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 뿐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림 안에 메시지를 요약하는 부제까지 일일이 써 넣는 육종석의 작품은 ‘저항미술’, ‘리얼리즘’, ‘도그마티즘’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의 ‘저항미술 성명서’(2008)에 담긴 저항의 대상은 사회, 작가주의, 재료학, 상품성, 안락함 등이며, 마지막에 ‘인간을 탐구하며 저항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가 저항한다는 항목들은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젊은 작가로서 자기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다짐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저항이라는 키워드는 환경파괴나 전쟁 같은 경악할 만한 사건들, 군중들, 바리케이트, 선동자, 방관자, 진지한 주인공 등을 연쇄적으로 불러들인다. [저항 삼단화-전조-분쟁-충돌](2009)은 작품의 주요 요소들이 다수 등장하는 대작으로, 갈등이 생겨나 충돌하는 서사가 삼면화로 펼쳐진다. 서사가 전개되는 방향에 초월적 존재가 군중 위에 떠 있다.

시위하는 군중들이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좌우로 긴 스펙터클한 풍경은 전조->분쟁->충돌이라는 보편적인 서사구조를 따를 뿐이다. 작품 속 군중들은 강한 움직임을 만들며 돌진하고, 노랑머리에 하얀 옷을 입은 수호천사 같은 존재가 함께한다. 군중과 초월자(작가는 동서양이 공존하며, 그/녀인 중간자적 존재라고 말한다) 양자는 사안에 따라 하나가 되기도 하고, 대비를 이루기도 한다. 작품 [notitle-절망의 끝에선 구원의 손길은 보이지 않는다](2010)에서, 아치형 무대 위에 춤추는 듯한 하얀 옷의 사람이 보이며, 작품 [도그마티즘-행진에 동참하라](2008)에서는 천사 같은 존재가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대중의 행진을 주재한다.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선지자적 존재는 임박한 최후의 심판을 위한 중립적 관찰자일지도 모른다. 각각의 사람들이 하나의 떼거리로 보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관찰자가 필요할 것이다.

가령 인간이 평등하다고 할 때, 이 원칙은 또 다른 초월적 시점을 전제하고 있다. 어떠한 역사적 시기에 인간은 신 아래에 평등했던 것이다. 육종석은 자신의 작품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풍자와 표현주의, 연극적인 무대장치 등이 활용’되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그 미학에 관철되는 전형성이나 당파성, 전위적 의식이 작품에서 발견되지 않으며, 단지 작가가 사회의 현실적인 차원에 주목하고 있음을 예시한다. 2007년부터 시작한 ‘도그마티즘(Dogmatism)’은 그 사전적 의미 외에 ‘도그(Dog)와 오토마티즘(Automatism)’의 합성어이며, 이것은 곧 ‘저질적이고 지저분하며 쓰레기 같은 드로잉의 한 방법’이다. 그의 작품에 많이 나타나는 다양한 장 또는 무대 위의 군중들은 현대인의 속성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이다. 육종석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간상은 다소간 부정적이다. 그들은 ‘이기심, 질투심, 교만, 저열한 군중 심리’에 휘둘린다.





‘도그마티즘’의 형식 또한 ‘독단적’이면서도 ‘저질적인’ 의미를 살린다. 군중들 하나하나는 속이 듬성듬성 보이는 강정 같은 존재이다. 허(虛)한 이 부정적 존재들이 겹쳐져서 나도 너도 아닌 괴물 같은 존재가 탄생한다. 이 군중이라는 괴물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의해 추동된다. 과장된 동작과 리얼한 표정이 합쳐진 캐리커처 스타일의 인물 드로잉은 풍자적이다. 도미에는 그가 존경하여 작품에 온전한 형상으로 등장시키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러한 인물들 중에는 도스토예프스키, 밥 딜런 등이 있으며, 자화상 또한 빠지지 않는다. 작품 [notitle-요즘 유행하는 미술](2011)에서 모니터들이 그림들처럼 죽 걸린 ‘매체미술’들, 그리고 유령처럼 붕 떠 있는 인간 기호들 앞에서 화가로서 항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묵직하게 보여준다. 작품 [notitle-무엇을 할 것인가](2011)에서는 작업실 안의 고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비좁은 작업실이지만 천정은 작가가 수행할 운명적인 과제가 새겨진 하늘로 변해 있다.

작가에 의하면, 다른 인물에 비해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사람들은 유동적인 다른 것들에 비해 변하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 인물이 아닌 사물들, 가령 사과나 술병 같은 것 또한 군중들에 비해 견고하다. 그것들은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이기 보다는, 예술과 음식이라는 상징으로 여러 작품에 나타난다. 예컨대 사과는 근대미술을 시작한 세잔의 사과부터 입시미술의 주요 소재인 사과를 떠오르게 하며, 술은 영감과 광기를 상징할 수 있다. 군중들은 무대, 또는 장(場)위에서 외치고 싸우고 죽곤 한다. 주요 무대는 광장, 시장, 파티장, 공연장, 패션쇼 장 등이다.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발동하여 전시장 또한 빠지지 않는다. 작품 [도그마티즘-전위적 나뒹굴기](2007)에서 행위예술을 하는 듯한 자세로 뒹구는 시체더미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이라크 전쟁이 그 무대이다. 작품 [도그마티즘-축제] (2008)에서는 붉은 무대막이 처진 무대 가운데 흥행사가 어지러운 사람의 무리들을 향해 떠들고 있다.

