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새겨진 시간의 주름



신달호의 작품은 사각형의 안정된 건축적 구조 안에 창이나 문 같은 또 다른 사각형을 뚫어놓고 그 안에 나무인 듯한 사람인 듯한 형상들을 배치한다. 그 바깥으로는 안을 향하는 계단이 어김없이 연결되어 있다. 돌아가며 관람할 수 있는 조각의 특성상, 계단은 뒤쪽에도 있다. 그의 작품은 우주 및 삶을 지배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대항하듯, 질서 잡혀진 구조로 환원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느껴진다. 회복이나 복원을 가리키는, 작품 제목으로 사용하는 ‘restoration-image’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순리에 어긋나지 않는 자연적 법칙으로의 환원에 예술이라는 인간적 규칙이 결합된다. 그것은 계단으로 나타나듯이, 좁게 난 길이고 상승이며 궁극적인 목적이다. 사람 또는 자연을 둘러싸는 구조는 건축적이지만, 특정한 건축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작품은 건축을 이루는 전형적인 요소들만 발췌된다.

그 안의 인간을 보호해주면서 바깥으로 뚫린 사각형 공간, 그리고 안/밖, 위/아래를 구별하는 계단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둘러싸는 사각 틀은 여러 차원(주로 크기)에서 반복되면서 기계처럼 인간을 외계로 확장한 것이 바로 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동판을 용접하거나 대리석, 화강석 등으로 만들어진 집-인간이라는 소우주는 영원히 그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신달호의 조각에서 공간적 고착화에 대항하는 시간성의 흐름은 표면의 회화적 효과로부터 온다. 이것은 작가가 가장 공을 많이 들이는 부분이며, 관객들로부터도 호응을 받는 부분이다. 동판 용접 작품의 경우, 금속 표면에 플라즈마를 고온으로 쏴서 녹아 생겨난 질감을 통해 작품 표면의 미묘한 색이 나온다. 2mm의 얇은 동판이기 때문에, 금방 뜨거워졌다가 식는 재료의 성격상, 판 전체가 고르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표면의 스크래치는 공간을 공략하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시간의 주름은 나무와 중첩된 인간상에도 반복된다. 나무와 인간은 모두 주름으로 둘러싸인 유기체인 것이다. 돌 작품의 경우 그라인더로 스크래치를 낸다. 신달호의 이전 작품에서는 작품 외곽선이 쥐가 뜯어먹은 듯한 우툴두툴한 형태가 발견되곤 하는데, 작품 표면의 스크래치 또한 그러한 표현 방식의 변주로 보인다. 스크래치는 작품 안팎에 모두 있으며, 때로 강한 스크래치는 금속 표면에 구멍을 내어 안의 공간을 보이게 한다. 그 안에 조명을 설치하여 구멍 사이로 빛이 스며나와 밤하늘에 빛나는 별 같은 효과도 준다. 작품 [restoration-image 10-8]은 두 개의 판이 연결된 건축적 구조 안에 세 명의 사람이 서 있다. 계단은 사람이 있는 창을 향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작품 [restoration-image 11-01]에는 여러 시간대에 걸쳐 바람이 스쳐간 자국이 벽에 새겨진다.

돌 작품의 경우, 실제 건축적 크기로 확대되기도 한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높이 2미터가 넘는 작품 [restoration-image 11-18]은 계단에 올라갈 수도 있고, 앉을 수 있는 단도 있다. 작품은 꽃과 같이 유기적인 요소가 전면에 드러나기도 하는데, 여전히 사람, 계단, 창문이라는 구조는 반복된다. 작품 [restoration-image 10-18]의 경우, 사각형 액자 안에 창문이 뚫려 있고 그 안에 사람과 계단이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 꽃이 드리워진다. 작품 [restoration-image 10-14]는 거대한 꽃잎 안쪽에 사각형이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서 회화적 효과는 가는 선으로 꽃잎을 반복하여 그림자를 작품에 끌어들인 것이다. 신달호의 작품에서 구조, 또는 틀의 핵심에는 사람 또는 나무가 있다. 그것들은 미루나무면서 사람이다. 가까이 붙어있는 두 그루는 연인 같고, 세 그루는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거친 자연이 아니라, 정원이나 집처럼 질서화 된 구조 위에 자리 잡고 뿌리내린다.

미루나무는 빨리 크게 자라서 1970년대에 가로수로 많이 심어진 나무로, 작가의 기억 속에 대표적인 나무로 깊이 새겨져 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머리를 하늘로 두는 나무는 인간과의 비유를 멈춘 적이 없다. 나무는 기둥 형식의 조각적 기념비의 원형이 되었으며, 신달호의 작품에서 미니어처처럼 재생된다. 삼계를 연결하는 나무의 상징주의는 신격을 부여받았으며, 이와 비유되는 인간 역시 그냥 인간이 아니라, 신인동형론이 말하는 바처럼, 신인(神人)이다. 나무로 비유되어 중심에 놓여 진 인간, 또는 인간의 삶은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 벽으로 비유되는 판에 새겨진 시간의 주름이 나무-인간에게도 반복되지만, 그것은 처음과 끝이 연결된 순환적 구조를 가진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종교사 개론]에서 나무를 ‘끊임없이 재생하는 살아있는 우주를 구현 한다’고 보았듯이, 나무는 ‘불멸의 생의 나무’가 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무궁한 삶은 또한 고대의 존재론에서 절대적 현실이라는 개념의 표현이므로, 나무는 그 경우 이 절대적 현실의 상징, 즉 세계의 중심이 된다. 신달호의 나무-인간은 우주목 처럼 세계의 중심에 성스러운 곳에, 실재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무는 인간이며 세계상이고 우주축이다. 어떤 의미 있는 존재나 행위가 유효성을 획득하는 것은 사물이 하늘의 원형을 지니거나 행위가 원초의 우주론적 행위를 반복할 때에 한한다. 그리하여 개별성은 보편성으로 승화된다. 하늘 쪽에 머리를 두고 아래의 것들을 위로 끌어올리는 나무의 구조와 생태는 인간의 정신적 초월과 비유되며, 이러한 움직임은 상승 지향적인 계단을 통해서 반복된다. 계단들은 거의 세 개이다. 작가에 의하면 두 개는 너무 적고 네 개는 너무 복잡하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계단이 건축의 재현이 아니라, 일종의 상징주의로 작동함을 알려준다.

안네마리 쉼멜은 [수의 신비와 마법]에서 심리학자는 ‘3은 2가 갈라놓은 것을 다시 복원 시킨다’고 인용한다. 2에 의한 대립을 넘어서는 3은 분열을 부정하고 극복한다. 쉼멜은 그것이 마치 아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결합시켜주는 제3의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고 본다. 계단이 향하는 나무-인간들이 연인, 또는 부부의 이미지이며, 그것이 빈번히 가족의 이미지로 연결되는 것은 3이라는 수비학적 상징주의로도 설명된다. [수의 신비와 마법]에 의하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절대적인 하나가 대립된 두 힘으로 분리되면서 세계가 창조되고 두 힘이 셋으로 화합하면서 생명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단테는 3을 사랑의 원리로 이해했다. 여기에서 사랑은 곧 종합의 힘이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일체가 되는 삼위 일체 같은 종교적 상징주의로 구체화되곤 하였다. 3은 일체를 이루는 포괄적인 수로, 통일감과 안정감이 주조를 이루는 신달호의 작품에 깊이 새겨져 있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