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유진의 다양한 작품에는 소통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1학년 때부터 그림보다는 설치에 집중한 것은 소통의 접면을 보다 다면화하고 구체화하기 위한 선택이다. 인류의 문화사 자체가 소통의 역사였지만, 세계가 더 좁아지고 더 많이 상호작용해야 하는 현대에 와서 소통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바위 위에 새겨진 고대 상형문자 이래, 모든 정보를 손아귀에 쥘 것을 목표로 하는 현대의 초소형 휴대기기까지, 소통의 매개는 눈부신 진화를 해왔다. 그러나 현대성이 기존의 공동체를 점차 사라지게 하면서, 소통은 개별 입자로 흩어진 개인들 사이에서 기계적으로 오고가는 코드가 되어 버렸다. 더 이상 외부의 현실을 모방하지 않는 자기 참조성은 모더니즘 뿐 아니라, 컴퓨터 화 된 현실에 관철되는 원칙이 되었다. 미디어가 미디어를 지시할 뿐인 매체 지배의 사회에서, 소통은 다시금 면 대 면의 몸 적 감각을 복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술은 소통이다. 삶이든 예술이든 소통은 지상명령이 되었지만, 소통이야 말로 창의적인 방식을 요구한다.

그렇지 못한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소통은 인간들 사이를 그냥 스쳐갈 뿐이다. 소통 지상주의 이면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더욱 소원해지고, 의미와 메시지보다는 무의미와 잡음이 더 많아진 현실이 있다. 3명의 손이 춤추듯이 움직이는 [어떤 대화](2008)는 소통의 어려움을 토로한 작품이다. 얼굴을 빼면 몸에서 가장 표현적인 부분인 손은 수화도 아니고 바디 랭귀지도 아닌, 무의미한 동작들을 계속한다. 그것은 상대와 무관하게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시도 쉬지 않는 손놀림은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의 행태이다. 그러한 사람은 결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일방적 소통에서 대화는 진전되지 않는다. 거울과도 같은 다양한 인터페이스에 둘러싸여 사는 현대인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나르시시즘적 성향은 소통의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하다. 작품 [손의 습격](2010)은 소통의 일방성이 개인에게 가하는 압박을 표현한다. 다른 사람 손들이 계속 얼굴을 만져서 그 힘들의 작용을 받는 얼굴은 이미 자기 얼굴이 아니다. 작품 [풍선 펑](2009)은 물로 채워진 풍선이 작가를 압박하고 점점 커지면서 결국은 터진다. 마치 자신의 얼굴 또한 풍선처럼 터질 것만 같은 모습이다.

