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물질성 속에 드러나는 주체



쌀을 비롯한 다양한 오브제를 픽셀로 삼아 이미지를 구축(construction)해왔던 이동재는 이번 전시에서 글자를 활용한다. 바탕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주로 주인공들의 초상이며, 영화의 한 장면이다. 글자는 영화의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작품에는 늘 언어 유희적 요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언어 자체가 형태를 이루는 세포, 즉 형태소가 된다. 그는 2003년 첫 개인전 때부터 쌀로 쌀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콩으로 콩 자를 팥으로 팥 자를, 콩과 팥으로 콩팥을 만드는 등의 작업을 했다. 그의 작품은 지시대상과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기호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식의 인과 관계를 부여한다. 언어유희는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에 관심을 끌게 하는 재미적 요소이지만, 그의 작품은 실재와 언어의 관계라는 철학적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2003년 첫 개인전 [seed]에 출품된, 캔버스 표면을 녹두와 팥으로 뒤덮어 단색 회화처럼 보이게 한 작품에서, 곡물이나 오브제는 조형 언어에 상응한다. 같은 전시에서 그는 흑미로 텍스트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관객은 캔버스 위에 부착된 텍스트를 통해 영화를 또 다른 방식으로 읽게 된다. 그의 작품은 지시대상과 기호의 관계를 다루며, 언어의 투명성 대신에 언어의 불투명성, 즉 물질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언어적 관점에서 미술사를 보자면, 19세기 사실주의에서 20세기 추상 미술로의 추이는 언어의 물질성(불투명성)이 극대화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동재의 작품에서 형태소를 이루는 물질은 지시대상과 밀접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간극 속에서 유희가 이루어진다. 영화 장면이자 내용을 이루는 픽셀의 크기는 7-10mm이며, 가로로 붙여진다. 이번 전시의 작품은 텍스트를 통해 더 구체적 메시지 전달이 가능하지만, 띄어쓰기나 문장부호가 없어서 텍스트의 독해가 쉽지는 않다. 텍스트는 네티즌들이 참여하여 내용을 만들어가는 위키피디아에서 왔다. 분자적 입자의 이합집산을 통해 형상과 의미를 구축해가는 그의 작품은 단순한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여러 원천으로부터 온 텍스트의 엮기와 풀기의 과정을 중시한다.

영화와 텍스트는 둘 다 서사적이며, 자막이 나오는 영화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은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이번 전시에서도 바탕은 단색이다. 색의 표면 위에 오브제가 올라가니까 최대한의 간결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바탕 면은 회색조의 채도가 떨어지는 색상을 선택했다. 필름의 낡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이다. 작가가 그동안 사용해왔던 오브제와 달리, 글자는 인쇄공이 활자를 찾듯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올드 보이, 대부, 양들의 침묵 등, 그가 관심 있게 본 영화 중에서 대비가 확실한 스틸 컷을 골라 사용한다. 대개 한 화면에 한 장면이 들어가고 대중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도상이다. 그것은 이전 작업에서 노란색 별로 오바마 대통령, 김좌진 장군, 체 게바라 등, 대중의 스타를 새긴 것과 연장 선 상에 있다. 잘 알려진 도상은 관객과 쉽게 소통하는 코드가 된다. 이번 전시에서 이미지를 이루는 글자가 다소 중성적인 것과 달리, 그동안의 전시에서는 픽셀이 되는 오브제와 인물의 관계에 집중했다. 가령 알약으로 만들어진 데미안 허스트, 녹두로 만들어진 녹두장군, 모조 보석으로 만들어진 앤디 워홀 등이 그것이다.

