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철 / 의미의 의미를 묻는



점으로부터, 구멍으로부터, 흔적으로부터. 전작에서 이종철은 점을 채집해 보여준다. 거리를 다니면서 주로 벽 위에 새겨진 점들을 사진으로 찍어 재구성한 것이다. 반복 열거된, 그러면서도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이 점들은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파생시킨다. 점들은 그것들이 원래 속해져 있던 맥락으로부터 떼 내어져 다른 맥락 속에 집어넣어진다. 탈맥락과 재맥락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체성이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진다. 말하자면 그 점들은 처음부터 점은 아니었다. 그저 무의미한 크랙이나 우연한 흔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작가의 개입(간섭과 조작?)으로 인해 비로소 점들로서 오롯해진다. 무의미하고 우연한 흔적도 점이라는 의미도 맥락 속에서의 일이다. 맥락 없이는, 맥락 밖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맥락은 의미가 가능해지는 전제이다. 맥락이 움직이면 의미도 움직이고,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진다. 그렇게 무의미하고 우연한 흔적이 점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시점문제와 거리문제를 건드린다. 마치 카메라의 줌처럼 멀리서 보면 점이 되고 가까이서 보면 구멍이 된다. 이로써 의미는 맥락과 관점에 연동된 것임이 드러난다. 무의미한 흔적을 점으로 읽는 것도 관점이요 구멍으로 읽는 것도 관점이다. 그 무의미하고 우연한 것을 흔적으로 읽을 것인가, 점으로 읽을 것인가, 구멍으로 읽을 것인가. 모든 흔적은 언제나 이런저런 사연 위에, 점은 형식논리 위에, 구멍은 심리학 위에(호기심?) 정초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정초되고 열린 전망들 가운데 어떤 흔적이며, 어떤 점이며, 어떤 구멍인가. 우리는 흔적으로 남은 점의 사연을 알 수가 없고, 구멍의 심리학에 대해선 겨우 이런저런 추측을 할 수가 있을 따름이다. 사연과 심리학은 부재하는 것이어서, 점과 구멍이 어떤 사연과 어떤 심리학을 표상한다고 확신할 수가(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과 구멍의 의미는 언제나 애매모호한 채로 열려져 있다. 그렇게 열린 점이나 구멍이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가? 아니면 시간의 풍화? 아니면 노동의 흔적? 아니면 우연한 흔적? 아니면 부재의 증명? 아니면 존재론적 상처? 아니면 세계의 기원(이를테면 옴파로스 같은)? 아니면 우주의 표상? 아니면 어떤 좌표? 아니면 그저 무미건조한 기호?
일견 무미건조해 보이고 다소간 개념적으로 보이는, 점을 소재로 한 이 일련의 작업들은 향후 전개될 작가의 작업의 예고편에 해당한다. 의미들의 유희, 기표들의 놀이, 그 자체가 새로운 기표로서 정초될 기의들의 무한연쇄에 대한 탐색과 탐구와 탐욕과 탐식이 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꽃으로부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무의미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비로소)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란 시다.
세계는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세계는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학습된 것인가.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다르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세계는 언제나 의미세계이다. 세계는 언제나 의미세계임을 피할 수는 없다. 무의미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세계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꽃은 꽃이라는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비로소 꽃이 되고, 그 의미가 지시하는 한에서만 꽃일 수 있다. 시인이 명명해준 꽃이 나에게도 여전히 꽃(최소한 같은 꽃)일 수는 없다. 시인이 명명할 때 일어난 사건 그대로 불가침과 불가지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시인이 명명해준 꽃의 의미 속으로 나는 결코 뚫고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모든 시어는 개인적인 성역 혹은 성좌들이며, 순결이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이렇듯 의미 밖에 있는 꽃, 의미를 덧입지 못한 꽃, 무의미한 꽃은 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미세계 뒤편에도 분명 세계는 전망으로 열리고, 의미 밖에서도 꽃은 핀다. 다만, 그것을 세계라고 그리고 꽃이라고 명명할 수가 없을 뿐. 세계(혹은 의미세계)와 세계 자체는 다르다. 어쩌면 세계와 세계 자체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의미세계는 다만 세계 자체로부터 건져 올린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뒤죽박죽된 인식과 무분별한 개념의 허접한 조각들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꽃이라는 이름이, 의미가, 개념이 꽃 자신(존재 자체)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종철의 꽃 그림은 생화라기보다는 조화 같다. 꽃이라기보다는 꽃의 이미지 같고, 꽃의 의미 같고, 꽃의 개념 같다. 세련된 형태와 색감이 고도로 인공적인 느낌을 주고, 화려하고 장식적이고 무미건조한, 투명하고 반투명한, 유혹적이고 금욕적인 필름페티시 같다. 식물적이기보다는 광학적이고, 촉각적이기보다는 시각적이다. 꽃의 이미지와 의미와 개념으로 견고하게 코팅돼 있어서 결코 그 이면의 꽃의 실제(생리와 생태)에 다다르지 못하게 막는다. 그래서 꽃의 실제보다는 꽃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 이를테면 꽃이라는 이미지, 꽃이라는 의미, 꽃이라는 개념의 용법(화용론)을 오히려 더 잘 읽게 해준다. 이를테면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화려한 꽃은 머잖아 시들 삶을 상징한다. 낭만주의 사제인 노발리스의 푸른 꽃은 죽음을 상징하고,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데카당스를 상징한다. 그리고 여기에 성적 페티시를 암시하는 조지아 오키페의 꽃과 스테레오타입으로 나타난 앤디 워홀의 꽃에 이르기까지 꽃의, 꽃이라는 의미의 화용론이 전망으로서 열린다. 그 전망 위로 호출된 꽃들(꽃의 의미들)은 하나같이 현대의 비전을 열어주는 것들이다. 곧 죽음의 알레고리로 번역되고, 개념화되고 사물화되고 물신화된 꽃의 용법을 예시해주는 것들이다.
