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또는 세계의 연속적인 형성



김성관의 ‘flow’ 전은 자연의 근본적 요소의 하나인 물의 이미지를 돌조각으로 구현한다. 힘차게 굽이치며 다양한 형태를 만드는 물의 이미지는 화강석이라는 단단한 재료를 통해 순간 멈춤을 하고, 그 앞으로 관객 또는 대중의 발걸음 또한 멈추게 한다. 전시된 작품들은 돌의 표면 질감을 달리해서 다채로움과 역동성을 강조 했다. 표면 질감의 차이는 꼬인 주름의 결을 두드러지게 한다. 이 전시는 물의 다양한 요소 중 흐름에 주목했다. 특히 둥글게 소용돌이치는 흐름은 물의 물리적 형태보다는 그것이 자아내는 기(氣)나 에너지를 강조한다. 작품들은 특정 소재의 물리적인 운동 뿐 아니라, 비가시적인 과정까지 포함한다. 작품의 주요 구성요소인 물방울 형태와 꼬인 주름 형태의 흐름은 재현과 생성을 모두 포함한다. 물은 어디에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정해지는 가변적인 소재이다.

헤겔이 [자연철학]에서 말하듯이, ‘자신을 감추고 상대방을 드러내는 물은 타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소극적인 물질’로, ‘물은 만물의 어머니’이지만, 물은 그자체로 자명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물에는 형태의 발생과 분화를 추동하는 힘이 내재해 있다. 김성관의 작품에 나오는 끝이 뾰족하고 아래가 둥그스름한 빗방울 형태는 물에 대한 전형적 표현에 가깝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물방울과 연결된 흐름 부분은 추상적인 형상으로 채워진다. 돌조각 아닌 모형으로만 전시된 60cm 높이의 작은 작품 3개에서는 비정형적인 물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잠재적 형상들을 가시화한다. 물방울에서 시작된 흐름이 회오리치며 되돌아오는 형태는 물의 순환성을, 물방울 끝으로부터 날개가 솟아나는 형태는 물이 튕겨오를 때의 가벼운 느낌을 표현한다. 돌 작품에서 작은 물방울에서 큰 물방울 사이를 연결하는 꼬인 물살은 모든 지류들이 모여 큰 바다로 가는 여정처럼 보인다. 이 모든 여정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압축적으로 재현된다.

동그란 형태와 회오리 물살의 결합은 안정감과 역동성이 결합되어 있다. 김성관의 작품은 물방울과 흐름이라는 기본적인 구조에 다양한 시공간적인 주름을 부여한다. 그것은 주름과 흐름이 극대화된 복잡한 꼬임부터, 흐름자체가 무한대의 기호를 형성하는 작품에 이른다.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보지 않고 몇 가지 조합 요소로 최대의 다양성을 끌어내는 기술적 방식은 조각을 전공하기 전에 기계공학을 전공한 이력과 관련된다. 조각의 스케치에 컴퓨터를 활용하고 작업 과정을 분업화 시키고, 건축, 조경, 디자인, 환경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는 그의 작품이 향해있는 공공성과 대중성을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돌을 쪼는 작업보다 3D와 시뮬레이션 작업에 더 방점을 찍고 있다고 해서 시간, 자본, 정신적 노동이 적게 소요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이 공공장소에 여전히 필요한 시점에서, 분업화된 영역들을 총체적으로 조율하는 과정 또한 필요하다.

이 과정에 합리적 사고와 방법론을 가진 작가들이 많이 참여해야 현재의 ‘장식미술 사업’은 급변하는 시각적 환경에서 최소한의 심미적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관은 작품 생산과 소비 과정에 효율성을 꾀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창안에 골몰한다. ‘흐름’이라는 전시부제는 고정된 형태보다는 흐름, 즉 물에서 파생되는 운동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다. 그에게 물은 생명의 기원이면서 동시에 조형적 형태의 기원이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물에서 나오는 것은 형상의 발현이라는 우주 발생적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본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물은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모든 창조를 가정한다. 반면 물에 잠기는 것은 형태의 해체, 선(先)존재의 미분화된 양상으로의 복귀에 해당한다. 물과의 접촉은 항상 재생을 함축한다. 한편으로 형태의 해체에는 새로운 탄생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김성관의 작품에서 만물이 물에서 나와 다시 물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는 둥글거나 무한대 기호로 나타난다. 엘리아데는 세계를 탄생시킨 원초적 물에 대한 전승이 고대적이고 원시적인 우주발생론 속에서 무수한 변형 형태로 만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생명 다시 말해, 실재는 어떤 우주적 물질 속에 응축되어 있으며, 모든 살아있는 형태는 직계 자손으로서 또는 상징적 분유에 의해서 그 물질로 파생된다. 물속에서는 모든 것이 용해되고 모든 형태가 붕괴되며 모든 역사가 폐기된다. 그의 작품은 물이 가지는 이원적 속성 중, 소멸과 붕괴보다는 생성과 흐름이 강조된다. 그것은 전시장의 관객 뿐 아니라 공공장소에 놓여 지기를 목표로 하는 조각이 지향하는 밝고 긍정적인 경향성이다. 그것은 물이 가지는 정화력과도 연결된다. 둥글거나 무한대의 기호로 형상화 되곤 하는 흐름은 물질 또는 에너지의 순환성을 표현한다.

