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전문 영역에서처럼 미술계에서도 ‘여성문화 예술인의 사회진출’ 및 ‘살아남기’의 난점은 비슷한 사회적 원인을 가진다. 이 세미나의 목적인 ‘여성 문화 전문 인력을 위한 정책적 발전 방향’ 역시 사회적 해법을 요구한다. 남성의 경우에 가장으로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굴레가 있는 것처럼, 여성의 경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의 유지 및 재생산--‘결혼이란 배타적인 사유재산의 한 형태이다’(마르크스)--으로서의 가족관계, 그리고 출산 및 육아의 사영역화가 존속되는 한, 문화예술의 영역이든 어디든 여성의 사회 진출은 개인적으로 많은 고난을 극복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은 문화 예술 영역이 단지 잉여나 장식이 아닌, 사회의 필수품으로서 공공적인 영역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공공성이 확보된 영역에서 성적인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약간의 차이가 큰 차이를 낳는 촘촘한 체계화의 세계 속에서 차별은 처벌과 다름없다. 미술의 공공 영역화라는 조건이 선결되지 않는 한 여성이 남성만큼(또는 더) 성취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성 문화예술인이 처해진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는 근본적 방식은 미술을 공공영역에 좀 더 다가가게끔 하는 (남녀의)공통적인 노력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망 아래 논의를 시작하고 싶다.
작가로서의 삶 자체가 매우 힘드니만큼, 여기에 여성(또는 남성)으로서의 존재 자체로부터 비롯되는 어려움이 추가된다고 할 것이다. 미술에 국한시킨다면, 사회적 문제에 문화적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덧붙여진다. 양자는 상호작용하면서 모순을 확대재생산 한다. 정확한 통계 수치를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경험상 미술계는 다른 문화 예술분야처럼 여초 현상이 지배한다. 제도적 차원에서 미술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미술대학(원)의 대다수 학생이 여성이며, 성적 또한 여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뛰어나서, 대략적이라도 학과의 성비를 맞추려면 남학생들에게는 아마도 가산 점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관객도 화랑가의 대표들도 여성이 많다. 그래서 언뜻 미술계는 여성의 문화적 해방구처럼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을 소비가 아니라, 생산의 차원에서 보자면 여성의 숫자(상대적 비율)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가령 미래의 사회구성원과 전문가를 키우는 전형적인 재생산 기구인 교육 영역의 예를 들자면, 여기에서 학생의 대다수는 여성이지만, 교수의 대다수는 남성이다. 숫자로만 본다면 가히 교육의 주체는 남성, 교육의 대상은 여성이다.
그렇다면 생산의 영역에서는? 전업 작가의 길을 전제하는 생산의 영역에서, 출발점에 더 많이 있었던 여성들이 살아남는 비율은 남성보다 더욱 적다. 미술대학을 채웠던 수많은 여학생들 상당수가 좋은데 시집가서 잘 살고 있는데, 작가의 길을 걷지 못한 것에 대해 뭐가 문제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녀가 가정주부라는 시민적 역할에 방점을 찍고, 나머지 시간에 작업이라는 것을 병행한다면(그렇게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녀는 아마추어, 즉 ‘여류화가’ 또는 ‘규수화가’라는 모멸적인 딱지가 붙을 것이다. 가족의 생계 때문에 작가의 길을 접는 ‘추락 천사’와도 같은 남성의 사연에 비한다면, ‘여류 화가’의 문제는 한가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물론 그 수많은 학생들이 다 작가가 되도 문제일 것이다. 결국 여성이든 남성이든 의지와 열정, 재능, 그리고 행운을 겸비 한 소수만이 끝까지 작가로 남는다. 다만, 작가로서의 길에 가장 큰 걸림 돌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닌 어떤 것, 가령 성별에 있다면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공적으로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세 가지 항목-- ① 예술가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이데올로기 ② 예술을 주변화 시키는 이분법 ③ 예술 영역의 그림자 노동 화--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① 예술가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이데올로기
예술가적 주체성 또한 주체성의 정향과 관련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체성은 결코 객관성과 대립 항에 위치한 중립적 성격이 아니라, 남성적으로 정향되어 있다. 주체/객체의 대립은 남성/여성, 문화/자연, 정신/육체 등의 대립 쌍과 관련된다. 여성은 객체, 자연, 육체처럼, 주체의 예술적 소재이며, 자연처럼 고갈되지 않는 영감의 풍부한 근원이고, 매력적인 육체적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다. 가령 피카소처럼 수많은 여성과의 만남이 수많은 양식변화의 주요 원인이 되는 작가도 있다. 역사상에 부침했던, 아방가르드 정신의 화신인 진보적 주체는 이성을 도구로 하여 세계를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권력에의 의지와 분리불가능하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여성은 자극과 신비함을 주는 그 ‘세계’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근대적 주체화의 과정 그자체가 문제시되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주체화가 되는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분리되어야 할 첫 대상이 바로 어머니라고 본다. 