물론 한 인물은 한 물질로만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마를린 먼로의 경우 쌀이나 자개단추로도 만들어졌고, 모택동 초상은 노란별과 크리스털 등으로도 만들어졌다. 이동재의 작품에서는 정체성의 상징인 초상이 견고하지 못하고 분자적으로 흩어지려는 경향이 있는데, 픽셀을 이루는 구성성분 역시 가변적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구성과 해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deconstruction’이란 단어에 내포되어 있듯, 구성과 해체는 같은 차원에 있다. 그의 작품은 거리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가까이가면 오브제가 눈에 들어오지만, 멀리가면 오브제는 망점으로 흩어지고 이미지가 견고해진다. 글자를 읽으려면 형태는 사라지고, 형태가 포착될 정도의 거리에서 글자는 읽기 힘들다. 이번 전시에서는 글자를 사용하지만, 이동재를 미술계에 처음 알린 재료는 쌀이다. 쌀에서 시작하여 각종 곡물이나 인공오브제로 확대되었다. 그가 2002년부터 사용한 쌀은 동양인에게 단순한 식량 이상의 상징을 가지면서, 첫 개인전 때부터 자화상을 비롯한 여러 초상에 활용한 바 있다.

2009년 북경 전시에서 선보인, 붉은 바탕에 쌀로 이루어진 모택동은 동양적 실체감을 가진 초상들로 그 무게와 정서를 확보한다. 이번 전시에서 활용된 글자 오브제는 그동안 사용된 다채로운 재료에 비해 쌀만큼의 비중을 가진다. 유기물인 쌀이 자연의 대표라면, 무기물인 글자는 인공의 대표 격이다. 곡물이 몸을 낳는다면, 언어는 의식을 낳는다. 이번 전시에서 글자라는 재료를 통해 의식 쪽으로 방점을 옮긴 듯이 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쌀이든 글자든 모두 언어적 요소가 있었지만, 글자는 더욱 직접적이다. 영화 텍스트의 알파벳 문자들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을 구성한다. 형태소들은 표면에 단단히 부착되어 있지만 그의 작품은 입자들이 순간적으로 헤쳐모인 것 같은 인상을 주며, 영화나 서사가 흐르는 시간의 축을 따라 재배열되면서 변모되리라는 기대를 낳는다. 그것은 확고한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적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메커니즘과 같다.

지시대상과 분리된 언어는 여러 단어들 간의 차이적 관계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동재의 작품은 초상에 기대될 법한 고정된 정체성, 분명한 의식 등이 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차이의 놀이를 통해 자기 동일성이 구축된다. 그의 작품에는 말이 등장하지만, 말중심주의적(logocentric) 사고, 요컨대 형이상학처럼 진리의 근원이나 중심을 성정하지 않는다. 마이클 라이언은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형이상학은 관념적 의미나 진리의 근원으로서 의식에 특권을 부여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동재의 작품 속 영화적 상황 속의 인물은 이러한 특권 없이 끝없이 해독될 수 있는 텍스트에 불과하다. 동일성 대신에 보충, 차이, 반복 등이 들어선다. 그의 작품에서는 영화적 인물이든 역사적 인물이든 반복되는 해석의 산물이다. 독립된 영역으로 특권을 부여받기를 원하는 명증한 것은 그 자체가 감각성 속에, 그리고 참조관계의 무한한 조직 속에 각인된 것이다. 이동재의 초상에 나타나는 의식 역시 기록(각인,inscribe)된 것이다. 반복의 구조는 기호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자기동일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곡물 알갱이나 글자조각은 일종의 표시로서 어떤 다른 것을 대신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기호이다.