작품 [the moment](2011)처럼 유리 컵 물의 표면이나, 작품 [breath](2011)처럼 자석으로 움직이는 철가루 등, 작가는 미시적인 차원에도 포커스를 맞추면서 주변의 역학관계에 의해 변화하는 표면이나 입자를 보여준다. 이러한 작품들은 실험실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안유진의 작품에서 소통은 무중력적이고 중성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권력)의 작용을 받는다. 힘은 소통과 부차적인 관계가 아니라, 몸통을 이루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이라고도 긍정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소통이 ‘블루 오션’이 아니라 ‘레드 오션’에서 이루어질 경우, 힘은 억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4th part of ㄴ ㅏ ㅓ](2010) 시리즈는 신축성이 있는 자루에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가서 몸부림치는 장면이 연출되는 작품들이다. 폐소공포증적인 공간에서 서로 편한 자리를 찾으려는 끝없는 다툼이 벌레가 꿈틀대는 듯한 기괴한 운동을 만들어 낸다. 작품 [let me in](2008)에서는 좁은 스폰지에 많은 사람들을 올라서게 함으로서 서로 안 떨어지려고 균형을 잡는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경쟁과 균형에 대해 말하지만, 협동 역시 소통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작품 [conversation](2008)에서는 탱탱볼을 판 밑에 깔아서 그 위에 올라서면 미끌어지게 설치하여 상대와 손을 맞잡고 균형을 잡아야 하는 순간을 요구한다. 작품 [저쪽에서 만나요](2009)는 전시장 입구에 보들보들한 재질로 대형 로울러 같은 기둥들을 세워 관객들로 하여금 통과하게 한다. 저쪽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온몸으로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 속에서, 내가 너에게로 가는 일, 또는 네가 나에게로 오는 일, 요컨대 인간들 간의 관계 맺기가 쉽지 않음이 드러난다. 내가 완전히 흐트러질 것을 각오하고 온몸을 부딪혀 이 장애물을 극복하면 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안유진 작품의 특징은 전신의 감각을 요구하는데 있다. 손가락 끝으로만 뭔가 조작하여 소통이 이루어 졌다고 믿는 미디어 사회의 지배적 관습과 달리, 그녀의 작품에는 온몸을 통한 소통이 있다. 그것은 아이디어와 개념만 거창하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는 무용지물의 작품과 매우 다르다. 소통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들이 정작 자신은 소통 불능에 빠져 있는 역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봤기 때문에, 이렇게 명료한 과정과 결과를 도출하는 작품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은 재료 및 장치에 대한 연구의 면밀성 뿐 아니라, 나와 너로부터 비롯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로부터 온다. 안유진의 작품에서 ㄴ, ㅏ, ㅓ 라는 세 가지 음소는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되어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작품 [5th part of ㄴ ㅏ ㅓ](2010) 시리즈는 전시장의 통로에 설치된 ㅏ를 관객이 지나가며 밀치면 돌아가게 되어있다. 여기에서 나와 너는 그 위치나 의미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나는 너가, 너는 나가 될 수 있다. 작가는 ‘ㅏ가 회전함에 따라 나와 너가 생기게 되는데, 우리는 나와 너의 위치를 동시에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글자놀이는 주체와 객체가 결정되는 가장 근본적인 자리가 바로 언어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주체는 다름 아닌 주어의 위치에 있는 자이다. 소통하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언어적 주체인 것이다. 다른 생물체에도 이런저런 소통의 수단은 있지만, 음성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후대에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안유진의 작품에 종종 나오는 주사위는, 소통에는 언어적 규칙이 있지만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있어야 내가 된다. 자기 보호 본능의 산물에 불과한 유아독존은 거부된다. 안유진의 작품은 나와 너로 구별된 독립된 존재 보다는 양자의 사이에 주목한다. 나와 너가 요구하는 서로의 서로에 대한 필요성은, 나와 너의 동일성이라기보다는 동일성 속의 타자, 타자 속의 동일성이다. 폴 리쾨르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출발점에 있는 순수한 의식, 홀로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나의 사유들이 나 아닌 어떤 타자에게 잠재적으로 동시에 귀속시킬 수 없다면, 그것들에 대해 의미 있게 말할 수 없다고 본다. 자기가 타자를 내밀하게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한쪽은 다른 한쪽 없이 생각되어지지 않으며,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오히려 이동한다는 점이다. 그는 타자가 단순히 동일자의 상대물 일 뿐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긴밀하게 구성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요컨대 타자는 동일성 안에서 나를 결집시키고 나를 확고히 하며, 나를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가 이렇게 설정될 때, 재현의 철학은 무너지고 만다.





폴 리꾀르는 역시 타자를 중시하는 철학자 레비나스를 인용하면서, 재현 철학은 관념적이고 유아론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무언가를 자신에게 재현/표상한다는 것은 그것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자신 안에 그것을 포함시키며, 따라서 타자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타자는 나의 복제, 또 다른 나가 아니라 나와는 다른 진정한 타자가 될 것인가. 나와 너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안유진의 작품은 재현주의와 거리를 둔다. 소통을 중시하는 그녀의 작업은 자신을 타자로 노출시키는데 역점을 둔다. 레비나스는 [존재와 다르게]에서 소통의 열림은 자아의 위험한 발견 속에, 성실성 속에, 내면성으로부터의 결별 속에, 그리고 모든 은신처의 포기 속에, 상처로의 노출 속에, 상처받을 수 있음 속에 있다고 본다. 동일자와 타자 간 공존의 의식 속에서 사회적 본능이 탄생한다.

작품 [7인의 빨래 털기](2010)에서는 공원에서 만난 행인들과 빨래 털기 퍼포먼스를 한다. 서로 마주보고 대화하며 박자도 맞추는 빨래 털기는 주체 앞에 마주선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장면을 기록하는 기계 외에 대단한 첨단 기기가 동원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상호작용적인 작품이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허공으로 발신한 메시지들이 잔뜩 떠다니고, 사적인 공간에 나를 숨기고 상대방 훔쳐보기에 열중하는 왜곡된 소통이 번성하고 있는 시대에, 안유진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소통의 원초적인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소통은 이렇게 명백한 목표 아래 상호적 협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적으로, 소통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도 우리는 소통, 소통, 하는 것이 아닐까. 올해 9월 청주 스튜디오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명이기도 한 작품 [in the darkness]는 껌껌한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으로 하여금 동아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줄을 늘어뜨려 줄에 의지해서 나아가게 했다. 빛이 없는 공간 속에서, 관객은 시각이 아닌 촉각만으로 정보를 얻어야 한다. 온몸에서 발원하는 촉각에 의지해야 하는 관객은 코드화 된 스펙터클 사회를 추동하고 나와 너를 대상화하는 소통의 불모성에 역행한다.

출전; 청주 미술창작 스튜디오 공동 워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