이 경계구분을 확실히 못하면 압젝션(abjection)에 삼켜진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아버지라는 제3자와의 동일화는 어린아이를 기쁨과 함께 자칫 정신적인 파괴를 자아낼 수도 있는 어머니 육체와의 접촉으로부터 떼어내서 그를 다른 차원의 주체, 다시 말하면 욕구 불만과 부재를 넘어서 언어활동이 펼쳐지는 상징적 차원의 주체로 만든다고 본다.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도 각자의 개인사 속에서 자율적인 장소, 또는 변별적인 대상,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의미작용을 하는 대상을 구축하기 위해,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적 영역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분리를 통해 여성과 남성, 즉 ‘개인’이나 ‘고유한’ 조직화의 근간이 점차 의미화, 합법화 된다. (여성적)비천함을 승화하고, 상징계로 고양되는 공식 예술계의 언어에 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가부장적 언어, 남성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 유일의 언어가 문제시 되고 있다. 남성에 대항하여 여성이라는 깃발 아래 주체화를 주장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기성의 질서를 유지하는 이항논리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예술가적 주체성을 이루는 ‘개성’이란 차라리 몰개성 화 될 필요도 있다. 그 몰개성 화에는 관념적 이항대립이나 분질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여성성이 내재해 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말하듯이, 한 개인이 자신의 진정한 고유명을 얻는 것은 가장 엄격한 몰개성화가 실행되고 난 후, 개인을 관통해서 지나가는 다양체들에 개인이 열릴 때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다양체의 꿈이 갖는 본질적 특성중의 하나는, 그 각각의 요소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다른 요소들과의 거리를 변경시킨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나 둘이 아니라, 여럿을 향한다. 저자들은 순수한 상태에서 여럿(=다양)을 사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럿을 상실된 통일성이나 총체성의 수량적 파편, 또는 반대로 미래에 올 통일성이나 총체성의 유기적 요소로 만드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 또는 둘이 아닌 성에 바탕 한다. 그것은 ‘상보적(complementary)인 것이기보다는, 종횡무진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유사한 것들의 연결체’(뤼스 이리가라이)이다. 라깡의 이론이 예시하듯이, 반대되는 둘이 모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환상이기 때문이다. 하나 됨의 이데올로기에는 모든 차이를 질식시키는 죽음 충동이 내재되어 있다. 대안적 주체의 언어는 하나를 만들려는 총체 내지 전체성에 균열과 틈새를 가능한 한 많이 벌리는 것이어야 한다.
② 예술을 주변화 시키는 이분법의 문제
예술 자체가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변화 되어 있다면, 성을 불문하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현재에 예술은 주변화, 즉 여성화되어 있다. 주변화 되어 있다고 해서 주변적 존재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부는 중심부의 대안이 아니라, 중심부의 열악한 축소판(복사판)일 뿐이다. 이러한 주변화의 와중에 남성들이 여타의 사회적 영역에서처럼 기득권을 쥐고 있다. 중심/주변으로 대표적인 이러한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하는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에서, 이분법적인 사고는 두 가지 양극화된 용어들을 반드시 서열화 시키고 등급을 매김으로서, 하나가 특권적인 용어가 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억압되고 종속적이며 부정적인 상대편이 되도록 만든다고 본다. 마음/몸의 관계는 이성/정열, 분별력/감수성, 안/바깥, 자아/타자, 깊이/표면, 실재/현상, 메커니즘/활력론, 초월/내재, 시간성/공간성, 심리학/생리학, 형식/질료 사이의 구분과 상호관련 된다.
예술에서 질료와 형식이라는, 고대 이래의 대조 항에 질료를 차지하는 것은 여성, 형식을 차지하는 것은 남성이었다.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서 시작했던 전통을 이어받아 형상을 질료나 몸으로 구별한다. 재생산의 경우, 어머니는 형태 없고 수동적이며 무정형적인 질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통해 형상, 모양, 윤곽, 특수한 형태를 부여받는다고 간주된다. 질료/형상의 구분은, 근대에 와서 객체/주체라는 데카르트적 이분법으로 계승된다. 그 절정을 이룬 것이 근대의 과학기술이다. 근대 이래로, 과학 기술은 전형적인 남성의 영역이 되어 왔다. 과학에 의해 대상화된 영역은 자연을 넘어 기계로 고양된다. 가령 대상화된 근대의 여성은 자연이자 기계이다. 그 최초의 예는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1926)의 여성 로봇 마리아처럼, 통제 불가능한 기계가 주는 불길함에서 발견된다. 남성의 성적 환타지가 투사된 인형과 다를 바 없는 성적 오브제들은 로봇 마리아의 순화된 예일 것이다. 주디 와츠맨은 [페미니즘과 기술]에서 사회전반의 지배적인 사회관계들이 과학을 구성하고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서구과학은 근본적으로 가부장적이다.
