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은 고리가 두 개 달린 문인 [here & there]로부터 여정을 시작한다. 여기와 저기라는 구별되는 두 세계를 나누는 문턱은 세계의 신비를 열게 될 두 개의 열쇄를 요구한다. 그 옆에는 그이기도 하고 그녀이기도 한 작품 [s-he]가 있다. 이 양성체는 다양한 크기와 밝기로 빛나는 전구들이 수많은 케이블 타이로 연결되어 포도송이처럼 메달려 있다. 빛의 입자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인간은 유기체의 조건을 초월한다. 사람과 문이라는 연극적 장치는 잔디로 연결된 또 다른 무대로 관객을 이동시킨다. 작품 [ARTFICIAL GARDEN]은 바닥에 푹신한 잔디가 깔려 있고 입체로 튀어 나와 보이는 레드 빛이 벽을 뒤덮는다. 실내에 균일하게 깔린 잔디, 인공태양을 방불케 하는 빛의 벽은 촉촉함과 눈부심, 열기 등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며 명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레드 빛은 마치 숨 쉬듯이 서서히 변화하면서 관객이 들어선 연극적 공간에 시간성을 부여한다. 맞은편에 걸린 작품 [where I am]은 빛이 들어오는 숲과 어스름한 저녁의 숲을 거꾸로 붙여놓았다. 두 개의 문고리, 여자이자 남자, 밤이자 낮 등등의 대조 항의 공존은 자연과 인공 역시 짝패 관계로 설정한다. 오늘날 이미 많이 파괴된 자연은 자본이나 기술에 의해 복원되고 유지된다. 전체 자연이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인간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와 그 부근의 자연은 그러하다. 자연과 인공의 결합인 정원에 인공이란 말을 한 번 더 붙인 이진준의 작품에서, 새로이 구성된 자연은 야생의 자연에 내재된 우연성에 휘둘리지 않고, 최적의 상태로 조절된다. 자연을 제어하는 기술의 진보에는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이 투사되어 있다. 빌딩 숲에 둘러싸인 인공 정원을 지배하는 것은 빛이다. 이진준의 작품은 미래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안전하게 둘러쳐진 공간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이라는 오래된 상상력이 있다.
암담하고 불확실한 현실에 대조되는 찬란한 빛의 대비는 천국이나 에덴을 흉내 내는 도시의 모델이었다. 초자연적 광채로 빛나는 성스러운 도시의 이미지 속에서 자연 역시 융단처럼 길들어진다. 이진준의 인공정원은 천국을 순수한 빛의 세계로 간주한 신학적 비전--‘우주는 움직이지 않고 다만 밝은 빛을 내는 큰 기계와 같다’(토마스 아퀴나스)--이 구현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의 21세기 버전처럼 보인다. 광장처럼 보이기도 하는 빛이 드는 성소는 도시의 축소판이며, 유토피아적 상상의 구조물이다. 고른 잔디의 판과 레드 빛을 입체적으로 변화시키는 플라스틱판은 규격화된 구성단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의 조합이 총체적 환경을 구성한다. 그것은 모델 하우스처럼 분해되어 다시 조립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가변성과 조절이라는 인공적 규칙으로 변모된다.
조합의 수를 무한대로 늘릴 수 있는 기술의 힘은 체계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요컨대 이 맥락에서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 된다.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의 한 축을 이루었던, 엄격하게 잘 배열된 인간적 행복으로의 유토피아를 말한다.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에서는 자유가 아니라, 세분화시킨 질서가 모든 사람의 행복을 관할하는 척도가 된다. 근대에 종교의 역할을 떠맡은 과학과 이성은 중세적인 혼돈과 무(無)를 일소하려 했다. 빛의 도시와 그 안의 자연을 이루는 유토피아적 구조물은 복제 기술과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사회의 도래와 연결된다. 공간을 돌아 다시 그 앞에 선 관객에게 망점이 살아있는 스크린으로서의 문은 하이퍼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보인다.
출전; 월간 미술 10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