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9.1—10.3, 원앤제이 갤러리)
이소정 전(9.1—10.2, 갤러리 2)
잔잔한 파스텔 조 색상으로 그려진 김수영과 이소정의 크고 작은 회화들은 재현과 추상, 추상과 구체와의 역학관계가 있다. 이들의 작품은 재현과 추상이 겉보기와 달리 매우 밀접하다는 것, 그리고 지시대상으로부터 더 멀어진 조형언어는 새로운 현실을 구축해 나간다는 것을 알려준다. 낡은 빌딩의 모퉁이를 그린 김수영의 작품은 애초의 참조대상에 내재된 기하학적 패턴이 화면에 남아있고, 자연에서 추출된 단위구조를 작가가 정한 규칙에 의해 다양하게 배열한 이소정의 작품은 유기적 패턴이라는 차이가 있다. 현대적으로 짜여 진 환경과 몸, 또는 무의식을 암시하는 그들의 작품은 전체와 부분 사이의 관계를 가늠할 수 없는 단편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풍경 또는 광경이다.
그들의 화면에 공통적인 직선 또는 곡선으로 주름 잡힌 표면은 핵심이나 내부를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주체의 위상 또한 확실치 않다. 화면 어디에도 인간의 흔적은 없고, 작가의 현존을 명확히 해줄 붓 자국 또한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 평면성이라는 회화의 조건과 건물의 일부 같은 환영을 중첩시키는 김수영의 공간에서 중력과 대기의 느낌이 남아있다면, 수수께끼 같은 단편이 율동 감 있게 구성된 이소정의 공간은 무중력과 진공상태이다. 김수영의 작품에 실재나 실재로부터의 추상이라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면, 이소정의 작품은 파생실재가 만들어내는 구체성이 두드러진다. 서양화와 동양화라는 기법의 차이가 있지만, 건조하면서도 엄격한 제작방식은 균형과 밀도를 낳았다. 이러한 형식은 개념을 장황하게 나열하거나 거칠게 노출하지 않고도 현대 회화의 역사와 논리를 명쾌하게 압축한다.
김수영의 ‘균제/Balance and Symmetry’ 전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지어지고 페인트로 도색된 건축물의 부분이 그려져 있으면서, 재현된 벽과 칠해진 화면은 중첩된다. 초현대식 고층빌딩이 유리피막으로 뒤덮인 날렵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면, 김수영의 작품에는 벽체의 비중이 높은 육중하고 둔탁한 구식 건물이 많다. 이전의 역사를 싹 지워버리고자 했던 국제양식 또한 시간의 흐름과 흔적을 각인한다. 전면에 햇빛을 받고 있으며, 간간히 열린 창도 보이는 건물들은 완전히 무표정하다. 시선이 주파할 공간이 압착된 화면 속 눈구멍처럼 파인 검은 면은 창으로 설정되곤 하는 그림에 볼만한 것을 제거해 버리는 작가의 선택을 보여준다. 화면의 중앙 부근에 위치한 건물 모서리는 양편으로 건물의 ‘양면’을 펼치며 균형을 맞춘다. 또 다른 작품인 ‘두면’은 건물 두 개를 반으로 나눈 화면에 배치한 것이다. 3차원 상에서 이 두 대상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에 대한 맥락은 생략되어 있다. 화면 가득히 잡혀 있는 건물의 양면과 두면은 기하 추상같은 면모를 가지기도 한다.
그것은 기하학적으로 구획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면서, 캔버스 틀로 구획된 회화의 밑바탕이다. 이 밑바탕에서 실제 건물의 밝기와 색일지도 모를 명암과 색상이 대비된다. 서로 다른 건물을 붙여 놓은 ‘양면’의 경우 평면성이라는 회화의 추상적 조건이 더 두드러진다. 전시부제인 ‘균제’는 재현과 추상 간에 설정된 관계이기도 하다. 건축과 건축에 대한 그림은 모두 인공적 구성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것은 실재와 재현을 근접시키는 방식 이수영의 방식이다. 양면과 두면을 나누는 축은 리플렛과 팜플렛에 복사된 작품 사진에서 접면이 된다. 이러한 접기는 만나기 힘든 차원들을 만나게 한다. 눈속임 기법(trompe-lœil)으로 지시대상과의 유사성을 확보한 건물의 표면, 또는 회화의 표면은 대상을 확정하고 재인식하는 재현적 과정을 모호하게 한다.
르네상스 이래로, 투명하다고 가정된 재현의 그물망은 표면적 묘사와 심층 사이의 인과관계에 부합되는 형식들, 즉 질서 정연한 현실을 만들어왔다. 합리성에 부합된 실체로 여겨지는 재현은 유사과학적인 중성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질서에 대한 집요한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화가에게 재현의 그물망은 불투명해 진다. 차이와 반복의 유희를 내재한, 캔버스의 표면에 구현된 미세한 기하학적 요철은 그저 유화물감의 흔적일 수도 있다. 물감의 물질적 흔적은 존재의 부재로부터 더욱 활성화된다. 건물의 양면, 또는 두면이 보여주는 짝패 같은 성격은 원본과 복제라는 이원적 과정에 근거하는 재현을 문제시한다. 건물의 구조가 아니라, 피막이 화면 가득히 잡힌 그림은 본질보다는 허상(시뮬라크르)의 성격을 강조한다. 특히 ‘두면’에 나타나는 불일치는 실재에 대한 결여의 감각을 강조한다. 그것은 애초에 작가가 출발했던 현대적 환경의 허상성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다.