작품 [도그마티즘-하찮은 구경거리](2007)에서는 밥 딜런과 작가 자신, 그리고 식탁 위의 사과만 사실주의 기법으로 처리되어 있고, 작가가 보기에 ‘하찮은’ 작품들은 작품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관객들과 하나가 되어있다. 작품의 무대, 또는 장의 빠지지 않는 소품은 전경들과 바리케이트이다. 바리케이트는 비합리적인 힘들에 추동되는 군중의 힘을 막아서는 역할을 한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따라 얽혀서 대치하는 군중들 앞의 바리케이트는 적도 아니고 안전판도 아닌, 흐르는 에너지를 멈추게 하는 방해자로 나타난다. 선동하거나 시위하는 군중들 한켠에 방관자들 또한 존재한다. 작가는 익명의 구경꾼들에서 대중의 방관자적 속성을 강조한다. 작품 [notitle-우리는 시체더미를 밟고 일어섰으며 한 번도 스스로 일어선 적은 없다](2010)에서 안개에 싸인 아래의 시체들 위로 한가하게 자전거 타는 모습이 보인다. 작품 [notitle-마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듯](2011)에서 대재앙을 안주거리 삼아 구경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다.





육종석의 작품에서 대중은 일차원적이고 말초적인 관심사에 우왕좌왕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그들과 대비되는 몇몇은 보다 초월적이다. 종교가 약화되는, 또는 자본으로 대치되어가는 근대사회는 초월성을 약화시킨다. 현대사회는 서구의 실용적인 자유주의가 지배하는데, 그것은 수지 개블릭이 [모더니즘은 실패했는가]에서 말하듯이, 생활의 사적인 즐거움과 자유를 위해서 모든 초월적인 목표를 포기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개인주의적인 현대성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는 그들에게 유용한 것, 좋은 것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단순한 장소일 뿐이다. 경멸할만한 대중들의 면모는 생산자가 아닌, 사적 쾌락과 욕망에 빠져 있는 소비자로서 위치에서 발원한다. 돈 슬레이터도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개인의 자기이해 추구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아담 스미스)처럼, 사회가 질서정연하고 발전할 수 있는 충분조건으로 간주되어왔다고 본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합리적 경제행위와 시장이었지만, 전 세계의 사람을 소비자로 간주하는 시장이라는 그 유일한 장이 세상을 잠재적이고도 명시적인 전쟁터로 만든다. 자본주의가 전개되면서 ‘이해관계는 열정을 누르고 시민성이라는 것을 부각’(앨버트 허쉬먼)시켰지만, 열정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라지지 않았다. 육종석의 작품에서 열정은 대중의 무의식과 작가(및 창조적인 존재들)의 의식 양편으로 갈라지는 듯하다. 관료주의와 기업이 지배하는 형식상의 합리주의 이면에 대중은 소외되고 무정부와 아노미 상태에 놓인다. 그의 작품에는 여러 힘의 영향 아래 있는 군중이 있으며, 대개의 사건은 원인도 목적도 불확실한 집단적 폭력이다. 아수라장이 된 무대는 문명 이전의 야만 상태를 떠오르게 한다. 사실 그것은 관료와 기업에 의해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의 짝패이다. 희생양의 신화가 예시하듯이, 사회의 기원과 구조 자체가 폭력으로부터 발원하였으며, 이성에 의해 억압된 폭력은 늘 잠재적인 분출구를 노린다.

이브 미쇼는 [폭력]에서 한편으로는 산업 사회에서 폭력의 가능성이 감소되지만, 체제의 폭력을 감소시킬만한 기준들은 더 이상 없다고 본다. 사회는 현실에서 폭력을 배제시키려고 하지 않으며, 단지 폭력을 억제하려고 한다. 폭력은 사회적 도구화와 규칙의 취약성 속에 있다. 폭력은 제압당하고 길들여졌지만, 항상 위험한 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분쟁과 폭력의 원인에 대해서는 성악설과 성선설이라 할 만한 두 가지 유력한 가설이 있다. 이브 미쇼는 홉스와 루소를 다음과 같이 대조한다. 홉스에게 자연은 절대적인 불안정 상태, 즉 규범의 부재 상태이다. 여기에서 경쟁과 위험이라는 총체적인 상호성이 나타난다. 반면 루소의 경우 자연적으로 만족과 필요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상태로서, 전쟁의 조건이 없고 전쟁을 할 욕망이 없는 평화의 상태를 전제한다. 홉스의 경우 자연 상태는 절대적 폭력이며, 루소의 경우는 이런 것을 스스로 알 수 없는 공허한 평화이다. 이 두 사람의 경우 비사회적인 상태는 하나는 규칙이 없고, 다른 하나는 관계가 없다.

홉스의 경우 충돌은 불충분한 재화를 중심으로 한 욕망의 경쟁에서 비롯되었으며, 루소의 경우 이 충돌은 순수한 자연 상태의 종말 및 인구 증가에 특히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만족스러웠던 자연적 균형을 전복하는 일이다. 따라서 사회는 혼란한 자연 상태에 규칙을 부여해야 한다. 이것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연의 폭력과 인간들 사이의 인간의 폭력이라는 이중적 폭력이 제거된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나타나는 육종석의 작품 속 군중들은 홉스의 가설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홉스이든 루소이든, 그의 작품이 제기하는 중요한 점은 사회 현상 핵심에 존재하는 비사회적 현상에 관한 사유이다. 의식과 무의식, 개인과 대중, 법과 폭력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식의 홉스적인 주장에 내재된, 자연 상태와 폭력의 동일성 자체가 주권자의 절대 권력을 정당화한다고 본다. 법과 폭력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하다. 자연과 문화, 폭력과 법이 서로 연결 고리를 이루는 영역을 표현하는 육종석의 작품은 예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법정치적 영역의 본질적 속성을 폭로한다. 오늘날 예외는 일상이 되었기에, 다소간 붕 떠 있는 듯 한 그의 그림들은 나름의 현실성을 갖는다.

출전; 2011 대전 레지던시 공동 워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