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처럼 드리워진 야자수 잎, 그 사이로 보이는 탁 트인 땅, 그 위를 걷는 코끼리의 모습은 이상향 속에 있다고 가정된 ‘본질(truth)’을 찾아 떠나는 작가의 모습을 은유한다. ‘상구원질도(象求原質圖)’라 붙은 전시부제를 통해 박혜신은 이상향을 찾는 코끼리로 하여금 ‘파란 하늘에 푸른 야자수가 드리워진 너른 대지’를 횡단하게 한다. 그러나 그곳이 ‘모두의 본질(本質)이 구현된 공간’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속담도 있듯이, 코끼리의 실체 또한 보이는 것만큼 확실하지 않다. 순지의 바탕이 그대로 드러난 그리드 공간 속에서 출발점과 목적지가 불분명한 채 본능에 따라 무조건 걷고 있는 코끼리에게, 작가는 본질을 원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해 헤매는 모습을 투사한다. 그러나 박혜신은 그 본질이라는 것이 없을 수도 있으며, 단지 본질을 찾아가는 끝없는 과정이 본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양이나 수행처럼 끝없는 과정일 뿐이다.
효율성, 합리성, 진보 등을 통해 진리를 향한 가장 빠른 길을 찾으려 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방식은 맹목적이다. 그래서인지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코끼리는 다소 우직해 보인다. 긴 코를 땅에 대고 터덜터덜 걷는 모습은 묵직한 중력의 힘을 느끼게 한다. 코끼리는 나무를 빼면 지상에서 가장 큰 유기체 중의 하나이며, 그만큼 현실의 무게를 많이 짊어진 듯 보인다. 노동과 관광 자원으로 착취되곤 하는 현실의 코끼리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것들은 홀로, 때로는 두 마리가 길을 간다. 연인, 부부, 또는 가족이 떠오르는 조합에서, 한 마리이든 두 마리이든 그들은 결코 앉아있는 법이 없다. 마치 앉는 순간이 죽음인 듯 그들은 끝없이 걷고 또 걷는다. 코끼리는 불교에서 석가의 태몽에도 나오며, 진리를 찾아 떠나는 동물 캐릭터는 동양의 경전에서 친숙하지만, 이 전시에서 코끼리라는 소재는 휴양지에서 영감을 얻었다. 코끼리만큼이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배치된 야자수 또한 그러하다.
야자수는 뒤로 뚫린 창처럼 보이는 광활한 무대와 달리, 이리저리 중첩되면서 혼란스럽다. 그것은 다소간 정적인 화면에 원초적 혼돈의 활력을 부여하며, 관객의 시야에 맞게 무한정한 공간을 모아준다. 또는 시야를 교란시킨다. 야자수는 코끼리나 그 뒤의 하늘과 달리, 색이 배제되고 먹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먹으로만 그렸기에 이국적인 야자수임에도 불구하고 버드나무나 대나무의 느낌도 준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에게 먹은 ‘모든 색을 섞었을 때 나오는 색’이며, ‘컬러라는 인위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질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먹은 ‘현명한 색깔’의 상징으로 본질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리저리 엉켜있고 착종된 형태는 쉽게 본질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로크식의 휘장처럼 무한한 주름으로 이루어진 그것들은 까도까도 끝없는 양파나 러시아 인형처럼 핵심이 없다. 주름은 접혀지고 펼쳐지는 운동을 계속 할 따름이다.
박혜신에게 찾아야할 본질은 언제나 난관이 함께 한다. 코끼리가 찾는 낙원 또한 양면적이다. 동남아나 남태평양의 섬 같은 지역은 일찍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관광 소비자들에게 낙원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사람들은 낙원으로 간주된 그곳에서 인류 최초의 연인인 아담과 이브가 되어보기 위해 떠나곤 한다. 작가 또한 그러한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그곳에 갔지만, 이 ‘무조건 행복해야 하는 곳’에서 깊은 허무를 동시에 느꼈고, 인간의 욕망이 덧없고 끝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 낙원 풍경이 개인적인 경험이나 사실을 재현한 것만은 아니다. 풍경 자체가 여러 휴양지에서 온 코드들이 조합이 되어 있는 가상적 풍경이다. 거기에는 키치처럼 좋은 것들을 모여 있다. 그러나 이전 작품만큼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가 많지는 않다. 무엇보다 바닥의 그리드 구조는 가상성을 강조한다. 그리드는 원초적 대지의 질척이거나 부드러운 촉각성 대신에 광학적 공간을 펼쳐 보인다. 