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사회의 신화적인 투영구조



‘나의 표상이 너희의 세계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전시부제, 그러나 만약 크기가 충분히 작았다면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예쁜 작품의 조합은 2008년 첫 개인전 이래, 늘 경계 위에 서왔던 김병진 작품의 특징, 요컨대 구별되는 항목 사이의 긴장감을 나타낸다. 그의 작품은 조각 특유의 물질 감을 최소화한 선적 조각이었는데, 설치의 형식으로 보여 지는 그것들은 그림자 및 허의 공간도 적극 끌어들이곤 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허상과 형상, 비움과 채움은 상호 보충적 관계를 이룬다. 이번 전시는 이 3차원 공간 위에 그려진 2차원적 선들이 ‘기표로 이루어진 면으로 확장되어, 결국 기표로 매스를 만든다’(김병진) love나 명품 로고들의 망으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의 작품들이 특히나 예쁜 이유는 그것들이 명품들에 대한 관심에서 왔기 때문이다. 전시부제에 속한 ‘표상’이라는 말이 그렇듯이, 표상은 이미 익숙한 것들, 또는 만인에게 익숙해 질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체계와 관련된다. 우리의 세계는 이런 저런 표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김병진의 작품에서 표상은 기호의 형태를 취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이 표상들 간의 게임, 또는 전쟁에 끼어든다.

단순한 쓸모와 기능성을 넘어서,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는 잘 빠진 물건들은 예술작품에 근접한다. 하기야 모든 것이 기호화 된 후, 그것들이 복잡하게 얽힌 사회 속에서 예술과 상품의 경계를 어떻게, 누가 그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밖에 나와 있는 초월자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예술가의 독립과 예술 작품의 자율성이 확보되기 시작한 근대이래, 이 문제는 오래되면서도 새로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제가 종이 위에 선을 긋는 듯 자유롭게 된 조각가의 기술 및 끈질긴 노동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그저 재미있거나 의미 있는 형태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작업 시간을 감당하는 그는 스스로 ‘예술이 노동이고, 노동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전 작품에는 무려 3450개의 십자가를 용접하여 만든 불상이 있다. 꼭 종교적인 도상이 나와서가 아니라, 거의 종교적인 수행에 가깝다. 그러나 작업이란 단순한 노동과 달리, 노동하면서 작품, 무엇보다도 그 스스로가 변화된다. 변화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적극 받아들여야 할 만한 것이다. 김병진은 그렇게 작업이 몸에 감기고 몸속으로 스며들 정도가 되어야 작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복잡한 작업 공정을 마무리 짓는 화려한 채색은 만들어진 형태를 물신적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한다. 섬세한 형태와 오묘한 색으로 무장된 작(상)품들은 관객(또는 소비자)을 무장해제 시킨다. 사랑이나 명품 로고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끝없는 욕망의 상징이다. 이 욕망의 대상들은 그것들이 현재 부재하다면 더더욱, 그러나 옆에 쌓아 놓아도 계속 갈아 치워도, 그럴수록 갈증만 더 생긴다. 사랑과 소유의 대상은 이 부질없는 욕망의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의 작품처럼 텅 비어있다. 텅 빈 것들이 만들어내는 완전한 형태미는 욕망의 부질없음에 대한 보상 심리처럼 보인다. 불확실한 것일수록 확실한 형태를 가져야 하며, 소유할 수 없는 것일수록 소유의 환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이 곧잘 일으키곤 하는 착시는 이 불확실한 현상과 조응한다. 이렇게 대상이 불확실한 갈망을 리얼리즘이나 금욕주의의 입장에서 부정적인 것만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그런 환상이 없다면 세상은 온통 무채색일 것이고, 특히나 물신적 체계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세계는 근저로부터 무너지고 말 것이다.

