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적인 것의 현실화



추연신의 최근 작품 [mass](2011)는 가느다랗게 나오는 색 볼펜을 느슨하게 쥐고 지휘하듯, 춤추듯, 스크럼블 에그를 만들 듯, 입자가 브라운 운동을 하듯 무수한 선이 그어져 생성된 어떤 단편이다. 이 단편은 불완전한 파편이 아니라, 나름의 자족성을 가진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시작된 이 드로잉 아닌 드로잉은 불확실성을 끌어들인다. 빈 바탕에 오똑하니 배치된 그것은 알이나 씨앗, 열매, 돌멩이, 사람의 얼굴 등이 연상된다. 푸른빛이 배어나오는 색은 단편에 무한의 느낌을 부여한다. 정처 없이 그어진 선들은 응집력을 가지고 교차되면서 자연스럽게 존재를 드러낸다. 그것은 둥그스름하지만 완벽한 구는 아니고 타원형인데, 세계의 시작을 알림직한 이 근원적 형태의 중심은 없다. 그것이 나아가야할 방향도 확실치 않다. 빈 중심을 도는 궤적들은 어떤 정확한 대상을 재현한 형태가 아니라, 무작위로 생성된 것이다. 그가 말하듯이 ‘체내에 축적된 화학물질을 외부에 고착시킨 후, 나를 숨기기 위한, 또는 나를 지탱하기 위해 유기적 구조를 만드는 유충의 생산적 노동’과 같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들은 무념무상, 그리고 그가 즐겨하는 산책이나 여행처럼 무위의 산물이다. 종이도 아니고 캔버스에 그려진 펜이 특이하다. 손에 쥐기도 불편한 200원 짜리 색 볼펜은 얇고 흐리게 나오는 불량 문구이기에 오히려 회화적 효과가 있다. 대여섯 가지 색상의 펜은 선을 남겨 두면서도 불확실하다. 펜은 그것을 쥔 손과 일체가 되어 함께 흔들거리며 흔적을 남긴다. 불어오는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맡긴다. 가느다란 색선의 궤적, 그것들의 집적은 솜사탕이나 누에가 갓 뽑은 비단 섬유처럼 부드럽고, 안개나 구름처럼 몽환적이다. 매끄러운 공간을 통과하는 유목적 선은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여행이지만, 완벽한 반복은 없다. 단편은 군집의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2011년에 제작된 [mass] 시리즈에는 어디서 떨어져 나온 지 불분명한 색색의 반투명 단편들이 모여 있다. 작품들에는 다양한 곡률을 가진 자연적 또는 인공적 입자들이 모여 있다. 씨앗이나 배아라는 잠재적 형상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전개된다.

작품 [mass_감자](2011)는 감자처럼 생긴 울툭불툭한 형태 위에 싹이 머리털처럼 돋아나 있다. 작지만 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기적 같은 과정을 증거 한다. 작품 [mass_나방](2011)은 애벌레가 타원형 안에서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변태를 준비한다. 작품 [mass](2011)는 자체의 응집력을 잃고 파열한다. 푹 꺼져 가는 이 형상은 고체에서 곧장 기체로 급격히 변환 중이다. 이 작품은 공간적 고착이 아닌 시간에 따른 변이를 중시하는 그의 미학이 드러나 있다. 펜 드로잉 이전 그의 작품은 쇠라나 시냑의 그림처럼 점묘로 이루어진 섬세한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점묘화를 이루었던 입자 하나하나가 이제 화면 한가운데에 주인공이 된 셈이다. 추연신의 점묘화의 입자는 숫자로 되어 있다. 구상적인 형태와 색채를 채우는 숫자 입자들은 [numerical value]라는 제목이 예시하듯이, 촘촘하게 계산되고 체계화된 현대의 물질적 세계, 특히 코드가 조합된 세계를 상징한다.

패널 위에 네임 펜으로 그려진 점묘화들은 [영월](2011)이나 [numerical value 18_ 삼청동 길](2010)처럼 차분한 중간 톤으로 그려진 풍경부터, 다소 번잡해 보이는 시가지 풍경인 [대흥동](2011), [numerical value_오창](2010), [numerical value_평택 경찰서 오거리](2010), [numerical value 17 안성 ic 2](2010) 등이 있다. 차와 빌딩으로 가득한 도시에 인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익명적 구조와 인간적 가치 사이의 갈등을 예시한다. 산 풍경의 경우에도 자연의 실재성이 아니라, 관광 상품화된 광경, 가령 미디어에 의해 걸러진 허상성이 강조된다. 작품 [numerical value_car](2010), [numerical value16_골프](2010)처럼 움직이는 것은 자동차들이며 간혹 숫자 입자들은 제자리를 벗어나 연기처럼 흩날리곤 한다. 숫자 입자들은 이합집산을 통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만, 모래알처럼 응집력은 강하지 않다. 점으로 가득 채워졌던 화면이 비워지면서 미소한 것이 중심에 놓이기 시작한다.