알레브 라이틀 크루티어는 [물의 역사]에서 끝없이 진행되는 물의 순환은 이 세상 물의 97%를 차지하는 바닷물의 기화로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태양열로 기화된 물이 수증기가 되고, 이 수증기가 대기로 들어가 구름이 된다. 구름이 응축되면 물이 비나 눈의 형태로 다시 대지로 떨어져 물을 재공급 한다. 그러나 흐름은 물에서 가장 쉽게 발견될 수 있을 뿐, ‘흐름’이라는 김성관 전의 부제는 꼭 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가령 많은 부분이 물로 구성된 우리의 몸 역시 끝없는 욕망의 흐름에 의해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꼭 물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물리적인 흐름에 다양한 속도와 각도를 부여한 그의 작품은 자연에 가득 한 물활론적인 활기를 느끼게 한다. ‘만물은 끝없이 흐른다’(루크레티우스)는 사고는 고대적인 기원을 가진다. 콜링우드는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그리스의 자연과학은 ‘자연세계에는 정신(mind)이 충만하다’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사상가들은 자연에 내재하는 정신이 자연세계의 규칙이나 질서의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했던 자연세계는 운동하는 물체들의 세계였다. 그리스인들에 따르면 운동 자체는 생명력 또는 영혼에 기인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자연세계는 스스로 운동하는 살아있는 세계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17세기의 물질세계에서와 같이 관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자발적인 운동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이다. 자연 그자체가 과정이고 성장이며 변화이다. 이런 과정이 발전이다. 김성관의 작품은 역동적이면서도 균형이 잡혀있다. 그것은 만물의 끝없는 흐름과 로고스를 모순관계로 설정하지 않은 자연에 대한 고전주의적 사고와 관계된다. 고전주의는 근대 과학사상의 일부를 형성했다. 근대 과학기술은 자연에 대한 고전적 사고에 경험이나 실험이 강화된 것이다.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고전주의 시대의 일반체계는 어떤 균형과 상태, 조화로운 공간 구성이라고 지적한다. 전반적인 구성 법칙이 모든 영역에서 되풀이 된다.

자연은 역사의 어떤 시기에 정밀과학의 대상이 된 공시적인 물체 전체가 된다. 고전주의 시대부터 정밀과학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최적 관계로 이해된다. 이성은 최적화된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이며 언제나 무적이다. 순서관계에 의해 구조화된 공간, 순환, 게임, 수순, 놀이의 종료, 승리자가 발견될 것이다. 그것은 질서에 대한 경직된 이해를 낳았다. 김성관의 작품과 방법론은 고전적 자연과 과학에 대한 사고가 발견되지만, 체계만큼이나 운동성이 강조된다. 고전과학의 경직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미셀 세르는 이제부터 체계라는 용어를 미리 정해진 것에 의해 주어지는 국지적인 총체성과 안정성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로고스는 이제 한계상태, 체계 또는 인식소가 아니라, 발동기이다. 다른 모든 진보에 앞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힘의 선행성이다.

에너지는 지형도에 선행한다. 에너지는 약호들에 선행하며 약호화를 행한다. 자연이라 불리던 것이 에너지의 형태로 현존한다. 모든 체계는 묶인 에너지이다. 김성관의 작품에서 물은 하나의 재현적 체계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흩어지거나 융합되면서 에너지를 발산 또는 흡수한다. 그의 작품에서 물은 근본 요소이지만, 고정이 아니라 과정이 강조되어 있다. 오히려 체계와 질서는 운동으로부터 산출된다. 세르가 말하듯이, 세계의 형성은 끊임이 없으며, 따라서 연속적인 형성이다. 창조는 어느 날 시작되었지만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딱딱한 돌을 유체적인 과정으로 변화시키는 김성관의 작품들은 이러한 거대한 자연사의 흐름에 속해 있다. 그것은 예술을 포함한 인간 역사에 내재된 자연의 몫을 드러내준다.