그 용법이 차갑고 건조한, 인공적이고 현대적인 작가의 꽃 그림과, 그리고 그 의미와 통한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란 수많은 문화적 원천에서 비롯된 인용의 직물이라고 했다(실제로 텍스트의 의미는 직물이란 말에서 유래했다). 이종철의 꽃 그림 속엔 이런 현대적인 꽃 이야기들이 날실과 씨실로서 직조돼 있다(현대란 아마도 실제가 의미의 화용론에 자리를 내어준 세계며, 죽음으로 번역된 사물들의 세계, 그래서 점프하는 의미들로 전유된 죽은 사물들이 알레고리 속으로 침하되거나 그 표면 위로 미끄러지는 세계를 의미할 것이다).

의미로부터 Visual Poem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를 언어의 용법 곧 화용론에서 찾는다. 죽은 의미들(단어 혹은 언어들)의 집인 사전 속에서라면 모를까, 의미는 도무지 고정되지가 않는다. 그나마 최소한으로 의미가 정박되는 곳을 찾는다면 그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용법 속에서일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너를 사랑해란 말의 의미를 나는 결코 알지 못한다. 어떻게 사랑한다는 것인지, 얼마만큼 사랑한다는 것인지, 도대체 사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 말을 하고 듣는 화자와 청자, 그리고 그들의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만 오롯하게 물어지고 답해지고 이해되고 전달될 수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내가 같은 말을 사용할 때와 결코 같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가치론적인, 감정적인, 강도와 정도의 수위가 민감해지는 말의 용법 속에서 더 클 것이다. 여기에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일치가 순전히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라고 했다. 더욱이 롤랑 바르트는 쾌락을 위해 텍스트를 전유한다. 바르트에게 쾌락은 공유할 수 있는 의미, 객관화할 수 있는 의미, 그래서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의미의 가능성을 해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용법과 맥락(의미는 어떤 용법과 맥락 속에서만 겨우 정박될 수 있을 뿐이라는)에 대한 인식은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듯 자유자재한 언어의 용법이 열린 개념에 기댄 예술의 용법을 열어주고, 특히 알레고리와 아이러니와 패러디, 사물의 전치와 자동기술법과 자유연상기법, 의식의 흐름기법과 낯설게 하기를 비롯한 상당한 시어들의 용법과 통한다.
이종철의 꽃 그림 위에 전사된 텍스트는 분절되고 해체되고 재조합되는 과정에서 처음의 의미가 비틀어지는, 그래서 다른 의미를 의미하고 불러들이는 의미들의 연쇄를, 일종의 의미놀이를 예시해준다. 여러 흥미로운 경우가 예시되고 있지만, 그 중 주목되는 경우로 치자면 를 들 수가 있다. 모마는 뉴욕현대미술관의 머리글이다. 컴은 온다는 동사이다. 그리고 코마는 의식불명상태를 의미한다. 하이쿠처럼 음절과 음운을 맞춘 분절된 의미들을 하나로 꿰맞춰보면 대략 모마는 코마상태에 빠졌다거나, 혹은 모마가 현대미술을 코마상태에 빠트릴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표면적인 의미?). 그래서 아서 단토가 주장하는 예술의 종말을 증언하는 예증이 된다(숨은 의미?). 이도저도 아니면 단순히 모마가 코마를 주제로 한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즉자적 의미?). 여기에 분절된 음절들을 배치하고 배열하는 여하에 따라서 그 의미의 경우의 수는 사실상 끝도 없이 이어질 수가 있다. 그래서 나와진 텍스트가 이다. 감탄사를 소재로 한 이 텍스트에서 영어철자 OO 혹은 OOO는 무한정 반복되는 말 혹은 소리 혹은 철자의 줄임말로써 사실상 무한 혹은 무한성을 의미하고 암시한다. 그 자체 하나의 의미가 어슷비슷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무한정 미끄러진다는, 그렇게 무한 연쇄된다는 불완전한, 비결정적인, 열린 언어용법의 예증처럼 읽힌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들을 이라고 부른다. 대략 시각의 시 혹은 시각적 시를 의미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시는 불완전 언어 혹은 비정상성 언어를 도구(?)로 사용한다. 그 도구는 완전 언어 내지는 정상성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제도의 언어용법과 다르다. 그리고 대립된다. 제도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언어를 도구로 한 제도의 기획은 스테레오타입과 자기동일성의 논리, 정체성의 논리와 클리세를 향한다. 여기에 맞선 시의 기획은 비동일성의 논리와 차이의 논리를 지향한다(롤랑 바르트의 쾌락적 텍스트가 바로 이 지점에 물려있다. 이를테면 재현 가능성으로부터의 탈주). 이로써 어쩌면 시로 대변되는 예술의 기획은 의미를 고정시키려는 제도의 기획에 의해서 타락한 언어를 구출해내는, 그래서 그 의미가 고정되기 전의 풍부한 의미의 다발을 복원하려는 기획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업, 특히 텍스트는 그 기획을 예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