적 측면을 넓히고 증대시키는 전자통신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언어는 자유의 확장을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주체가 객체의 세계를 통제하는 도구를 넘어선다. 새로운 언어는 스스로 되풀이 지시하면서 지시대상을 무너뜨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의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한다. 정보양식에서 주체는 절대적인 시공간의 한 지점에 위치하는 확고한 입지를 누리지 못한다. 주체와 객체는 거울상의 무한한 유희처럼 우연적이고 불확정적인 관계에 빠진다.

이 경우 실제와 허구, 진실과 허위, 안과 밖은 코드, 언어,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등이 자아내는 희미한 빛 속에 흔들거린다. 조립과 분해의 패턴들로 대상들을 표현하는 컴퓨터 화면은 새로운 거울이 된다. 이 사이버 거울 앞의 주체는 어떠한 모습인가. 사이버 거울은 정보의 패턴으로 주체를 구성 또는 해체한다. 그것은 여전히 실제의 거울처럼 상상적이지만, 상상이 가능하기 위한 거리는 더욱 단축된다. 정보사회에서 숭고의 미학을 강조하는 리오타르는 새로운 게임의 수를 둘 수 있는 상상력을 중시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의 차원으로 함열 되는 시뮬레이션 세계를 말하는 보드리야르는 실재만큼이나 상상의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어쨌든 상상은 정보의 바다 속에서 항해하는 자들에게도 여전한 필수 요건이다. 항해자들은 명확한 좌표를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으면서 길을 찾아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판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투사하는 이동주의 작품과 건들거리는 수백 개의 짝퉁 인형들과 명상을 시간을 권유하는 정승의 작품은 가상현실화(virtualization) 속에서 해체 되는 주체의 모습이다.

출전; 아르코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