사랑의 대상을 명백히 가시화함으로서 그것을 소유 또는 공유하려는 욕망은 작업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작품과 상품의 경계에 선 김병진의 작품들은 밝음, 맑음, 많음, 매끄러움, 화려함 등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기호에 호소한다. 수 천 개의 로고 또는 글자들이 용접되어 만들어진 사과, 멜론, 도자기 등은 대중적인 기호에 대한 조사와 잘 만들어진 디자인, 깔끔한 마무리에 이르기 까지, 명품 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로고나 글자의 무한 반복은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면서, 동시에 대중에게 많이 노출되는 브랜드 파워를 예시한다. 샤넬, 애플사 마크로 만든 붉은 사과가 그것들이다. 애플 마크로 이루어진 하이힐과 love 라는 글자로 만들어진 붉은 사과는 상품과 사랑의 대상에 공히 적용되는 물신주의를 가리킨다. 명확한 실체 없이 돌고 도는 물신적 체계 속에서 상품은 성(性)화되고 성은 상품화된다. 루이비통, 샤넬, love 로 이루어진 멜론은 위에 달린 꼭지만 빼면 완벽한 구의 형태로 심미적 만족감을 주며, 동시에 지구화된 시장체제를 가리킨다. 마치 혹성처럼 보이는 멜론/상표/구는 자그마한 씨앗으로부터 우주론으로까지 고양된다.

실상은 소비의 체계가가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규범이 되었기 때문에, 우주론이란 말은 과장이 아니다. 첨단 산업이나 자연 뿐 아니라, 전통 또한 이 대열에서 빠지지 않는다. 도자기 작업은 2미터 높이도 있어, 관객에게 글자와 마크의 압박을 준다. 등신대 크기로 관객 앞에 마주한 그 기념비적 형태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조각 예술의 근본이 되었던 인간은 빠진 채 기호들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은유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형상을 수많은 人자로 용접한 작품과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의자가 그렇다. 실제로 앉을 수 있는 기능도 충족시키는 빈 의자는 부재하는 인간에 대한 현존을 일깨운다. 의자는 긴 등받이로 사람의 형상을 이루는 것부터 앉으면 뒤로 제껴져 거만한 자세로 바뀌게 하는 것 등 다양하다.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의 빈 의자는 거기에 인간이 앉음으로서 채워진다. 실제 메론 열매의 엽맥처럼 복잡하게 얽힌 명품 로고는 촘촘하게 표면을 감싸면서, 자연을 씨앗으로부터 자라나는 실체가 아니라, 표면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또는 활성화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상표는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것으로, 세계화를 통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됨에 따라 점차 하락되는 이윤율을 다시금 끌어올리고 최대화하기 위한 또 다른 상품이다. 상품에 상표가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상표 자체가 상품이며 실체가 된다. 물론 근대의 상품과 쌍생아인 예술작품 작품 역시 같은 여로를 걸어왔다. 시장의 기업과 생산적인 부가 문화 생산의 동반자라고 생각하는 저자 타일러 코웬의 [상업문화 예찬]은 예술가는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고, 경제 성장과 함께 성행한 직업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현대예술은 자본주의의 예술이며, 예술의 역사는 시장을 형성하고자 하는 분투의 역사였다. 그는 성직자나 귀족, 왕족 같은 전통적 후원자가가 있으면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재정 지원을 분산시킨 시장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후원체제라고 본다. 이렇게 근대의 예술가는 상품의 세계로 던져졌다. 또는 시장을 통해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예술을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현대의 작가들은 상품이 유통되는 체계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현대는 상품 또한 예술처럼 의미작용의 체계를 구성하는 기호이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체계]에서 기호의 문화적 체계가 갖는 일관성을 탐구한다.