이동재의 작품에서 펼쳐지는 기호는 지도처럼 실체를 모방한 기호이다. 여기에서 기호는 세상이나 인물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물질성을 보유한다. 기호는 사물 그자체가 되려한다. 소쉬르로 대변되는 언어학의 출발선상에서 기호는 투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캐서린 벨지는 [비평적 실천]에서 포스트 소쉬르적 이론에 기대어, 언어는 투명하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구성된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은 언어가 개인들과 사물들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언어의 투명성은 하나의 환상이다. 언어는 사고의 모방이 아니라 사고의 조건이 된다. 의미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을 바로 언어이다. 그러나 언어는 고정적이지 않고 부단한 변화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텍스트 내에서 본유적인 것은 의미의 가능성의 범위이다. 텍스트들은 다원적이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개방되어 있다. 이러한 사고는 언어를 단순히 표현의 수단 이상으로 삼는 모더니즘적 사고와 연결된다. 이동재의 작품에서 형태를 이루는 요소인 곡물이나 글자들은 무엇인가를 지시(반영, 표현)하면서도 그 자체의 물성이 있다. 물성은 의미 생성의 주요한 매개가 된다. 언어를 그자체의 목적으로 보는 관점은 ‘언어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도 밝히지도 않는다’고 말한 블랑쇼의 언급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블랑쇼는 ‘작가는 진실을 말하는 사상과 형태를 주는 사상을 구별할 줄 안다’고 강조한다. 블랑쇼에게 유용한 말은 도구이자 수단이며, 행동과 작업, 논리와 지식의 언어, 즉각적으로 전달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구가 그러하듯이 규칙적인 사용 속에서 사라져 가는 언어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예술의 언어가 있다. 그것은 말한다는 것이 일시적이고 종속적이며, 통상적인 수단이 아니라, 본래의 경험 속에서 완성되려고 애쓰는 언어이다. 통상적인 언어는 사물들에 대해 말을 한다. 사물들을 떼어내서 우리에게 건네준다. 그리고 그 언어자체는 언제나 아무 것도 아니다. 상식은 어떤 구별을 가리켜 주는 것에서는 정당화되지만 그 구별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말해주지는 못한다. 여기에 유용한 말 이상의 예술적 말의 존재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유용한 말과 예술적 말을 구별하는 태도는 언어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며, 궁극적으로는 세계와 분리되어 언어의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 상황을 야기한다.

이러한 여정은 시작된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맞게 된 모더니즘의 한계 상황을 알려준다. 언어 자체의 힘을 인정한다 해도 세계 그자체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이동재의 작품은 언어의 물질성이 내재해 있지만, 동시에 창의 역할도 수행한다. 추상이나 구상, 즉 재현주의로 귀결되지 않는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불투명성과 투명성 간에 내재한 긴장이 있다. 현대철학에서 언어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언어적 주체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예시한다. 이동재의 대부분의 작품이 초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 특히 이 전시에서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글자로 된 초상은 변화된 주체의 위상을 살펴볼 계기를 마련해 준다. 캐서린 벨지는 현대 언어학의 성과를 받아들여, 주체성의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은 언어라고 본다. 그것은 주체성에 대한 언어의 우위를 말한다. 개인적 의식의 중심을 해체하는 라캉의 이론에 나타난 바 있듯이, 주체는 더 이상 의미, 지식, 그리고 행동의 원천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이동재의 작품은 주체성 그자체가 하나의 담론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상징적 질서 속에서 구성된 주체’(라캉)는 언어적 차이에 기초를 둔 것일 뿐이다. 작가의 주체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르트는 ‘저자의 주체성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언어 속에서 구성된 것으로, 단지 다른 낱말들을 통해서만 낱말들을 설명하고 무한히 그렇게 계속하는 기성의 사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가는 독특한 초월적 주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텍스트적인 단편을 조립함으로서 하나의 텍스트를 구성한다. 이동재의 작품은 이러한 언어적 주체와 같이 텍스트는 고정되지 않은 장(場)으로 나타난다. 주체의 일관성이나 자아의 연속성은 하나의 환상이자 신화이다. 서로 다른 순간들에서 동일하게 같을 수는 없는 인간은 부단히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되는 하나의 원자인 것이다. 언어의 장으로 나타나는 이동재의 초상들은 주체가 모순의 장소이며, 항구적인 구성의 과정 중에 있음을 알려준다.

출전; 가나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