원근법적 재현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사이버 공간 속의 좌표계처럼 드리워진 그물망은 현실 속 자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구획된 선들은 지평선이나 수평선의 환영을 줄 뿐이다. 대자연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직선적 요소인 빛은 하늘 부분에 잉크처럼 풀려있다. 그리드는 사뭇 엄격하게 그어져 있지만 막연한 공간을 상징할 뿐이다. ‘본질 찾기’의 어려움을 생각할 때. 그리드는 아래가 뚫린 창살들처럼 위태롭게 보이기도 한다. 어떤 코끼리는 긴 코를 하늘을 향해 뻗으면서 구도적 방황에 답을 주지 않는 숨은 신의 존재를 원망한다. 저 멀리 소실점 끝에 이상향이 있을까. 르네상스 시대라면 그 소실점 자리에는 신이 잠재해 있을 것이고, 그 맞은편에는 이 전능한 시선을 주재하는 권력자가 자리할 것이다. 이번 전시 뿐 아니라, 박혜신의 작품에는 동양화에는 없는 직선을 공간 표현에 많이 사용했다. 그러한 기호적 표현은 현대의 기계 문명을 살아가는 자의식의 표현이자, 어릴 때 살던 집이 체스 판 무늬 마루였던 기억에서 왔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질서이면서 도전’이며, ‘압박이면서도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것은 특별한 표식이 없이 반복되는 사막같이 막막한 공간이며, 신기루 같은 환영의 속성이 있다. 달리, 마그리트, 델보, 데 기리코 등과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에서 이러한 원근법적 공간은 불가사의한 신비를 연출하기 위한 연극적 무대가 되곤 하였다. 원근법은 고풍스러운 장치이지만, 무한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드 대지와 달리, 하늘에는 색이 있다. 박혜신의 그림에서 그리드와 나뭇잎이 선의 영역이라면 하늘은 색의 영역이다. 작가는 2008년 신혼여행으로 떠난 몰디브의 투명하고 연한 하늘에서 ‘100% 산소 속’에 들어왔음을, 그리고 ‘공기에도 색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이는 작품의 하늘 풍경에도 반영되어 있다. 푸른 하늘과 물은 축복 받은 자연을 상징한다. 그러나 상품화 된 놀이, 가령 몇 가지 수상 레저 같은 것을 즐기고 나면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는 그곳에서 권태 또한 느꼈으며, 익사사고까지 목격하면서 삶과 죽음 사이의 근접함을 깨닫는다. 낙원에도 권태와 죽음이라는 현실 속의 모순이 존재했다.
동양화는 그자체가 이상향 같은 형상이 있지만, 동서고금의 회화적 장치가 동원되는 박혜신의 작품에서는 황금시대의 신화 또한 내재해 있다. 작가노트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황금시대처럼 진정하고 조화로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녀의 작품에는 자연에 투사된 유토피아가 있다. 인간 역사는 생산력의 확대를 향한 끝없는 진보의 역사였지만,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사라지게 한 값비싼 대가를 치루었다. 그래서 인간은 상상 속에서 양자 간의 조화에 대한 이론적 상이라 할 만한 것들을 만들어왔다. 그러한 낙원은 보통 섬으로 표상되어 왔다. 섬은 번잡스런 일상과 단절된 순수한 시공간을 상징한다. 해안가를 끼고 있는 관광지, 또는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은 모든 것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완전한 장소이며, 오염되지 않는 태고의 무구함을 상징한다. 오묘한 하늘빛을 배경으로 전경에 드리워진 야자수, 탁 트인 시야가 있는 그림에서 푸른 섬 이라는 낙원의 이미지가 발견된다.
야자수는 사막의 오아시스를 떠오르게 하며, 오아시스는 에덴동산과 함께 낙원의 모델이 되어왔다. 에덴 정원의 한가운데서는 지혜 또는 생명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숱이 많은 박혜신의 그림 속 나무는 원초의 낙원 상태가 가지는 완전성과 풍부함을 상징한다. 하늘은 다양한 기상조건을 반영하고 있지만, 바닥의 기하학적 그리드는 변화무쌍한 시공간성을 괄호 친다. 그곳은 정확한 표식은 없지만 아마도 제자리로 오는 반복이 지배하는 공간일 것이다. 박혜신의 그림에는 네 가지 정도의 공통적 요소가 있어서, 여러 작품을 동시에 보면 애니메이션 같은 움직임의 환영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영원 회귀의 공간 속에서, 코끼리들은 제 자리 걸음을 걷고 있는 듯하다. 낙원은 보통 아르카디아(먼 과거)나 밀레니엄(먼 미래)에 있다고 가정된다. 그것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속세의 시간 개념인 역사와는 질적 차이가 있는 신성한 시간을 전제한다. 그것은 종교사가 엘리아데가 말한 기간의 개념이 없는 ‘영원한 순간(illud tempus)’이다.