주디 와츠맨에 의하면 페미니스트들은 16세기와 17세기에 이루어진 과학혁명을 재조사하면서, 그 당시 출현한 과학은 근본적으로 이성과 객관주의라는 남성적 기획에 근거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문화 대 자연, 마음 대 몸, 이성 대 감정, 객관주의 대 주관주의, 공적인 영역 대 사적인 영역 등, 각각의 이분법에서 전자는 후자를 지배해야 하고, 각 이분법에서 후자는 체계적으로 여성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리를 통한 지배는 자율화를 간취한 근대 예술 역시 진정한 자유화의 과정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체계는 다소간 체계를 체계이게끔 하는 금기를 위반하는 영역, 즉 해방구를 마련함으로서 체계의 위기를 관리하려 한다. 사회의 모순에 대한 유사 해결책으로 위로와 치유라는 장식적(부수적, 주변적, 교양적) 역할을 예술이 떠맡게 된다. 예술은 진지하지 않은 말랑말랑한 것, 즉 연성화 되어, 대중문화처럼 사회의 ‘중요한’ 일과는 거리가 있는 ‘기분 전환’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물론 대중문화나 대중추수주의적인 예술이 고부가가치를 낳는 사업의 영역에 속할 경우, 그 주체는 남성이 될 것이다. 주변화 된 예술은 근대 이래로 사적 영역화가 더욱 공고화한 가정의 영역과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 가정과 작업을 병행하는 여성에게 이 공통의 사영역화는 이중의 질곡이 되고 있다.
③ 예술 영역의 그림자 노동 화
지배적인 이분법은 예술을 주변화 시킨다. 미술이 사회화 된 노동으로 인정받는 것은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의 영역이 대부분이다. 부모들은 자식이 화가가 된다면 반대하겠지만, 인성 교육을 위해 미술학원에 보낼 마음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딸이 미술을 전공하겠다고 하면 아들만큼 반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학원이나 학교가 미술을 통해 경제적 수입이 가능한 전문적 직업으로서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주 영역이 된다. 생산의 영역에서 전업 작가로서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삶을 꾸리는 것은 행운이 따라야 하는 극소수의 일이다. 재생산이든 생산이든 예술은 주변화 되어 있는데, 그것은 마치 가사노동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면서도 그림자화 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가사노동이나 예술은 사랑과 열정으로 채워지는 사적인 것일 뿐이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에서 그림자 노동(shadow work)라는 용어를 한 상품에 추가 가치를 더 해주기 위해 소비자가 행하는 무보수 노동을 지시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경제는 통계적으로 보고된 부분과 보고되지 않은 부분으로 구분 된다. 늘 상 또 하나의 경제가 드리운 그림자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림자 노동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극소수가 속할 뿐인 공식 제도를 벗어난 대다수 미술인들의 활동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제활동이고, 비 화폐 시장이며, 셀프 서비스, 자조 자발적 활동의 영역이다. 분명 사회적 재생산에 속한 영역을 그림자화 함으로서 이 영역에 속한 자들은 착취된다. 이반 일리치에 의하면 그림자 노동은 현대에 유통되는 모든 화폐가치에 내포되어 있으되, 측정할 길이 없는 지하경제의 일부이다. 19세기에 걸쳐 확산된 임금노동의 이면에서 혹은 그와 병행해서 제 2의 경제활동이라 할 수 있는 유례없는 활동이 등장한 것이다. 여성은 더욱 광범위하게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경제에 편입되었다. 오늘날의 그림자 노동은 스스로 돕는 일(자조)로 간주되어 그냥 스쳐지나가는 많은 일들에 묻혀있다. 소수로의 이익 집중을 향하는 체계화가 더욱 공고해짐에 따라, 많은 남성들 역시 그림자 노동이 강요된다. 그것은 많은 노동이 비정규직화 되고 있는 현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여성의 일은 가사든 예술이든 그림자 노동화 되어있어서, 겉으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지만 실제로는 사회 문화의 모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남녀 예술가는 같은 희생자이지만, 가장인 남성은 전문 직업인이자 작가로, 여성은 아마추어나 보살핌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누군가 한명만 작가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남자일 확률이 크다. 성공한 남성 작가 주변에는 연인, 배우자, 어머니와 같은 조력자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선택을 거부하고 그 역이 성립되려면 여성작가는 좀 더 많은 재능과 노력,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 작가로서의 나아감은 많은 역행을 전제한다. 예술의 그림자 노동화는 이성과 이익 중심이라는 남성적 가치의 사회에서 정형화될 수 없는 감성과 낭비에 속한 예술이 처한 입지를 알려준다. 오늘날 그림자 노동은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그래서 여성의 해방은 여성만의 해방이 아니라, 모든 소수자 그리고 남성의 해방인 것이다. 여성은 가장 대표적인 소수자이다. 그녀들은 안의 가장 바깥쪽, 또는 바깥의 가장 안쪽에 있다. 경계 위의 존재들인 그녀들이 작가로 성공했을 때 대부분 괴물 같은 면모가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성에 의해서 차별받지 않는 문화 예술계를 만드는 것은 정의 뿐 아니라, 예술 언어 자체의 풍부 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여성은 모순의 극복을 위한 사회적 운동과 더불어, 모순을 낳는 기본적인 이분법의 극복을 위한 대안의 예술 언어를 찾아내는데 몰두해야 한다. 대항과 대안이 결합되지 않으면, 그 둘은 동시에 힘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출전; 여성 문화예술인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