그에 의하면 기호들이 결합하는 논리는 체계적이면서도 무한하다. 김병진의 기호적 사물들 또한 실체가 아니라 차이로 이루어져 있다. 차이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기호이다. 그것은 현대인의 욕망이 특정 사물이 아니라, 차이를 향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차이로부터 사회적 의미가 생겨난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기호는 동질적 공간을 가정함으로서 그 공간 위에 차이의 선을 긋는다. 기호의 진정한 기능은 물질적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를 평등에 차이를 둠으로서 계급 간의 끊임없는 거리를 복원하는데 있다. 일찍이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성을 간파한 마르크스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들은 사람들 간의 물질적 관계들로서 나타나며, 특히 사물들 간의 사회적 관계들로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마르크스 식으로 해석하면서, 소비사회에서 개인은 소비자로서 자유로우며 그것은 형식적인 해방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여러 계급이 부르주아 혁명 이후로 정치적 책임에 점차 접근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비자들도 산업혁명 이후로 사물 앞에서의 평등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는 [소비의 사회]에서도 사용가치로서의 사물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만, 엄하게 등급 매겨진 기호 및 차이로서의 사물 앞에서는 전혀 평등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불평등한 기호체계가 바로 사회이다. 김병진이 글자 또는 고로로 구성하는 사물들은 인간에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기호체계로 이루어진 질서이다. 이러한 가치와 기호의 관계 속에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사라지고, 기호들끼리의 체계적인 관계만 남는다. 주체와 대상이라는 덩어리는 한 치의 남김도 없이 기호화 되어 표면으로 떠올라야 한다. 실재계를 코드로 전면적으로 바꾸는 과정이 소비사회 속에서, 특히 대중 매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내부를 남김없이 비워낸 체계로서의 주체와 대상은 좀 더 짧아지는 순환 주기 속에서 떠돈다. 현대사회에서 표면화되지 않는 것은 도태된다. 나는 일상어에서 ‘뜬다’라는 말을 이렇게 이해하고 싶다. 김병진의 작품에서는 자연 조차도 떠 있는 기표들로 실체화된다. 실체나 본질에 근거한 사용가치는 모호해진다.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체계]에서 소비의 사물이 되기 위해 사물은 기호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기호로서의 다른 모든 사물과의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기 일관성과 의미를 지니면서 구체적인 사물과 무관하고 자의적이 되어야 한다. 기호의 체계적인 지위를 향한 사물의 이러한 전환, 이 변화가 소비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때 사물들은 불가피한 매개물, 그리고 대체기호, 즉 대용물이 된다. 소비된 것은 결코 사물이 아니라 관계 그자체이다. 이렇게 소비는 체계적이고 끝없는 과정이 된다. 사물/기호는 서로에게 힘입어 끊임없이 부재하는 실재를 메워나간다. [사물의 체계]의 논리에 의하면 김병진의 작품은 일련의 모델이다. 모델은 어떤 사물과 다른 사물을 구별 짓는 가장 작은 특수한 차이이다. 미묘한 차이는 끝이 없다. 이 경우 모델은 예술작품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현대사회에서 이 차이를 추동하는 것은 미디어이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광고는 체계적이고 자의적인 기호를 통해서 감수성을 자극하고 의식을 불러일으킨다고 본다. 모델을 보급하는 정보와 매스커뮤니케이션에 의한 사물의 순환이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집단적이고 신화적인 투영구조가 생겨난다. 실체를 비워내고 코드들로 얽혀 있는 김병진의 작품은 그러한 투영체들이다. 그러나 돈 슬레이터가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지적하듯이 코드에 의한 지배는 자본주의의 병리학이 아니라, 보편적 조건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기호적 과정 내에서 구성되며, 인간의 행위는 항상 구조의 효과인 것이다. 그러나 사과가 하트로, 하트가 불확실한 선으로 흘러가는 김병진의 또 다른 작품군은 견고하고 확고한 구조보다는 유연함을 지향한다. 번질거리는 자동차 도료가 아니라, 유화물감으로 얼룩덜룩 칠해진 하트 마크는 코드화를 빠져 나가려 한다. 그의 양평 작업실에서 본, 잭슨 폴록의 선을 연구한 결과물인 평면 위에 그려진 복잡한 선들은 노동과 상품이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탈주하려는 선의 실험이 있다. 정처 없이 유목하고 탈주하는 거칠고 촉각적인 선들은 가짜의 미끈함이 아닌, 진짜 매끄러운 공간을 횡단한다. 차원의 경계 위에 서 있고자 하는 그에게 물신화된 기호의 구조 또한 넘어서야할 경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