근현대에 와서 전형적이 된 선적 시간 대신에, 세계각처의 문화권들은 순환하는 시간개념, 즉 창조, 완성, 쇠퇴, 멸망, 부활의 끊임없는 주기를 따랐다. 엘리아데는 끝없이 회전하는 시간과 우주의 개념은 아르카디아적 파라다이스 신화들 사이의 뚜렷한 공통점이라고 지적한다. 소실점 너머의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박혜신의 그림에서 세계의 시초이자 중심인 낙원이 암시 된다. 종교학자 진 쿠퍼에 의하면 파라다이스는 서로 반대되는 모든 것의 통합하며, 이 통일성에서 벗어나는 이원성, 혹은 분리의 개념은 부정적이며 세속적인 것이다. 기독교의 창세기를 비롯한 많은 창조신화에서 여러 가지 이원적 분리로부터 세계의 창조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실낙원, 즉 타락은 존재의 통일에서 이원성과 다양성으로의 하강을 상징하며, 반대로 낙원회복은 존재의 통일, 또는 영적 중심으로의 회귀, 원초적인 순진무구의 회복을 상징한다. 결국 실낙원에 의해 인간은 시간과 어둠 속으로 던져졌고, 낙원 회복에 의해 존재의 통일을 되찾게 되면 시간은 종료된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섬은 이 세계 밖의 특이한 장소에 놓여진다. 진 쿠퍼는 낙원이 항상 외부에 대해서 닫힌 공간으로, 또는 바다로 에워싸여 하늘을 향해서만 열린 공간이라고 지적한다. 그러한 장소는 야생적인 자연과 대조적이다. 박혜신의 작품에서 균일하게 골라진 바닥 면은 불안과 공포가 제어된 자연을 상징하며, 동시에 유년기의 마법적 공간과 이어진다. 거칠 것 없이 뻥 뚫린 순순한 부피의 공간은 접촉에 대한 공포를 배제한다. 이렇게 편안한 공간은 사회성을 약화시키고 수동성을 강화시킨다. 그것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황금시대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리차드 해리스는 [파라다이스]에서 황금시대에 대한 오비드의 묘사를 인용한다; ‘괭이나 가래질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식량을 생산해냈으며, 따뜻한 미풍이 스스로 번성하는 꽃을 어루만지는 봄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황금시대는 종말을 고하면서 풍요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만 쟁취할 수 있었다.
푸른 하늘 사이로 붉은 석양이 노을 지는 하늘이 있는 박혜신의 그림은 분위기 또한 유토피아적이다. 리차드 해리스는 파라다이스의 위치로 서쪽이 압도적으로 많이 설정된다고 한다. ‘해질녘의 서쪽 하늘이 너무나도 아름다운데 반한 시인들은 서쪽을 빛과 영광의 세계로 본다’(불핀치) 파라다이스는 영원한 봄을 약속하는 자연의 축복이 보장된 곳이다. 해리스는 고대 유대교의 한 금욕주의 종파의 세계관을 인용한다; ‘눈도, 비도, 강한 열도 없고 오로지 바다로부터 부드러운 서풍이 불어와 공기를 상쾌하게 해줄 뿐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내세는 쾌적한 환경 속에서 황량한 삶의 짐을 지지 않고, 인간이 신과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다. 파라다이스의 기후는 폭풍우도 혹서나 혹한도 없이 온화하고 포근한 날씨만 영원히 계속된다. 바람은 부드럽고 상쾌하며 하늘에서는 천상의 빛이 내리쬐는 것이다.
그러나 유토피아라는 말이 만들어진 토마스 모어의 [국가의 가장 나은 상태에 관하여, 혹은 새로운 섬 유토피아](1516년)에서 말해지듯, 그 섬은 ‘유토피아’, 즉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유토피아 사상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이상적이지 못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대안의 세계관을 이루곤 하였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지구상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즉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희망에 의해 설계된 것이다.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토피아’와 ‘유토피아’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현실의 모든 질서를 ‘topie’라고 한다면, 이상은 역사의 전환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이다. 예술사를 포함하여 역사적 사건들은 바로 모든 토피아(질서)가 유토피아에 의해 끝없이 교체되는 과정이다. 기존의 존재 질서를 파괴하는 현실 초월성이 유토피아인 것이다. 유토피아 사회상들은 이국적인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박혜신의 작품에서 타자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이라는 동일자가 아닌 동물이라는 타자가 주인공인 구도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해방과 억압을 동시에 낳은 근대사회 속에서 부대끼다가 이국적인 낙원의 섬으로 떠난 고갱 이래, 낙원은 동시에 미술언어를 원초적인 것으로 회귀시키는 역할을 했다. 근대화가의 그림 속에서 낙원시대의 색깔을 본 철학자 바슐라르는 [꿈꿀 권리]에서 낙원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작품은 우리를 근원의 위대함에로 되돌려 준다.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예술적 카테고리로서 ‘예측된 상’을 설정하고 예술영역에서 나타나는 유토피아의 요소를 해명하려 하였다. 그에 의하면 백일몽, 판타지 등은 유토피아적 요소를 지닌다. 모든 예술작품과 철학은 유토피아라는 창문을 달고서 그것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어떤 풍경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 속에서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이 떠오르듯이 그렇게 이 세상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창조된다. 블로흐는 유토피아 사회상의 끝없는 충동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평화, 자유, 그리고 빵을 갈구하는 충동과 열광이란 우리의 삶을 긴장시키고, 실현가능한 무엇을 추구하도록 한다.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강렬하게 찾는 이에게 유토피아는 예기치 못한 선물을 준다. 그것이 본질이라면 본질이고, 우리는 이상향을 찾는 미술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본질을 발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