그 미소함은 반드시 자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작품 [츄잉 껌에 싹이 나다](2010)처럼 커피숍 천정에 붙어있는 껌을 옆에 있는 종이에 그린 것도 있고, 병조각 같은 도시의 쓰레기에서도 보석 같은 것을 추출한다. 추연신의 최근 작품에 나타나듯이, 깨진 소주병이나 사이다 병 조각 같은 인공물조차도 오랜 시간의 더께를 둘러쓰면 자연화 된다. 시골에 위치한 공감 스튜디오의 한켠에는 화장품 샘플 통에 넣어둔 미소한 것들이 빼곡히 수집되어 있다. 대개 죽은 벌레나 이파리들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작은 수집 품목조차도 줄이려고 노력한다. 비록 주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많이 쌓아놓는다는 것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설치작품 [소멸](2011)처럼, 숫자 형태로 만들어진 찰흙 덩어리를 방치함으로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게 한다. 생성만큼이나 소멸을 중시하는 그는 영원함이 아니라,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을 원한다.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가득 쌓여있는 것이다.

추연신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생겨나고 시들고 곰팡이 피고 무너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연에 나가서 몇 시간이고 앉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와 일렁이는 물의 진동을 바라볼 때 그는 희열을 느낀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 깊이 새겨진 시간성을 알려준다. 뒤죽박죽된 선들이 쌓여 만들어진 형상처럼, 그 시간의 순서와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가 애용하는 펜은 자연스럽게 몸에 밴 필사의 관성을 따라가는 매체로, 무의식과 근육의 운동을 그대로 옮겨낸다. 그에게 색은 소묘 위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산물이다. 작업은 무엇인가를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직관을 그대로 필사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은 매우 단촐하다. 본디 자연은 불필요한 과잉을 유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단순함을 통해 자연적 대상과 자연적 과정을 중첩시킨다. 대상은 변형되고 과정은 가시화된다. 자연에 충실하면서도 자연을 재현한 것은 아닌 추연신의 작품은 근원적이지만 무겁지 않다. 관념주의 또한 작품을 무겁게 하는 요소인데, 그는 많은 생각을 하지만 관념적인 작가는 아니다.

형상은 시작도 끝도 불분명한 화면과의 가벼운 접촉들의 산물일 뿐이다. 그것들은 지나가는 바람이나 무수한 낙수들이 만들어낸 형상이다. 스치는 듯 흐르는 듯 만들어진 형상들은 그것을 그린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 삶(또한 예술도)은 변화 그자체이다. 선은 의도와 목적을 구현하는 강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움직임으로 활기차다. 작가 자체도 시작과 종결점이 아니라, 매개자이다. 화가 파울 클레가 스스로에게 원했듯이, 작가는 뿌리와 잎 새 사이의 줄기처럼 양분과 수분을 통과시키는 도관일 따름이다. 추연신의 선은 선적이 아니라 동시적이다. 그것은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동시적으로 들려오는 장을 중시한다. 명확히 결과물을 보여주는 시각성의 절정에 문자나 숫자가 있다. 생산중심주의 사회는 다름 아닌 정확한 숫자로 보여주는 사회를 말한다. 숫자화 되지 않는 것은 너무 가치가 있거나 아예 무가치하다. 예술 또한 그러하다.

수 백 년 간 재현적 질서의 근간을 이루었던 르네상스식의 공간은 준 과학적인 시각적 공간이다. 시각적 관점의 세계는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공간을 전제한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의 역사를 다룬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문자란 오감을 작동시키는 말에 비해, 시각적인 것만을 추출하여 외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중세 말에 발명된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귀로 들리는 말을 가시적인 단어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맥루한에 의하면 감각이 분열되고 시각이 다른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은 획일적이고 반복 가능한 활자에 의해 서적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생겨난 일이다. 비문자적 양식이 함축성, 동시성, 불연속성과 관련됨에 비해, 시각 세계의 기본 요소는 균질성, 획일성, 반복성 등이다. 자연과학의 발전, 즉 비가시적 힘에 가시적인 형식을 부여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추연신의 작품에서 숫자 입자로 이루어진 도시, 차, 군함 같은 재현적 풍경은 명시성, 획일성, 연속성에 근거한 근대적 인쇄 문화의 산물이다.