같은 형식으로 뚫린 창들과 세로줄의 벽 무늬는 코드의 무한복제로 이루어진 현대적 환경의 특징이다. 작가는 낡은 벽의 느낌을 살리면서 코드가 야기하는 매끈한 광학적 공간을 촉각적 공간으로 보충하기도 한다. 대상과 과정의 중첩, 즉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투명한 도구로서의 기호는 기호의 망을 짜는 과정이 된다. 기호의 망은 사물의 표면과 마찬가지로 자체의 질을 획득한다. 그림은 현실의 흐릿한 환영이 아니라, 현실과 평행하게 존재하는 또 다른 현실이라는 위상을 확립한다. 이수영은 새로운 회화적 현실을 일구는 과정에서 추상화가 경도되곤 하였던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실재와 관념은 동일성의 양면이다--을 피해간다.
자유롭게 흘러가는 유기적 패턴과 수직 수평 같은 직선적 구조가 결합되어 있는 이소정의 작품은 씨앗으로부터 발생하고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성체의 일부를 잘라 성장시키는 꺽꽂이 방식을 따른다. 전시부제인 ‘삽목(揷木,CUTTAGE)’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것은 유기적 성장과 인위적 조율의 산물이다. 이러한 조율은 동양화의 수묵기법 자체에 내재해 있다. 그러나 작가는 발묵의 우연적 과정을 통제하는 방식을 현대적으로 변화시켰다. 20여점의 [sion] 시리즈는 다양한 접목의 산물이다. 절단면들을 리좀처럼 연결시키는 방식은 유기체와 기계 모두에 관철되는 공통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기관 없는 몸과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작품은 ‘튀는 점액, 퍼지는 외음부, 안구와 같이 신체의 일부를 암시하는 형상과 도형, 화살표 같은 기호’ 등의 요소가 조합되어 다양한 패턴을 만든다. 광학적 또는 촉각적으로 무엇인가 들고나는 구멍들을 연상시키는 요소는 기계의 도면처럼 엄격하게 배열한다. 작품은 경계를 긋기와 지우기 사이에서 벌이는 게임이 된다.
구성 요소의 출발점이 된 모체, 그리고 여러 층을 이루는 화면의 구획 규칙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유기체나 기계의 파편을 연상시키는 살벌한 요소들은 세련된 실내와 잘 어울릴 법한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로 교정된다. [sion] 시리즈는 120x120cm 크기의 작품이 상당수 차지한다. 몬드리안의 사각형이나 레고 블록처럼 그자체가 단위구조가 된다. 그것들은 여러 크기, 높이, 간격으로 배치되며, 전체 공간 속에서 조합되고 그림을 설치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반드시 죽음과 연결 되는 것은 아닌 유기체의 단편, 그리고 반드시 고장과 연결되는 것은 아닌 기계의 단편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면서, 자연과 문명에 공히 적용되는 재현적 질서를 벗어난다.
이소정의 작품은 사실주의와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추상도 아니다. 구성적 과정이 두드러지면서 새로운 실체를 만들어나가는 작품들은 구체(concret) 예술의 미학과 닿아있다. 추상 대신에 구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반 되스부르크는 ‘예술가의 목표는 추상적, 해석적 미술이 아니라, 구체적, 구성적 예술이다. 그것은 모든 연상적인 것을 제거하고, 정신이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명쾌하고 단순한 형태만을 사용해야 한다. 그 질서는 가능한 한 비개인적이고 기계적인 기술에 의해 정돈되어야 한다. 이 구조는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구체 예술의 미학은 종합적 입체주의자 후앙 그리의 ‘세잔은 병을 원통으로 환원하고, 나는 하나의 특수한 병을 원통으로부터 만들어 낸다. 나는 추상형태들을 구성하여 짜 맞춘다’는 말에 잘 나타난다.
현대 예술가는 반(反)자연이나 재현을 넘어서 추상까지도 극복하려 한다. 예술은 이미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날 진짜 자연은 파괴되고 있으며, 무균의 실험실이나 진공의 공간(사이버스페이스)에서 재조합 되는 경향이 있다. 자연으로부터 비롯된 환영 보다는 요소들의 조합(구성)이 전면에 나와 있는 이소정의 작품은 거품이나 구름 같은 형상을 제어하는 보이지 않는 기호들의 힘이 있다. 이전 작품에서 작가는 작품의 구성 원칙으로 공구 사용 설명서의 기호를 응용한 바 있다. 수학처럼 실체보다는 관계가 중시되고, 구성요소를 확정하고 조합하는 방식은 실험적이다. 작가가 체택 한 기본적인 요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접촉, 연결되면서 기존의 현실을 해체하고 새로운 현실을 구성한다.
출전; 아트 인 컬처 10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