균질적인 분자로 이루어진 숫자는 질이 아닌, 양적인 세계를 상징한다. 그것은 공존이 아닌 순서, 도약이 아닌 기계적 움직임, 공명이 아닌 단성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진짜로 추상미술이라고 해야 하는 것은 다른 감각 능력들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분절된 시각 감각 능력에만 기초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라고 지적한다. 르네상스 이래 그러한 재현적 질서가 근현대 사회를 추동해왔다. 활자 같은 글자들을 기계적으로 채워넣은 [numerical value] 시리즈에서 재현적 질서는 수량과 밀접하다. 로버트 넬슨과 리처드 샤프가 편집한 [미술사 사전]의 ‘재현’ 항목에는 방정식이라든지 온도계의 수은의 높이 같은 것들도 재현이라고 본다. 이 항목의 필자 데이비드 서머스에 따르면, ‘존재하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repraesentatio’는 흥미롭게도 ‘현금으로 지불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미지는 불가능한 대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등가의 것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현금이 교환될 상품과 등가인 것처럼 상상력을 통해 대등한 힘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사전적 정의는 재현과 상업의 유비적 관계를 지적한다. 재현의 세계는 다름 아닌 등가의 세계인 것이다. 해석은 바로 가격에 해당된다. 추연신의 점묘화에서 점들은 동질적이다. 여기에서 어떤 하나의 점은 다른 하나의 점과 똑같다. 그것은 합리적 개인처럼 다른 이와 대치될 수 있다. 그 세계는 기계적인 반복과 순환이 지배적이다. 원근법이 자리하는 유클리드 공간의 속성이 그러하다. 이러한 공간은 대상을 집어넣는 빈 곳에 불과하다. 이후 유화로 대변되는, 재현주의에 충실한 회화의 역사는 보이는 것을 쟁여놓는 ‘시각적인 금고’(존 버거)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추연신의 점묘화는 재현의 견고성을 그 정점에서 입자적 현상으로 와해시키려 한다. 기하학적 정의와 다른 유동적인 점들은 해체를 예시한다. 마치 색 모래로 정성껏 그린 만다라를 흩어뜨리는 승려 같은 몸짓이 이후의 작업에 이어진다.

이후 허공을 휘젓듯이 그어지는 선묘화에서 공간은 근대 물리학의 중성적 용기가 아니라, 그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현대 물리학의 공간에 상응하는 것이 된다. 곡선형 공간이 특징인 추연신의 드로잉은 공간의 기하학적 특성인 만곡이 중력을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재현주의의 출발이자 귀결인 구텐베르크의 세계를 해체한다. 추연신의 작품은 재현의 해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성을 향한다. 플라톤 이래의 재현주의 철학을 전복하고자 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재현은 발산과 탈중심화를 긍정하지 못한다고 본다. 재현의 근거가 사라져 있는 추연신의 작품은 모든 형식들에 저항하는 무바탕 안으로 비스듬히 빠져든다. 들뢰즈는 형상과 질료라는 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정해 놓은 최초 상태의 재현을 정의한다고 본다. 하지만 질료들을 용해시켜 버리고 모형화 된 것들을 해체하는 추상적인 선과 무바탕의 짝은 더 심층적이고 위협적이다.

추연신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미규정성과 무바탕은 화학 조미료로 범벅된 자극적 스펙터클에 익숙한 현대인의 눈에 자연식의 슴슴한 맛을 권유한다. 이 미규정성과 무바탕에서 모든 것이 생겨난다. 그것은 하나의 중심만을 가지는 재현이 아니라, 다원적인 중심들을 함축하는 운동을 지향한다. 배아나 미분적인 요소가 있는 형상은 잠재성 안에 잠겨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잠재력을 띤 어떤 것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언제나 발산하는 선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언제나 차이, 발산, 또는 분화를 통해 현실화된다. 잠재적인 것은 그자체로 충만한 실재성을 소유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물은 잠재적 상태에서 현실적 상태로, 그리고 다시 잠재적 상태로 변화한다. 추연신의 드로잉은 잠재적인 배아에 해당된다. 현실화와 분화는 언제나 진정한 창조이다. 분화는 어떤 선들의 창조를 함축하고 바로 그 선들을 따라 이루어진다. 작품은 차이의 고유한 역량을 내재한 반복을 통해 생성되는 장이 된다.

출전; 공감창작스튜디오 작가연구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